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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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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시련과 형설지공 –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하여(2)

2020.11.16

1946년 10월 창설 이후 서울대학교는 대학 체제가 채 기반을 잡기도 전에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위기에 처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였고 한강의 다리가 끊기면서 많은 수의 교수와 학생들이 서울에서 발이 묶였다. 학교 건물 일부가 불에 탔고, 귀중한 각종 기자재와 장서들이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갔다. 학생들은 북한의 의용군으로 끌려가거나 국군학도병으로 참전했으며 서울대학교 총장·치과대학장·문리대학장을 비롯하여 다수의 중견학자가 납북되는 비극을 겪었다.

북한군의 공세에 밀린 정부는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전하였고 인천상륙작전 직후 수도 서울 탈환에 성공하여 다시 돌아오게 된다. 이에 따라 서울 시내의 초·중등학교는 10월 16일 개학을 하고, 대학은 11월 중순부터 연합해서 강의를 시작했다. 전쟁 과정에서 중단된 대학 운영은 9·28 서울수복 후 잠시 회복되는 듯 보였는데, 전시 상황에서 의약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사립인 서울약학대학이 9월 30일 국립서울대학교로 편입되었으며, 1950년 11월 전시연합대학 설립이 결정되었다. 한국전쟁 직전 서울시내에 있었던 31개의 공사립대학을 망라하여 법정, 경상, 이학, 공학, 농학, 문학 등의 7개학부와 가정학과, 신학과를 포함한 단일연합대학을 설립한 것이다. 그 운영은 각 대학과 중앙교육위원회의 대표 및 문교부 장·차관 등으로 구성된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담당하였다. 전쟁 중에도 교육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학생 징집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하여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남쪽으로 밀림에 따라, 정부와 서울대학교는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떠나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당시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임시책임자였던 한구동 교수는 수복 이후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9·28수복이 되자 내가 이 학교의 임시 관리책임자로 임명된 후 당시 문교부의 김두헌 고등교육국장과 협의해서 서울대학교에 편입시키고 내가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개학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한 순간에 또 다시 1951년 1월 4일의 후퇴의 비운에 부닥치고 말았으니 여기 3년간의 부산 피난 생활이 시작된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일이다. 나는 책임자에 임명되자마자 피난 준비에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중요한 서류(학적부, 비품대장 등)는 물론 그 당시에는 비교적 귀중하게 생각되었던 기계기구류(천칭, 현미경 등)와 당장 필요한 문헌서적, 식물표본 등을 정돈해서 트럭에 싣고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먼저 보냈다. 나는 나머지 서적을 며칠이 걸려 모두 도서실 천장 속에 감추고 12월 14~15일 경 책임자는 최후까지 서울에 남으라는 정부 명령에 따라 단신 서울에 잔류해 있다가 12월 하순에 공무원 최종 피난 반에 끼여 인천항에서 LST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갔다.”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녹암 한구동 : 한국 약학의 아버지』, 2016.)

부산 피난 시절 도서관

부산 피난 시절 도서관
전쟁 발발 직후 도서관과 규장각의 수많은 장서들에는 어떠한 보호 조치도 취해지지 못했고 1950년 9월 서울 수복 이후에야 비로소 소개(疏開)될 수 있었다. 1950년 12월 10일 이병도 도서관장의 지시로 『승정원일기』 3,045책이 부산으로 이송되었으며, 이후 김두종 서울대 부속병원장과 도서관 사서 호기현의 주도 아래 많은 직원들이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 등의 귀중한 자료들을 부산으로 옮겼다. 사진은 전쟁 당시 부산에서 임시로 개관한 도서관 전경이다. 임시도서관은 부산시 동대신동 구덕수원지 뒤편 문리과대학 가교사 옆에 학생열람실, 사무실, 숙직실 등을 갖춘 약 80여 평의 목조 가건물로 신축하였다. 전쟁과정에서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장서 1만여 권이 산실되었다.

