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안내

서울대 소식

뉴스

뉴스

교수칼럼

‘용서학’을 개설하자 - 박효종 교수

2008.04.07.

‘용서학’을 개설하자

박효종 교수사람이 살다보면 여기저기서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돌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벽에 부딪쳐 피가 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로 아픈 상처는 마음의 상처다. 마음의 상처는 주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온다. 다른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가까운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길에서 우연히 부딪친 사람이 내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주는 일은 비교적 드물다. 평소에 믿었던 사람, 우정을 나눴던 사람이 문제다. 평소에 그를 믿고 마음의 비밀을 털어놓았는데, 그 비밀이 뭇사람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그동안 은혜를 베풀었는데 앞에서는 고마워하는 기색을 짓다가 뒤에서는 욕을 해댄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언을 방불케하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그런 배신감을 어떻게 잊겠는가.

문제는 이런 마음의 상처는 마치 하늘에서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가리지 않으며, 직위가 높건 낮건 무차별적이다. 친구들과 어우러지는 학교생활이 비교적 무난한 생활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상처를 주고 받는 데는 결코 예외가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는 것은 분함과 원통함에 몸이 떨리기 때문이다. 복수심에 불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이때의 묘약이 있을까. 복수는 어떤가. 정작 복수는 자기 학대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솝우화에서 나오는 두루미와 여우의 ‘피보기 만찬’을 보라. 서로서로가 상처를 주기로 작정 하다보니 보복의 악순환은 그칠 줄 모른다. 혹시 용서는 어떨까. 용서는 왼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오른쪽 뺨을 대줄 만큼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손에 꼭 움켜쥐고 있던 잠자리를 다시 놓아주는 것과 같은, 훌훌 벗어던짐의 해법이다. 이것저것 다 따지고 손해 본 ‘내 몫’을 찾겠다는 정의감이 작용할수록 복수가 가능할지언정 용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용서는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이다. ‘내’가 분하고 억울한데 왜 용서를 해야 될까. 용서를 해보면, ‘내’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기적처럼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터이다.

용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학창시절에는 배울 것이 많다. 정직도 배우고 용기도 배우고 진솔함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용서함에 대해서는 별로 배우는 것 같지 않다. 용서를 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그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학교의 정규교육과정에서 배운 일은 없고 오로지 일주일에 한두 번 가는 ‘주일학교’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용서가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라면 ‘주일학교’에서 배울 것이 아니라 정규학문으로 개설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즘의 추세를 보면 지식기반사회라며 각종 신종 학문들이 뜨고 있다. ‘여성학’은 뜬 지 오래고 ‘성공학’이 있는가 하면 ‘실패학’도 있다. 또 ‘부자학’은 어떤가. ‘천천히’를 삶의 철학으로 삼자는 ‘느림의 학문’도 있고 죽음을 준비하자는 ‘죽음학’도 있다. 그렇다면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는 ‘용서학’이 왜 없어야 할까. 사실 우리는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의 노하우나 실천방법을 몰라 속수무책이기 일쑤다. 그 결과 우리의 상처는 더욱더 벌어진다.

이제 ‘용서학’을 개설하자는 운동을 대학에서 벌이면 어떨까? 그것이 개설되면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받는 마음의 상처와 고통, 응어리를 풀 수 있는 방법을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을 텐데…….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기고, 2008. 4, 5
http://www.sn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