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화학부 이동환 교수 연구진은 지금까지 알려진 분자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적색광 발광체를 발명하고, 긴 파장에서 빛이 나오는 광물리학적 메커니즘을 이론적으로 규명함으로써, 형광 분자의 새로운 설계 전략을 제시했다. 이 결과는 국제학술지인 Nature Communications에 9월 13일(월) 온라인으로 발표되었다.
양자역학을 처음 배울 때 늘 등장하는 간단한“상자 속 입자(particle-in-a-box)” 모델에 따르면, 분자가 낮은 에너지에서 빛을 내기 위해서는 전자가 돌아다닐 수 있는 “큰 상자”가 있어야 한다. 이 조건을 화학 구조에 대입해 보면 파이-결합 여러 개가 잇달아 연결된 커다란 분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 알려진 장파장 발광체는 파이-결합을 하는 여러 개의 탄소 고리를 붙여서 만든다. 크고 평평한 분자는 고체상에서 응집을 통해 개별 분자의 고유한 광물리학적 성질을 잃거나, 들뜬 상태에서 전자 전달과 에너지 전달 등 복잡한 경로 때문에 빛을 내는 성질이 바뀌기 쉽다.
방향족 탄화수소는 빛을 흡수하는 에너지와 빛을 내놓는 에너지의 차이에 해당하는 스토크스(Stokes) 이동이 분자의 크기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점에 착안해서, 연구진은 스토크스 이동이 가장 큰 벤젠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가장 크기가 작은 방향족 탄화수소인 벤젠은 스토크스 이동이 크지만, 자외선 영역에서 빛을 흡수하고 내놓기 때문에 형광체로 활용되기는 어렵다. 이동환 교수 연구진은 벤젠을 이루는 탄소 육각 고리 주변에 전자 주개인 아민기와 전자 받개인 아세틸기를 대칭적으로 도입함으로써, 가시광 영역에서 빛을 내는 벤젠 유도체인 DAPA(= diacetylphenylenediamine의 약자)의 여러 이성질체를 설계하고 합성했다.
세 종류의 DAPA 이성질체는 원소 조성면에서는 똑같지만, 전자 주개-전자 받개의 위치에 따라 매우 다른 발광 특성을 보이는데, 그 가운데 p-DAPA는 지금까지 알려진 적색광 형광체(발광 파장 600 nm 이상) 중 가장 작은 분자량(MW = 192)을 가진다. 상자 속 입자 모델에서 아주 작은 상자에 해당하는 이 분자가 놀랍도록 긴 파장에서 빛을 낼 수 있는 이유는 4500 cm–1 이상의 큰 스토크스 이동이 있기 때문이다. 들뜬 상태에서 반방향성(antiaromaticity)때문에 에너지 면에서 불안정했던 벤젠 고리의 전자 구조가 수소 결합의 도움으로 탄소-탄소 결합 길이 재배열이 일어나는 경로를 따라 안정성을 회복하는 방식으로 큰 스토크스 이동이 생긴다. 들뜬 상태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흥미로운 메커니즘은 이론화학/계산화학 전문가인 경북대학교 최철호 교수 연구진과 공동연구를 통해 세계 최초로 자세하게 밝힐 수 있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간단한 것은 우아하다. 본 연구는 아주 작은 분자로도 장파장의 형광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이론적인 토대를 세우고, 가시광 전 영역에 걸쳐 빛을 내는 가장 작은 형광체 라이브러리를 합성으로 구현함으로써 기능성 분자의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이 연구는 삼성미래기술육성재단과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연구결과]
Relief of excited-state antiaromaticity enablesthe smallest red emitter
Heechan Kim, Woojin Park, Younghun Kim, Michael Filatov*, Cheol Ho Choi*, and Dongwhan Lee*
(Nature Communications, in press)
분자 형광체를 설계할 때는 목적에 따라 크기, 발광 및 흡광 파장, 합성화학적 확장성, 양자 수율 등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크기가 작은 형광체는 생체 이미징에 응용할 때 생물학적 시스템에 영향을 주지 않고, 전자 재료로 응용할 때 소광 현상이 작기 때문에 두드러진 이점을 갖는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형광체는 일반적으로 짧은 발광 파장을 갖기 때문에 가시광이나 적외선 발광체로 활용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본 연구에서는 벤젠 고리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만, 가시광선의 전 영역에서 빛을 내는 DAPA 형광체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다.
DAPA 분자는 구조에 따라 뚜렷이 다른 광물리학적 특성을 보인다. 원자 조성은 같지만, 용액상에서 o-DAPA와 p-DAPA는 각각 녹색과 적색의 형광을 보이는 반면, m-DAPA에서는 발광이 전혀 관찰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성질체의 이러한 상이한 거동은 MRSF-TDDFT (mixed-reference spin-flip time-dependent density functional theory) 방법론을 통해 양자화학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DAPA 분자에서 인접한 아민–아세틸 치환기 사이의 수소 결합은 들뜬 상태에서의 양성자 이동을 촉진한다. 양성자 이동에 주안점을 두어 반응 경로를 따라가며 바닥 상태와 들뜬 상태의 에너지를 추적한 결과, 아민 치환기의 산성이 가장 큰 m-DAPA만이 들뜬 상태에서 양성자 이동에 의해 촉진되는 내부 전환(internal conversion)으로 소광 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이동환 교수 연구진은 우수한 형광 특성과 뛰어난 확장성을 갖는 p-DAPA에 다양한 카보닐 치환기를 체계적으로 도입하는 합성 전략을 통해, 가시광선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형광체 라이브러리를 만들 수 있었다. DAPA 형광체 라이브러리는 청색에 해당하는 471 nm부터 적색에 해당하는 618 nm까지 넓은 파장대에서 빛을 낸다.
벤젠 고리 단 하나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분자가 어떻게 이렇게 장파장에서 빛을 낼 수 있을까? 연구진은 들뜬 상태의 벤젠 고리가 갖는 반방향성(antiaromaticity)이 들뜬 상태의 에너지와 구조와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러한 모델은 방향성(aromaticity)과 반방향성을 판별하는 전자적 척도인 NICS(nucleus independent chemical shift) 값과 기하학적 척도인 HOMA(harmonic oscillator model of aromaticity) 값을 비교함으로써 검증할 수 있었다. 들뜬 상태의 벤젠 고리가 갖는 큰 반방향성이 구조 변화를 유발하고, 이 때문에 흡광 에너지와 발광 에너지 사이에 큰 차이(= 스토크스 이동)가 생기기 때문에, 육각 탄소 고리 하나로 이루어진 벤젠 유도체로도 장파장 발광이 가능하다.
[용어설명]
- ○흡광 에너지와 발광 에너지의 차이를 의미한다. 바닥 상태와 비교했을 때, 들뜬 상태에서 구조변화가 크면 스토크스 이동도 크다.
- ○화학 분자의 방향성(aromaticity)과 특정 전자 구조의 안정성을 설명하는 휘켈 규칙(Hückel's rule, 흔히 4n + 2 규칙으로도 알려져 있다)은 들뜬 상태에서 선호도의 반전이 일어난다. 즉, 바닥 상태에서 방향성을 갖는 분자는 들뜬 상태에서는 반방향성을 갖고, 바닥 상태에서 반방향성을 갖는 분자는 들뜬 상태에서는 방향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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