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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외국인교수 인터뷰[3] 한국을 연구하러 왔습니다

2008.11.03.

서울대에 지원하는 외국인 교수들은 '한국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려는 사람과, '한국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세번째 신임 외국인 교수 인터뷰에서는 한국을 새로운 연구주제로 정하고 서울대에 왔다는 사회학자 안토니 우디위스 교수와 한국 경제를 연구해 또 다른 외국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알마스 헤시마티 교수를 소개한다.

"외국인 학생들이 저를 통해 한국경제를 배웁니다"
산업공학과 기술경영 연합전공 알마스 헤시마티 교수

Almas Heshmati 교수 공대 산업공학과 기술경영협동과정 2004~206 초빙교수, 2008년 9월 임용한국을 연구하는 경제학자인 알마스 헤시마티 교수는 최근 경제의 위기에 대해 ‘매우 어려운 상황이지만, 한국의 힘을 믿고 싶다’고 답변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란의 쿠르드족 자치지구에서 50여 년간 독립운동만 반복되는 동안 한국은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98년의 경제 위기는 불과 1~2년 만에 극복했지요. 이 나라는 유래 없는 일을 반복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

그가 교수로 있는 기술경영(Management of Technology) 대학원과정은 재학생 140명 중 30명이 외국의 공무원들이다. 동남아시아, 동유럽, 남미 등지의 공무원들이 “한국의 기술발전과 경제성장의 비결을 배워오라”는 임무를 띠고 국비 장학생으로 서울대에 와 있는 것이다. 쿠르드계 스웨덴인으로 응용 경제학을 전공한 헤시마티 교수는 이들에게 영어로 한국경제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 정부가 40 여 년간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끈 비결을 배워서 제 나라에서 써 먹을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겁니다. ”

헤시마티 교수는 단순히 ‘5개년 계획’들을 성공했기 때문에 외국에서 한국경제를 배우러 오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국가주도 경제로 반짝 일어난 나라들은 많지만, 한국 정부는 첨단기술 산업을 육성한다는 정책을 수십 년간 일관성 있게 펼쳤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른 리더십을 보였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의 기술력은 세계적인 수준이지요. 그래서 많은 후진국 학생들이 서울대 공대에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는 70년대에 반도체 산업을, 90년대에 통신산업을 선택해서 지원하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술 경영’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겁니다.”

‘노하우’은 말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수업의 절반은 이론 강의에 쓰고 나머지 절반은 컴퓨터 실에서 보낸다. 경제지표 데이터를 뽑아서 분석하는 방법을 직접 훈련시키는 것이다.
“나와 내 학생들은 영어도 한국어도 모국어가 아닙니다. 하지만 숫자를 제대로 읽을 줄 알면 세계 경제와 내수 경제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숫자만 보고 어떤 기업을 키워내고 어떤 산업을 육성할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도록 안목을 키우는 겁니다. “
그렇게 배운 학생들은 학위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가면 곧바로 경제관료로 현장에 투입된다.

헤시마티 교수는 초빙교수로 지내온 기간 동안 서울대 이름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쳐, 피어리뷰 사이트에서 한국경제분야 국내 발표 논문 수에서 두번째로 다운로드 수가 많은 교수로 랭킹에 올랐다. 대부분 한국의 주요 산업들을 외국과 비교한 논문들이고, 통일부의 의뢰로 통일의 경제적 효율에 대해 연구한 논문과, 석유에너지 고갈 이후의 한국 경제상황을 분석한 논문도 포함되어 있다.

한국 경제를 가르치고 연구해 온 4년 동안 실제로 한국 사람들의 사생활을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없었다는 그는 스웨덴에 두고 온 세 딸들과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에게 대부역할을 해주고 싶다며 그의 ‘연구대상국가’에 강한 애착을 표현했다.


한국 사회에 도전하는 글로벌 인권문제 전문가
사회학과 앤서니 우디위스 교수

Anthony Woodiwiss교수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2008년 9월 임용 전 런던시티대학 교수“I am where I should be.”
서울대에 어떻게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노(老) 석학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런던시티대학 학장으로 지냈던 8년 동안 저는 가르치고 연구하는 교수가 아니라 행정가였어요. 이제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 새로운 연구에 에너지를 쏟고 싶습니다.”

인권 전문가로 불리는 그의 ‘본연의 임무’는 전 세계인이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 각 사회에 맞는 법과 제도의 개발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가 대학생이었던 60년대는 인권문제라고 하면 서구식 사상을 전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의미하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미개한' 아시아 사회의 인권신장을 위해 서구사회가 노력해야 한다고 거리에 나서 시위를 했다.

그러나 우디위스 교수는 개별 사회의 특성을 무시하고 서구식 사고를 강요하는 것은 도그마가 된다고 생각한 소수 학생 중 하나였다. 그는 특정 사회를 오랫 동안 연구관찰한 후 그 사회에 맞는 인권 신장 방안을 모색하는 '떠돌이 사회학자'가 되었다.

영국 에섹스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잡은 후에도 일본, 대만, 홍콩 등 여러 나라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머물며 연구를 계속했다. 이 시절 연구논문을 모아 출간한 것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세계화와 인권, 노동법'이라는 유명한 책이다.

이 책의 '아시아 태평양'에 한국은 빠져있다. '까다로와서' 미뤄놓은 한국을 연구해 볼 기회가 오기 전에 사회대 학장으로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8년만에 학장직을 놓고 현장에 돌아온 우디위스 교수의 나이는 만 63세. 그는 고국에서의 조용한 은퇴 대신 관악산 자락에 홀로 머무는 삶을 선택했다.

“한국은 연고가 없어요. 학회 때문에 이틀간 서울에 왔었는데, 무척 추웠다는 기억밖에 없었어요.”
그는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한국이란 나라의 맨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서울대에서 가장 낡은 건물 중의 하나인 사회과학대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것 저것 읽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Oh, I am where I should be.”

2008. 10. 31
서울대학교 홍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