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여성의 일생’ 펴내
억지로 찾아내면 조선 여성의 삶은 결코 억압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또 그렇게 쓴 책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제도적으로 욕망, 특히 문자와 학식, 예술 등 역사에 남을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차단돼 있었다. 박무영(국문학) 연세대 교수,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등 13명의 학자가 쓴 이 책은 이 같은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김운이라는 여성은 18세기 문호 김창협의 딸이다. 대학자인 아버지와 삼촌들로부터 ‘학자’대접을 받을 만큼 학문이 높았지만 “달리 이름을 후세에 남길 방법이 없는 여성의 몸이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아버지의 묘지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나은 일일 것”이라고 아버지에게 자기 묘지명을 부탁했다.
서영수합은 19세기 독서문화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유명했던 홍석주·길주·현주 삼형제의 어머니다. 그녀의 시는 아들들의 손에 의해 편집돼 인쇄됐다. 이 시집의 발문에서 아들들은 그녀가 평소 글을 읽을 줄 안다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시를 짓게 된 것은 남편의 강요에 의해서였고, 시를 짓게 되더라도 입으로 읊어 응했을 뿐 붓을 들어 기록하는 일은 절대로 하려 하지 않았으며 지금 남은 시편들은 남편이 아들들에게 시켜 몰래 적어 두도록 한 것들이라고 밝혔다. 서영수합은 친정의 가학을 익혀 산술학에 정통한 여성이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최신 산술학을 앞지르는 전문적 소양을 지녔다. 그의 문학적 능력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달성된 것으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들들이 어머니를 위해 이런 변명을 남긴 것은 여성의 문필은 금기의 대상인 데다가 공개를 전제로 하는 판본의 출판은 부덕(婦德)에 반하는 부덕(不德)이기 때문이다.
선조때 이옥봉은 빼어난 글솜씨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난 그녀는 뛰어난 글재주로 아버지를 여러 차례 놀라게도 했다. 그녀는 서얼의 신분을 인식, 자신에게 제대로 된 혼처가 없을 것을 알아 남명 조식의 제자인 조원의 소실로 들어갔다. 조원 정도의 문장이면 자신을 인정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웃 아낙의 누명을 벗겨주는 소장에 시를 써줬다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시로써 송사를 해결했으니 다음에는 조정의 일까지 간섭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17, 18세기때 사대부인 김호연재는 ‘평생 나 홀로 속물스런 구석이 없어, 너희 댁과는 기쁘지 못한 일이 많았다/ 눈썹을 낮추고 조심하여 수고를 감내했으나, 부지중 창자 속에 불길이 솟곤 했다’ ‘여자에겐 삼종(三從)이 있어, 천리 밖으로 각기 흩어졌네/사별이 기나길다 말할 것 없다, 살아 이별도 다를 것 없네’라고 아들에게 고백하는 장시를 남겼다. 이 책은 신사임당이 오늘 조선 여성의 대표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비판을 견뎌야 했는지 등 조선시대 여성들의 학문과 예술혼을 재발견하며 그들의 삶의 현장을 담담하지만, 아프게 되돌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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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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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여성의 일생’ 펴내
2010.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