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는 러시아 극동지역으로부터 중국, 한반도, 일본, 베트남까지 분포하며, 유럽의 여러나라에도 인위적으로 도입되어 분포하고 있는 동아시아 고유종이다. 지금까지 너구리는 모두 같은 종으로 간주되어, 하나의 종으로 분류되어 왔다(학명: Nyctereutes procyonoides).
서울대학교 기무라(Junpei Kimura) 교수 연구팀과 일본 오비히로축산대학교 오시다 교수 연구팀은 동아시아 각 지역의 너구리 개체군이 조금씩 다른 형태를 가지며, 특히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륙에 서식하는 너구리와 일본의 너구리는 형태적으로 크게 다르다는 것을 최초로 밝혀냈다.
러시아, 중국, 일본의 자연사박물관 및 연구기관의 협조를 얻어 각 기관에 보관된 너구리 두개골 형태를 비교한 결과, 추운 환경에 적응된 극동러시아 및 북해도 너구리 집단의 두개골 크기가 다른 집단에 비해 유의하게 크다는 것을 확인하였다(1)베르그만의 법칙.
한국, 중국, 일본 혼슈집단의 두개골은 중간 크기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시코쿠집단에서는 가장 유의하게 작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구리는 일반적으로 열매부터 곤충,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작은 포유류, 동물의 사체 등에 이르기 까지, 서식환경에 따라 쉽게 얻을 수 있는 다양한 먹이원을 두루 이용하는 잡식동물이다. 본 연구결과는 러시아극동과 북해도 집단이 남쪽에 서식하는 집단에 비해 열육치(먹이를 자르는 기능을 가진 날카롭고 큰 어금니: 위턱 네번째 앞어금니와 아랫턱 첫번째 뒷어금니)가 잘 발달하고 주둥이 길이가 짧다는 것을 보여준다. 육식성이 강한 종일수록 이러한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북쪽 집단이 상대적으로 육식성향이 더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대륙의 너구리와 도서지역인 일본의 너구리가 형태적으로 매우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몸 크기에 비례하는 두개골길이(total length)와 광대뼈넓이(zygomatic breadth)가 대륙집단에 비해 일본집단이 유의하게 작다고 판명되었다. 기존의 연구결과도 대륙너구리와 일본너구리 사이에는 계통유전학[1] 및 세포유전학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너구리가 섬이라는 특이적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라 생각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환경에 처한 너구리 집단의 빠른 적응에 따른 결과가 형태적인 차이와 유전적 차이로 이어지게 되어 다른 종으로 진화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연구에서는 일본너구리만이 가진 유전적, 형태적 특성을 근거로 대륙 너구리와 다른 종으로 분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국내 및 국제적인 너구리 개체군 관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 연구의 공동연구자인 서울대 민미숙 연구교수는"각 지역의 너구리 개체군의 유전적·형태적 특성이 보전되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즉, 각 지역환경의 특성에 적응되어 진화된 개체들을 인위적으로 함부로 이동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의 너구리와 일본의 너구리는 종 수준에서 차이가 나므로 동물원 등 사육 상태에서 잡종화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도서지역이라는 고립된 지리적 특성과 생태환경을 가진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서식하는 동물의 진화역사와 종 분화를 밝히는 것은 각 지역 특성에 적합하게 진화한 집단의 보전과 관리정책 설정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야생동물 보전관리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는 형태학, 유전학, 생태학과 같은 기초데이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본 연구는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진은 비교해부학이라는 기초학문을 바탕으로 너구리 두개골의 비교형태연구를 추진하였다.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 전국각지의 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서울대 야생동물유전자원은행으로 기증된 사체들을 모아 두개골 표본을 제작하였고, 해외의 다른 너구리 아종과 비교분석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현재 한국너구리의 골격표본은 기무라 교수의 연구실에서 관리 및 보관 하고 있다.
기무라 교수는 2007년 서울대 수의과대학에 해부학 교수로 부임한 이래, 한국의 포유동물 기초형태해부학 연구에 전념해 왔으며, 이를 위해 그 동안 국내 야생포유류의 골격표본 28종 500여 점을 수집, 제작, 보존해 왔다. 이러한 포유류 표본 소장품은 국내에서 유일한 규모의 것이다.
기무라 교수는 이 표본들을 한국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이 건립되거나, 또는 서울대학교에 자연사박물관이 건립되면 기증하여 후학들의 연구재료로 사용될 것을 희망하고 있다.
동물형태학 또는 해부학 연구는 21세기첨단 분자생물학과 같은 학문에 비해 뒤떨어진 학문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분야는 동물분류학과 생물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야생동물, 특히 포유류의 골격형태 연구는 해외의 동물학 연구에 비해 크게 뒤쳐져 있는 실정이다.
원인은 첫째, 1900년대 초반 무차별적인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많은 포유동물들이 멸종되었고 그 표본마저 국내에는 얼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현대 과학에서 골격표본의 학문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부재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없는 나라라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국립자연사박물관과 같이 골격형태연구를 진행할 연구시료를 수집, 보존, 연구하는 연구기관이나 박물관이 미비한 실정이다.
본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연구비지원(NRF-2009-0085754)으로 이루어졌으며 연구결과는 생물지리학분야의 국제학술지 <Biological Journal of Linnean Society>에 2015년 8월 20일 온라인판에 게재되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