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이 저물어가던 11월 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라는 절규와 함께 근로기준법을 가슴에 안은 채 스스로 불꽃이 되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초과근무수당을 국가가 법으로 규정한 근로기준법이 이 땅에 최초로 제정된 해는 1953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이나 지났지만 1970년대 한국 사회는 경제 개발이란 미명 하에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정당한 대가마저 포기하도록 강요했고,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부인했다. 이에 대한 저항을 온몸으로 외친 젊은 노동자가 바로 전태일이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시간을 1일 10~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현재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09.)
22살 청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그가 사회에 던진 육탄에 학생, 지식인들은 비로소 노동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가장 먼저 법대생들이 나섰다. 분신 소식을 접하고는 그가 운명한 성모병원으로 달려가 법대 학생장을 논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였다. 최종고 명예교수는 13일 당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법대 학생장을 논의하기까지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하루는 조영래가 오더니 “지금 책만 보고 있을 때냐?”라고 하면서 전태일 분신사건을 알려줬어요. 지금 명동 성모병원 영안실에 있는데, 생전에 기독교 대학생을 친구로 사귀고 싶어 했다고 그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둘이서 서둘러 갔더니 경찰들이 제지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갔는지 뚫고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이소선 여사가 나를 처음 보는데 마치 오랫동안 알고 있던 아들 같이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느냐?”라고 나무라기라도 하는 것 같아 너무 놀랐어요. 같이 기도하자고 하면서 기도를 하시는데,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옆을 봤더니 현영학, 서광선 같은 이화여대 신학자들과 오재식 같은 기독학생연맹 간사 일행이었어요. 장례절차를 논의하는데, 제일 가까운 곳이 내가 나가는 영락교회니깐 그리로 가자고 해서, 그 길로 밤 9시쯤 영락교회로 갔어요. 갔더니 서울법대를 중퇴한 사찰집사가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면서 이런 골칫거리를 왜 교회로 데리러 왔냐고 나무라더라고요. 그리고 목사님이 지금 주무시는데 어떻게 깨우냐고 하길래 교회문을 나와서, 대안으로 서울법대에서 장례식을 치르자고 했어요.” (한인섭 외, 「청리 최종고 교수 정년기념대담」, 『서울대학교 법학』 54(1),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13.)
1970년 11월 조영래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최종고는 법과대학 대학원생이자 영락교회 청년대학부 회장을 맡고 있었다. 조영래는 친구인 장기표에게 전태일 사건을 전해 듣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찾아가게 된다. 처음에는 영락교회에서 장례를 치르고자 하였으나 반대에 부딪혀 법대 학생장을 논의하게 된다. 하지만 경찰의 방해를 받아 5명의 법대생들이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고, 결국 법대학생장은 무산되었다.
법대에는 일찍이 노동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였던 사회법학회, 후진국사회연구회 등이 있었고 민권 확장을 위한 상설민권기구 설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이를 주도한 사람이 법과대학 학생회장 장기표였다. 그는 전태일 열사의 유족과 평화시장 노동자들과의 중간다리 역할을 맡아 분주히 움직였다. 전태일이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장기표를 비롯한 법대생 100여 명이 가칭 ‘민권수호학생연맹준비회’를 발족하여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학생모임을 가지고 전태일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노동실태를 조사할 것에 모든 학생들이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조사결과 노동조건이 너무 가혹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경우 이의 개선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하였다.
농성근로자 분신자살 – 처우개선 외치던 청년, 「근로기준법」 껴안고, 민권수호학생연맹준비위원회, 1970년대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이후 서울대 법과대학 학생 100명은 가칭 민권수호학생연맹준비회를 발족하고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이 호소문에는 “내 죽음 헛되이 말라!” 유언하며 분신자살하기까지 전태일의 투쟁 과정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동료 6명도 혈서”, “126명 중 96명이 폐결핵 등에”, “해고당한 후부터 근로기준법 연구”, “2만 7천명 근로자의 참상”이라는 꼭지로 짚어내고 있다. 또한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아들의 시체 인수를 거부했다는 뜻을 알리면서 마지막으로 학우들에게 “전태일 선생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맙시다.”라고 호소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학생들 수백 명이 관련 추도식과 집회를 열었고, 계속해서 전국 각지의 학생과 청년들의 집회로 확산되었다.