1951년 봄부터 전쟁은 38도선 중심의 국지전으로 접어들어 장기화될 조짐을 보였다. 이에 문교부는 1951년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로 전시연합대학의 운영 등에 관한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을 공포하였다. ‘특별조치령’에는 “전화(戰禍)로 인하여 정상수업을 실시할 수 없는 대학의 학생은 그 기간 동안 타 대학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다.”라는 규정과 “정상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있는 대학은 그 학교 소재지에 소개한 타 대학의 학생이 취학을 지망하는 경우 사정이 허하는 한 이를 허락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역별로 교수와 학생을 불문하고 각기 피난지에서 연합대학을 형성하고 교육받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국학대학교, 한국대학, 국민대학, 신흥대학(경희대학교), 단국대학, 세브란스의과대학, 숙명여자대학교, 서울여자의과대학 등 10개교가 참여한 가운데 전국 4개 지역(부산, 광주, 대전, 전주)에 전시연합대학이 설치되어 1년 동안 합동수업을 진행하였고, 이후 청주와 대구에도 추가로 설치되었다. 전시대학을 운영하기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은 최규남 문교부 차관 겸 서울대학교 총장이, 부위원장에는 강세형 국학대학장이 선임되었으며 운영경비는 국립서울대학교 및 국립부산대학교의 예산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전시연합대학에서는 단과대학을 문학부, 이학부, 의약학부, 농수산학부, 법정경상학부, 수의학부, 예술학부, 체육과, 가정과로 재편하였고 교육과정은 정상운영이 어려운 상태였으므로 약식으로 조정하여 주로 교양과목들로 운영하였으며 군사훈련의 배점이 높았다. 1951년 전시연합대학생 등록 수는 총 6,455명으로 부산 4,268명, 대전 377명, 전북 1,283명, 광주 527명이었고, 교수 수는 444명이었다. 전시 중에도 피난지에서 학생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대학 운영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전시연합대학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연합체제 아래 근 1년간 강의를 진행하던 서울대학교는 1952년 5월 31일, 정부에 의해 전시연합대학체제가 해체됨에 따라 각 지방에 있는 서울대생 모두가 부산 본교로 복교할 것을 알렸다.

전시연대에 종지부, 원 대학으로 환속

전시연대에 종지부, 원 대학으로 환속
대학신문, 1952.3.31.

“전시연합대학이 없어진다.(…) 부산 환도 후에 어언간 1년 유여에 인제는 비록 아직도 전시하일지언정 시국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혔고 각 대학이 독자적으로 수업태세를 갖추게 되어 전시연합대학이라는 비상조치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문교당국에서는 관계 각 방면과 진중히 협의하여 오던바 마침내 오는 5월 31일자로 전시연합대학을 없애게 되어 이에 따라 각 대학은 각기 자기 특장과 개성을 발휘하며 단독수업을 하게 되는 동시에 연합대학에서 수업을 하던 학도들은 배속되는 대학의 시설과 연합대학에서 얻은 학점 등을 충분히 참작하여 추호라도 무리가 없도록 평시체제로 전환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대전만은 그 지방에 대학이 없으므로 전시 연합대학의 체제를 당분간 부득이 존속하는 수밖에 없으나 이것도 조속한 기일 내에 원만히 평시체제로 전환시키기에 진력을 하고 있다.”

전시연합대학이 폐지됨에 따라 각 지방에서 수강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모두 부산 본교로 복귀하여 수업을 받게 되었다. 서울대학교가 독자적인 수업을 실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교사(校舍)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서울대학교는 1·4 후퇴 직후 노천에서 수업을 실시하다가, 1951년 4월 학부형이 자재를 부담하고 교수와 학생이 공동으로 작업하여 가교사를 건축하는 계획을 세워 10월부터 피난지 부산에서 가교사를 짓기 시작했다. 공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등 5개 단과대학의 가교사는 서대신동에 자리 잡았다.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광복동에, 치과대학은 대청동에서 교육과 진료를 실시했다. 약학대학은 봉래동과 남항동 일대에 가교사를 세웠으며 사무소, 도서실, 실험실 등은 대청동에 설치했다. 농과대학은 피난 시절 국립중앙가축위생연구소로 옮겨 완비된 실험시설을 전부 제공받을 수 있었다. 예술대학(음악부, 미술부)은 송도의 안남동에 가교사를 신축하였다. 이렇게 전쟁기간 피난지의 임시 캠퍼스를 단과대학마다 별도로 마련할 정도로 각 단과대학의 독자성은 여전히 강했다. 1953년 9월 서울 캠퍼스로 복귀할 때까지 임시수도 부산에서 수업을 실시하였다. 서울대학교 학생처에서 발행한 『재부 기념사진첩』에는 천막과 창고를 가교사로 삼아 강의를 이어가는 교수들과 배움의 열기를 품은 학생들의 모습들이 남아있다.

