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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어본·일본어본 이어 칙유·각서까지 동일 필체”

2010. 11. 26.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어본·일본어본 이어 칙유·각서까지 동일 필체”

1910년 한·일병합 과정이 일방적·강제적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또 공개됐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한국병합조약의 양국 문서는 물론 이완용을 협정 전권위원으로 임명하는 ‘칙유(勅諭)’, 병합조약 체결을 양국이 동시 발표한다는 내용의 ‘병합조약 및 양국황제조칙 공포에 관한 각서(倂合條約及兩國皇帝詔勅公布覺書)’ 등 4종의 문서가 모두 같은 글씨체로 작성된 것으로 밝혀졌다”며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이날 공개된 4종의 문서 가운데 한국병합조약의 한국어본과 일본어본의 필체가 같음은 지난해 서울대 국사학과 이상찬 교수가 밝혀낸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칙유’와 ‘병합조약 및 양국황제조칙 공포에 관한 각서’도 모두 같은 필체임을 규장각 측이 이번에 밝혀낸 것이다.

규장각 연구원인 윤대원 HK연구교수는 “‘병합조약 및 양국황제조칙 공포에 관한 각서’의 판심(版心:책장 가운데 접힌 부분)에 ‘통감부(統監府)’라고 인쇄돼 있어 이들 문서를 모두 통감부 인사가 작성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일본이 이완용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도록 순종 황제에게 압력을 가했고, 한·일 양국이 각기 작성해야 하는 조약문을 일방적으로 날조했으며, 조약을 양국이 동시 공포하도록 강제했음이 이번에 자료 분석을 통해 밝혀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윤 교수는 또 “조약 체결 당일인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전권위임 임명 위임장 승인 조회비 408호’가 ‘지급(至急:매우 급한 문서)’으로 다뤄진 점으로 볼 때, 순종 황제가 마지막까지 일제 압력을 거부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자료들은 ‘100년 전의 기억, 대한제국’ 특별전에서 일반에도 공개된다. 전시물 가운데 ‘각의제출안목록’도 주목할 만하다. 이 목록에 한국병합 관련 내각회의 내용이 없다. 대한제국 내각회의도 열지 않고 병합이 이뤄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는 데라우치 조선통감이 일본 총리에 보고한 ‘한국병합시말’ 기밀문서의 내용과 다르다. 데라우치는 내각회의가 열렸다고 보고했었다.

특별전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국립고궁박물관과 규장각이 공동 기획했다. 대한제국의 빛과 그림자를 되돌아보자는 취지로 마련했다. 규장각은 병합조약과 국권 침탈과 같은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췄다. 고궁박물관은 대한제국의 근대적 개혁과 황실의 위엄을 보여주는 화려한 유물을 주로 전시한다. 대한제국기 전신선 및 철로 등을 그린 ‘우전선로도본(郵電線路圖本)’이 처음 공개된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을 보여주는 자료다. 당시 신문과 우표, 명성황후의 금보(金寶)와 금책(金冊), 서양식 관복(官服), 황실 가족 사진과 도자기·가구 등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