이틀 뒤인 18일, 400여명의 상과대학 학생들도 학생총회를 개최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한 후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교수들은 학생들을 붙들고 해산할 것을 종용했으나 학생들은 진상조사위원회를 결성하여, 노동자 실태조사 실시를 주장하며 “정부는 고도성장이라는 미명하에 특수계층의 권익만을 옹호하고 노동대중의 수탈을 정당화한 종래의 경제정책을 연대 혁신할 것을 촉구한다. 노총은 누구를 위하여 존립하고 활동하는지 자각하라.”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같은 날 공대는 추모행사에 대한 대의원회를 소집하였으나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이렇듯 학생들의 계속되는 시위로 긴장한 정부의 압력 속에 경찰이 고인의 주검을 옮겨 전태일이 다니던 창현교회(현 갈릴리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소수의 법대생들은 힘겹게 장례식에 참석하여 ‘민권투사 전태일’ 이라는 만장을 가지고 모란공원 묘지에 따라갔으며 고인이 살던 쌍문동 단칸방을 방문하기도 했다.
법대종강 문리대 임시휴강 - 고 전태일 씨 추도행사로
대학신문, 1970.11.23.
전태일의 죽음 이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추모행사를 열고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였다. 학내 분위기가 고조되자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집단화 행동으로 정상적인 학교 수업이 불가능할 것을 우려하여, 법대는 종강, 문리대는 임시휴강하기로 조치하였다. 사회학과 2학년 학생이 휘발유가 든 통을 숨겨 학교로 들여오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학교의 조기 종강으로 학생들의 움직임은 점차 수그러들었지만, 이후 학생들의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노동자’, ‘노동권’이 1970년대 학생운동의 주요 이슈 중 하나로 부각되었다.
“법대는 20일 하오 3시 70년도 2학기 수업을 20일로 종강키로 했다. 이어 문리대도 지난 21일 하루 동안 모든 강의를 휴강하기로 했다가 23일까지 연기하기로 했다. 이 조치는 학생들이 20일 학교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 전태일 씨의 추도행사를 외부 인사들과 타대학 학생들의 참석리에 강행하려하고 그렇게 될 경우 대학의 질서가 마비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다. … 또한 학생들의 농성장소로 자주 사용되던 법대법률도서관과 문리대 구내에서는 서울대학교 부속도서관이 21일과 23일 임시 휴관했다.”
11월 20일 오전 12시 법대 교정에서는 법대생 약 200여 명이 전태일 추모식을 평화시장 종업원과 시내 각 대학학생회 및 청년 학생종교단체와 공동으로 개최하려다 학교당국의 제지로 법대생만의 추도식을 가졌다. 학생들은 교정에 영정사진을 안치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추도식을 시작했다. 대학회장단이 공동으로 마련한 추도문을 낭독한 다음 추도식을 갖기까지의 경과보고, 이후 자유 성토에 들어가 노동자의 권익옹호를 다짐했다. 이 날 추모식에 참석하려던 문리대생 100여 명과 이대생 40여 명은 문리대 4·19 탑 앞에서 집회를 가지다 스크럼을 짜고 문리대 정문을 나와 법대 쪽으로 행진했으나 경찰에 의해 제지되었다. 문리대생과 합세하려고 하였던 법대생들의 추도행렬 또한 경찰의 제지로 교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도서관 농성으로 이어졌다. 학교당국은 학생들에게 농성을 풀고 귀가할 것을 종용했으나 학생들은 농성을 강행하다가 21일 오후 7시경 해산하였다. 학내에서의 집회와 시위는 25일 법대와 문리대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열고 노동 실태조사단의 구성을 결의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러 대학과 교회 등 종교 단체에서 노동문제와 사회정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것을 결의하는 집회, 시위 등이 잇따랐다.
공동결의문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회장 각 청년 학생종교 단체대표, 1970.11.20. 임선웅 전 직원 기증
법대 쪽에서 기초한 공동결의문은 전태일을 죽음으로 내몬 책임을 져야할 5대 살인자로 기업주, 정부,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지식인, 사회인들을 들어 고발한 것이었다.
