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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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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문화연구소 김지영 연구원,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출산력’ 정밀 추적

2011. 11. 16.

김지영 박사

저출산은 우리 시대만의 고민은 아니었다. 조선 왕실도 노심초사했다. 왕손의 출생을 '종사지경(螽斯之慶·한 번에 알 99개를 낳는 곤충인 종사에 빗댄 경사)'이라 부를 정도로 다산을 염원했지만 출산력은 갈수록 줄었고 급기야 고종·철종에 이르러서는 방계 자손에서 양자를 들여야 했다.

조선시대 왕실의 인구학적 변화와 사회문화적 원인을 통계학적으로 정밀 추적한 연구 논문이 나왔다.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이 계간 '정신문화연구'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 '조선시대 왕실 여성의 출산력'에서는 왕실 출산이 후기로 갈수록 떨어진 것이 유교 질서의 심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분석한다.

◆ 왕실의 多産 열망은 높았지만

조선 왕실은 왕위 계승자인 원자(元子)의 탄생이 늦어질 때마다 종묘사직의 위기라며 불안해했다. 다산 열망은 여러 형태로 표출됐다. 왕실 가례 집사관을 뽑을 때도 '자식 복이 많은 사람'인지가 중요했다. 숙종과 인원왕후 가례에서 부사를 맡은 인경황후 김씨 친오빠 김진구는 자녀가 9남3녀였다. 왕실 가례에 쓰인 병풍인 '곽분양행락도'는 중국 당대 곽자의(697~781) 장군의 생애를 그린 것으로 그는 8남7녀를 뒀다. 조선 후기 왕실은 '팔자칠서(八子七壻· 8명의 아들과 7명의 사위)'를 목표로 내걸었다.

하지만 인조시대를 분기점으로 총 자녀 수가 이전 183명에서 이후 90명으로 반 토막 났다. 앞서 태종·세종·성종·중종·선조대에는 자녀가 20~29명이었으나, 인조 이후는 4~14명에 그쳤다.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 왕의 여자… 출산의 주축은 후궁

왕실 출산력의 주축은 후궁이었다. 조선시대 왕실 자녀 총 273명 중 왕비 자녀가 93명, 후궁 자녀가 180명(전체 3분의 2)이었다.

후궁에는 간택후궁과 승은후궁이 있었다. 간택후궁은 왕비처럼 가문·부덕·자색을 겸비한 양반집 딸 중에 공식 간택 절차를 거쳐 후궁이 된 경우. 승은후궁은 궁녀 중 왕의 '승은(承恩)'을 입은 여성들이었다. 승은을 입고도 공식 품계를 받지 못한 경우엔 특별상궁이라 해서 직무를 면제받았다. 궁인들의 주 임무는 처소 주인의 시중·바느질·자수·음식·청소·세면·빨래 같은 일이었다. 이 중 침실 시중을 드는 지밀나인이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컸다. 지밀나인의 입궁 나이는 4~10세로 다른 궁인들(12세 내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렸고 따로 시녀 교지(敎旨·왕이 관원에게 내리는 문서)를 받았다.

◆ 후기에는 양반집 딸도 후궁 꺼려

태종은 후궁제의 기초를 닦으면서 왕이 3명의 간택후궁을 두도록 했다. 세종은 아들 문종을 위해 권·정·홍씨 등 3명의 후궁을 동시에 뽑기도 했다. 조선 초기엔 왕 1명당 후궁이 평균 7~8명이었지만 후기에는 평균 3명으로 줄었다. 전기엔 간택후궁(30명)이 승은후궁(28명)보다 많았지만 후기에는 간택후궁(5명)은 줄고 승은후궁(29명)이 늘었다. 그 배경에는 간택후궁의 사회적 지위 추락이 있었다. 전기만 해도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후기에는 드물었다. 선조 이후부터는 왕비가 죽으면 아예 계비를 간택하는 것이 관례가 됐다. 영조는 60세에 15세 신부(정순왕후 김씨)를 계비로 맞았다. 조선 후기에 왕위 계승자를 낳은 후궁을 왕비로 책봉한 사례는 희빈 장씨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종법 질서가 심화됐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이후 '예학'이 발전하고 적장자(嫡長子·정실이 낳은 맏아들)를 통한 집안 계승이 중시된 결과, 처첩 구분이 커졌고, 왕비·후궁 간 지위 격차도 벌어졌다. 양반집에서도 딸을 간택후궁으로 들이는 것을 꺼렸다. 승은후궁의 출산력도 줄면서 헌종 이후 왕실 직계 자손 가계는 단절되기에 이른다.

◆ 설상가상… 왕 금욕 기간도 늘어

여기에는 왕의 금욕도 한몫했다. 조선 중기 이후 유교 의례가 강화되면서 지도층의 상례와 제례 실천이 강조됐다. 상례의 핵심이 '3년상'이었다. 기일로부터 만 24개월간 상중 금욕이 요구됐다. 국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현종비 명성왕후는 효종의 3년상이 끝나고 부묘(祔廟·신주를 종묘에 모심)도 하기 전에 임신하고, 부묘 후 얼마 있지 않아 출산했다가 송시열의 비난을 샀다. 제사 대상자 수도 갈수록 늘어난 데다 다른 국가 제사 기일까지 포함해 왕의 '금욕 기간'은 후기로 갈수록 길어졌다. 왕실은 저출산의 늪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김지영 연구원은 "조선사회의 유교화 과정이 출산과 같은 사적인 일상생활 영역까지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서울대학교 연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