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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강단으로 끌어들인 열혈교수

2008.11.04.

국악과 정대석 교수와 학생들거문고의 대가, 쉰여섯의 나이에 서울대 교수가 되다
국악과 정대석 교수

“이제까지 서울대에는 거문고 전공 교수가 없었습니다. 거문고 전공 교수가 채용된 것은 거문고 발전을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라 생각합니다. 거문고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도 매우 큰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KBS 국악관현악단 악장 등으로 활동하며 거문고의 1인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대석 교수가 2007년 서울대에 임용될 당시 비 음악대학 출신 음대 교수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정년이 9년 밖에 남지 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지만, 그는 교수로 재직하는 기간 동안 거문고를 대중화하고 전승, 발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정교수는 거문고가 어려운 악기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교양강좌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 망가져 버려진 거문고들을 수거해 말끔히 고치고 깨끗이 손질해 거문고가 없는 비전공자 학생들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준비해놓은 거문고가 벌써 연구실의 한 벽면에 가득하다.

거문고를 가르치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사카타 사요라는 일본인 학생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그가, 예전에 정교수에게 거문고를 배우면서 가곡3(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예능보유자이신 영송당 조순자 선생님께 노래를 같이 배워 외국인 경연대회에 나가 입상한 적이 있다며, 일본인이 우리문화를 잘 배워나가는 것이 참 놀랍고 흐뭇했다고 한다.

그가 학생들에게 바라는 소망도 국악의 성향을 닮았다. “서울대 학생들은 책임감은 강하지만 개인적인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음악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합주 음악이고, 음악도 전공악기가 있지만 노래부터 춤에 이르기까지 가무악을 함께 습득하는 방법으로 공부했습니다. 좀 더 다양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더욱 살려나갔으면 합니다.”

전기공학부 서종모 교수안과 전문의, 시각장애극복 연구에 앞장서는 공대 교수로 새 출발
전기공학부 서종모 교수

“창의적인 것을 우선 생각할 경우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는 의과의 특성상 수업은 암기 위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학생들이 하나하나에 즉각 반응해 오는 공대 수업은 때로는 질문이 두렵기도 하고 수업 부담도 커졌지만 더 즐겁습니다.”

서종모 교수는 수업 중 학생들과의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이 공대에서의 생활이 주는 큰 기쁨이라고 한다. 새로운 강의를 맡은 데다 한 학기 내내 강의하는 게 처음이라 강의 준비에 밤새기 일쑤지만, 진료할 때와 달리 수업을 마치면 오히려 힘을 얻는 기분이다.

서울대학교병원과 동국대 일산병원에서 안과 전문의로 환자를 진료했던 서교수는 올해 초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로 부임하여 연구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의 주된 연구는 정부 연구과제 지원을 받는 인공 망막 개발로, 여러 선진국들이 앞을 다투어 연구하고 있는 분야이다.

병원에서 공대로 소속을 옮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서교수는 “공학 기술의 발전이 없다면 의학 기술의 발전도 어렵다”면서 환자 진료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병원에서보다 많은 시간을 연구에 투자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한다. 그에게 공대에서 인공 시각을 연구하는 것은 시각장애인(환자)들의 고통을 치유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한 까닭이다.

2000년도부터 공대 교수, 대학원생들과 함께 공동연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서교수에게 301동은 이미 친숙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의 연구실은 301동에서 이색공간이 아닐 수 없다. 은은한 조명에 음악 CD가 가득한 책장과 볼체어까지. 그는 학생들이 스스럼없이 찾아올 수 있도록 연구실을 아늑하게 꾸몄다. 이렇게 열린 공간에서 의공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향한 그의 열의가 동료교수와 제자들과 함께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법학부 권영준 교수학교로 돌아와 더욱 행복한 모범생
법학부 권영준 교수

“기회가 왔고, 그것을 잡았을 뿐입니다. 고민은 물론 많이 했어요. 어떤 일이 더 행복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결론은 학교였지요.”

1999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서울지방법원 동부지원, 대구지방법원, 하버드 로스쿨 유학 등을 거친 그가 2006년 8월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판사를 마지막으로 법원을 떠나 강단에 섰을 때 많은 이들은 의아해했다. 이미 충분히 화려한 이력의 ‘레전드’급 젊은 판사가 굳이 ‘교수’를 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권교수는 판사직을 수행하는 7년 반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한 시기였다면, 강단에 선 지난 2년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행복함으로 가득한 시간이었다고 평했다. 피고와 원고, 혹은 피고인과 검사 사이에서 제한적 주도성만을 갖고 간접적인 도움밖에 줄 수 없는 법정에 비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논문을 쓰는 강의실과 연구실이 권교수의 성격에는 더 맞았다고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과 매 순간 맞닥뜨리는 스트레스는 경험해 보지 않으면 상상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권영준 교수는 법의 실무, 경험, 이론이 지니는 논리적 연계와 현실적 괴리를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극복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법조인의 임무란 사회적으로 공유된 가치를 타당한 절차를 통해 정립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법과 사회의 유리를 최소화 하는 것은 법조인들의 역량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법조인들의 판단 하나 하나가 얼마나 일반인의 법 감정과 조화를 이루냐에 따라서 법적 안정성과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모범생’이라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표현해도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다는 권교수는 90년대 초반에 비해 학생들이 훨씬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자유롭고 유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자하연 벤치에 앉아 있다가 민망한 광경에 자리를 피한 적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또 학창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은사님들, 그리고 함께 공부했던 동기들을 교수 신분으로 학교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도 기쁜 일 중 하나라고 전했다.

2008. 11. 3
서울대학교 홍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