“오늘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대표, 각 청년 학생 종교단체 대표는 모든 근로자의 스승이며 모든 청년의 스승이며 또한 모든 종교인의 스승인 고 전태일 선생의 죽음 앞에서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① 우리는 장기적으로 근로자, 농민 등 모든 빈민의 생활실태를 조사하고 숨겨지고 있는 참상을 전 사회에 고발하며 그들의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을 격려 지원한다. 또한 이를 위하여 민권수호학생연맹을 서서히 결성해 나아간다.
② 당면한 과제로서 우리는 평화시장 지역과 타지역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에 관하여 연합조사단을 구성하고 그 일차적 조사결과의 보고와 아울러 각 대학은 내주 금요일 11시를 기하여 일제히 추도집회를, 각 종교단체는 내주 일요일을 기하여 일제히 추도예배, 추도미사를 갖는다.
③ 우리는 전태일 선생의 죽음을 암장하려는 철면피한 권력자들에게 항의한다. 저들은 이 죽음 앞에 참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가족과 친지를 협박하여 관장(官裝) 장례식을 치렀고 전 선생의 시신에 조의를 표하러간 학생들을 체포하였고 온갖 불법한 수법으로 그를 추도하는 집회를 방해하여 왔다. 또한 우리는 모든 사회인들이 차제에 깊은 반성 있기를 호소한다. 특히 우리는 이 나라의 모든 문인 예술가들에게 이 의로운 죽음 앞에 그들의 작품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성명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1970.11.26. 임선웅 전 직원 기증
문리과대학 학생회가 전태일의 죽음에 관하여 발표한 성명서로, 추도식에 참석하고자 했던 대학생들을 막아선 경찰과 학교 당국의 “근시안적이고도 신경질적인 처사를 비난”하면서 노동실태조사단을 구성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이에 앞서 25일 문리과대학 학생회 대의원회가 발표한 「결의문」에서는 “학생총회의 일원으로 민권수호를 위한 회의의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구성”, “‘바보회’ 회원들에 대한 해고의 철회”, “‘노동실태조사단’ 구성”, “학교 당국에 대한 항의”를 주장하며 결의가 관철될 때까지 성실한 실천과 투쟁에 임할 것임을 공표하였다.
“평화시장 종업원 고 전태일 씨의 죽음은 단순한 인간적 동정을 넘어선 너무나도 많은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을 우리 젊은 지성인들에게 안겨주고 있다. … 지난 11월 20일 우리 문리대인들은 이렇듯 무리하게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옹호를 외치면서 죽어간 고 전태일 씨의 추모식에 참석하고자 법과대학을 향해 교문을 나섰다. 이는 단순히 고인에 대한 추도의 뜻을 넘어선 우리 젊은 대학인들의 가슴마다에 오늘의 현실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뜻깊은 자리이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이러한 순수한 뜻은 경찰의 무력제지와 주동학생 연행으로 말미암아 좌절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경찰의 난동과 뒤이은 학교당국의 휴강조치는 순수하고 학구적이었던 우리의 자세를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무사안일주의의 졸렬한 처사였음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이제 본 문리대 학생회에서는 이번 전태일 씨의 죽음을 계기로, 누적되어온 노동자들의 비인도적 착취현황을 실제로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노동실태조사단을 구성하기로 결의한다.”
결의문과 성명서에서 학생들이 노동자 전태일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했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학생들이 그의 죽음을 접하고 느끼게 된 주된 정서는 ‘부끄러움’, ‘부채감’, ‘죄의식’이었다. 전태일의 삶을 요약하고, 노동현실을 떠올리고, 고난의 나날 속에서도 근로기준법을 연구하며 농성을 준비했던 그의 행적을 읊으며 그간의 민족·민주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학생운동을 되돌아보게 된다. 각 대학 학생회 일동이 작성한 아래의 추도사에서 당시 학생들의 심경이 어떠하였는지 잘 살펴볼 수 있다.