공과대학
공과대학
문리과대학
문리과대학
법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상과대학
농과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의과대학
치과대학
치과대학
약학대학
약학대학
예술대학 음악부
예술대학 음악부
예술대학 미술부
예술대학 미술부
농과대학 수의학부
농과대학 수의학부

부산 송도의 암남동 예술대학 가교사에서 수학했던 한 졸업생(제4회 졸업)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부산 암남동의 가교사 터는 일제 때 동양에서 제일가는 호텔을 지으려고 터를 닦아 놓은 곳이었으므로 그 주변 환경이 다른 대학들에 비교하면 매우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악기가 전쟁 통에 거의 소실되었고 연습실도 부족하였기에 공부하기가 결코 쉽지는 않았다. 학생들은 새로 장만한 몇 대 안되는 피아노를 가지고 연습을 하여야 했기에, 피아노 앞에서 연습하기 위해서는 밤과 낮을 가릴 수가 없었다. 따라서 한 밤중에 발성연습을 하여 인근 주민들의 수면을 방해하기도 하였고 이른 새벽에 난방장치가 없는 혹한의 교실에서 얼음장 같은 건반을 두드리기 일쑤였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50년사』, 1996)

학생 합창
학생 합창
회화 실기
회화 실기
임상 강의
임상 강의
화학 실험
화학 실험

부산의 임시 교사에서 서울대학교는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대학의 구성원인 교수와 학생의 이산(離散), 교사 및 제반 교육·실험시설의 부족, 재정의 궁핍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상실해버린 전란 중에도 학생들의 향학열은 꺾이지 않았고 서울대학교는 대학 운영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등 꾸준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52년에는 「대학신문」이 창간되고 한국 최초의 박사 학위가 수여되어 학문적 권위도 높여나갔다. 또한 1953년 4월 20일 ‘국립학교설치령’이 제정되면서 교육기구 편제에도 변화가 있었다. 예술대학의 음악부와 미술부가 각각 음악대학과 미술대학으로 분리·승격되었으며, 농과대학의 수의학부도 수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서울대학교는 전쟁 중에 편입된 약학대학까지 포함하여 창설 7년 만에 12개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가진 종합대학교로 발전하였다. 대학구조의 개편으로 서울대학교의 교육과 연구는 보다 세분화·전문화의 길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제6회 졸업식 및 박사학위 수여식 기념, 신광순 명예교수 기증, 1952

제6회 졸업식 및 박사학위 수여식 기념
신광순 명예교수 기증, 1952

1952년 4월 26일 부산에서 열린 제6회 서울대학교 졸업식에는 대통령이 기념축사를 하고, 국회의장, 주한미국대사, 외무부장관 등이 참석하였다. 1952년 4월 28일자 「대학신문」에서는 “이날 서울대학교 제6회 졸업식에서 한국최초의 박사학위가 김동일 씨 외 5씨에게 수여되고 한기산 씨 외 13씨에게 석사학위가 수여”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병도 박사, 네 번째가 김상기 문리대학장, 중앙이 최규남 총장, 여섯 번째는 윤일선 대학원장이고, 가운데 줄 왼쪽 첫 번째부터 김성찬 사무국장, 한구동 약학대학장, 김기석 사범대학장, 현제명 음악대학장, 여섯 번째부터 이제구 의과대학장, 조백현 농과대학장, 오순섭 수의과대학장이며, 뒷줄 왼쪽 첫 번째가 이상훈 상과대학장, 세 번째가 장발 미술대학장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정부는 서울로 환도하여 9월 29일 정부 환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서울대학교는 본부와 문리과대학이 서울 캠퍼스로 복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각 단과대학들은 마침내 수도로 귀환하게 된다. 8월 2일에는 미8군사령부가 1951년 5월 이후 사용해 오던 동숭동 캠퍼스를 반환하고 용산으로 이전하였다. 9월 15일, 전쟁 중 미군에 의해 징발된 서울대학교 부속 건물들을 학교 측이 돌려받는 환수식이 거행되어 서울대학교는 28개월 만에 다시 옛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환도 후 서울대학교 반환식, 1953. 9. 15.
환도 후 서울대학교 반환식, 1953. 9. 15.
1953년 9월 15일 거행된 환수식에서 최규남 총장이 미군 측의 테일러 장군에게 교사 완전 반환의 의미로 열쇠 한 개를 건네받았다.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서울대학교는 큰 상처를 입었다. 건물과 교육·실험 시설들이 소실되었고 기구들이 파손되어 458동(62,527평)의 서울대학교 건물 가운데 276동(24,313평)이 수리 또는 재건이 필요한 상태였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크고 깊었기 때문에 이 시기 재건은 대학 재건의 차원이 아닌 국가 재건의 차원에서 행해졌으며, 외국기관의 원조도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복구사업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고, 서울대학교는 전쟁의 아픔을 딛고 점차 종합대학교로서 안정된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4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40년사』, 198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개교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사진집 서울대학교 40년』, 1986.
서울대학교 기록관, 『고등교육의 새 요람 서울대학교 1945-1953』, 2015.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녹암 한구동 : 한국 약학의 아버지』, 2016.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50년사』, 1996.
박선영·김회용, 「한국전쟁기 대학상황의 이해」, 『한국학논집』 37,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8.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사료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민족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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