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양반의 일생’ 펴내
고시보다 치열했던 과거… 이름 6번 바꾸며 응시하기도
중국 명·청시대 문과 최종 시험 합격자의 정원은 300명, 조선은 33명이었다. 인구 규모를 보면 큰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지만 조선에서는 3년에 한번 실시되는 정규의 문과시험(식년시·式年試) 이외에 임시 시험이 수시로 실시됐는 데 비해서 중국에서는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
따라서 명·청시대의 문과 급제자 총수는 약 5만1000명으로 추정되는 데 비해 조선시대의 급제자 총수는 1만4000명 정도로, 인구 규모에 비해 조선이 훨씬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게 됐다. 중국에서는 천민(주로 범죄자)을 제외한 모든 남자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조선의 과거는 실질적으로 양반(兩班)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진 것도 큰 차이점이다. 일반 백성의 아들이 문과에 자주 급제하는 등 사회 하층에서 상층으로 오르는 길이 항상 열려 있어 개방적이었던 중국의 과거와 비교한다면 신분 상승 이동의 기회가
극히 한정돼 있었던 조선의 과거는 폐쇄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최근 엮어 펴낸 ‘조선 양반의 일생’은 이처럼 중국의 사대부는 물론 일본의 무사(武士)와도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현상이었던 조선시대 양반의 생애사를 미세한 부분까지 복원해낸다.
올 상반기 ‘고문헌 자료로 본 조선 양반의 일생’을 주제로 연 시민강좌의 내용을 다듬어 묶은 책에는 동아시아 양반 문화를 거시적으로 비교한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의 논고를 비롯, 다양한 고문서와 도판 자료를 활용해 조선시대 양반의 생활사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총 12편의 글이 실려 있다.
가령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실장은 영·정조 시절 무려 여섯 번이나 이름을 바꾸며 과거에 응시했던 진주 유생 하명상(1701∼1774)의 사례를 들며 지금의 고시 공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처절했던 과거 공부의 실상을 소개한다. 박홍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조선시대 100개에 불과했던 당상관 관직을 둘러싼 치열했던 자리다툼과 관료들의 신참 신고식이었던 면신례(免新禮)를 설명한다. 율곡 이이도 면신을 통과하지 못해 낙향했을 정도다.
이밖에 이성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16세기 녹봉이 제 구실을 못한 상황에서 관직생활 10년간 지방관 등으로부터 총 2855회에 걸쳐 선물을 받아 가계를 꾸려나갔던 유희춘의 사례를 통해 당시 양반 관료의 선물 수수 행위가 상당히 보편화된 경제운용 체제였음을 지적한다.
2009. 12. 14
서울대학교 연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