“학생들이여! 우리는 항상 민족이익을 신장하고, 민주주의를 창달하는 첨병으로 자부하여 왔고, 또 이것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있어 왔다. 우리는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을 하여 왔다. 그러나 전태일 선생의 죽음은 우리에게 숙연한 반성의 눈물을 삼키게 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왜 대학생 친구 하나 없는가! 이럴 때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힘이 될까! 이렇게 한탄하며 근로기준법을 연구하던 전태일 선생. 아아! 부끄럽고 수치스럽구나! 이 영웅적인 투사의 죽음을 방관한 우리는 죽고 싶구나. 우리는 선생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서울시내 각 대학 학생회 일동, 「전태일 열사의 유지를 받들며」, 1970.11.20.)
척박한 노동현실과 싸워온 전태일은 처절하게 고투하고 끝내는 목숨을 버리면서 불의와 착취로 가득한 사회현실을 고발하였고 노동자의 삶에 무관심했던 학생들과 노동자들 스스로에게 이 땅의 민주화와 인간해방의 실현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민족, 민주와 함께 ‘민중’이 학생 운동의 이념적 지향으로 자리 잡아 70년대의 민중적 제반운동의 길을 열게 된다.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의 준수가 투쟁의 주안점이 되었고 이후 종교계에 의해서 그 의미가 사회적으로 되새겨지면서 학생운동이 노동운동·빈민운동과 연대하게 되는, 이른바 노학연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많은 학생들이 야학이나 산업선교회 등을 통해 노동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고 노동현장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다.
고 전태일 형 14주기 추모예배 아! 전태일 – 어느 청년 크리스챤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서울대 총기독학생회, 1984.11.12. 홍순민 동문 기증
서울대학교 총기독학생회는 84년 11월 12일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전태일 분신 14주기를 기념하여 추모예배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는 묵도와 찬송의 시간을 가지고 ‘전태일 분신사건의 70년대 운동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70년대는 바로 이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크리스챤 노동자로서 처절한 밑바닥의 삶과 고통과 투쟁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경험한 그의 죽음은 침체된 노동운동에 있어서 과감한 노조투쟁의 전선으로 많은 노동자로 하여금 동참하게 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 이상과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학생운동의 민중운동과의 구체적 연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하였다. 또한 그의 죽음은 우리 역사의 고난과 사회의 모순에 둔감하였던 한국 기독교로 하여금 그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깨닫게 하여 민중적 신앙혁명운동의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현실 고난에 대해 회개하여 참여하게 한 십자가이었다.”
한편 전태일이 남긴 일기, 편지, 메모, 사업계획서, 소설 초고를 바탕으로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을 기억하는 이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그리고 당시 시대상황을 논증하며 지식인의 관점이 아니라 노동자의 관점에서 전태일을 재현함으로써 그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통해 한국사회를 성찰했다. 이렇게 전태일의 일생은 기록으로 남아 역사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50년 전 스스로 자신의 삶을 거두어갔던 전태일을 기억하고 지금도 추모한다.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전태일의 죽음에 대한 응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태일의 삶이 1970년대의 학생들, 그리고 이후 세대에 걸쳐 현재까지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전태일 평전』이다. 한 때 당국에 의해 불온서적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대학생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교양서이기도 했다. 이 평전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접하고 교회 등 사회단체와의 접촉을 넓히며 각계의 공동투쟁을 이끌어내었던 조영래 변호사가 집필하였다. 전태일 분신 당시 법대 학생장을 주도하고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던 그는 이듬해 3월 사법시험에 합격하지만 사법연수원 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1년 6개월의 형을 마치고 나온 그는 장기표로부터 이소선 여사가 전달한 전태일 열사의 기록을 건네받았고, 1974년 소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도피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원고를 작성하였다. 원고는 1976년 무렵 완성되었지만 엄혹한 군부독재로 인해 먼저 일본에서 번역되어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1978)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한글판은 1983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라는 제목으로 돌베개에서 출간되었으나 저자를 밝힐 수 없었고,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조치를 당했다. 1991년에 출간된 개정판에서 비로소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게 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정의의 함성 1964~1979』, 블루프린트, 2008.
오제연, 「1970~8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개와 양상」, 서울대학교 기록관 편, 『도약의 나래를 펴라』, 서울대학교 기록관, 2017.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조영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09.
한인섭 외, 「청리 최종고 교수 정년기념대담」, 『서울대학교 법학』 54(1),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 2013.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