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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연과학 연구 60년 회고] 자연과학대학의 탄생과 중흥의 씨를 뿌린 시기: 196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 - 권숙일

2008.04.03.

[한국의 자연과학 연구 60년 회고] 자연과학대학의 탄생과 중흥의 씨를 뿌린 시기: 1960년대 중반~1980년대 중반 - 권숙일

I. 문리대 이학부의 진통

6.25동란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부(지금의 자연과학대학 전신)의 실험실습 및 연구용 기자재는 잿더미가 되었거나 파손되어 학생들의 실험실습이 어려웠다. 또 학생들의 소요는 끊어지지 않아 수업다운 수업도 진행되기 어려웠던 시기다. 그러나 다행이도 60년대 중반부터 일부 기자재가 도입 또는 복구되어 차차 정상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과 (특히 물리학과) 실험실과 연구실은 동숭동 캠퍼스에 있지 못하고 청량리 옛 경성대학 예과 건물(현 청량리 미주 아파트 지역)에 있었다. 따라서 학부 학생들은 동숭동 캠퍼스에서 수강할 수 있었으나 일부 실험실습은 청량리에서 하였다. 대학원생들 역시 강의는 동숭동에서 받고 연구실험은 청량리에서 하는 구차한 환경에 있었다. 1967년에 동숭동 운동장 근처에 신축된 과학관(4층 벽돌 건물)이 준공되어 여기에 이학부 모든 학과가 한 건물에 모이게 되었다. 6.25동란 이후 처음으로 교수연구실, 실험실습실, 도서실, 학과 행정실 등을 위한 충분한 공간이 마련되었다. 또 이와 함께 대일 청구권 자금이 지원되어 새로운 실험기자재 및 일부 고가 일제 연구용 장비를 마련할 수 있어 모처럼 연구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0년대 초반에 외국으로 유학차 떠났던 사람들이 박사학위를 마치고 문리과대학 이학부 교수진으로 영입되어 침체되었던 연구 분위기는 차차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다. 한편 1967년에는 과학기술처가 출범하고 곧 이어 한국과학재단이 설립되면서 대학교수에게 연구비가 지원되었다. 물론 문교부로부터 대학교수에게 연구비가 지원되었으나 너무나 영세하여 연구에 실질적인 도움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과학재단에서는 엄격한 과제 심사를 거쳐 적정액(초기에는 영세하였으나) 연구비를 지원하였으므로 연구 활성화에 불씨를 안겼다. 그러던 중 71년에 한국과학원이 설립되어 최첨단 연구시설을 갖추고 대학원생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주어 국내 각 대학의 우수한 이공계 대학원생을 유치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서울대 이공계 대학원은 대학원생들의 기피로 고사 직전까지 이르게 되는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75년 자연과학대학의 새로운 출범이 계기가 되어 서울대도 한국과학원 대학원생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어 대학원 교육이 회생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II. 자연과학대학의 탄생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안에 따라

서울대학교는 8,15해방 이후 흩어져있던 여러 단과대학이 물리적으로 연합된 종합대학으로 출범하였기 때문에 캠퍼스는 8개로 분산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름만 서울대학교로 여러 단과대학들이 공용하고 있을 뿐 각 캠퍼스마다 독립된 운영체제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공과대학은 공릉동(현 서울산업대학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인문, 사회계 과목을 자체적으로 강사를 채용하여 강의하고 있었던 실정이다.(이 때 문리과대학에는 인문·사회계 전임교수가 상당수 있었으나 거리상 공대로 출강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여 각 단과대학은 각기 나름 데로의 학풍과 전통을 갖게 되고 자부심도 생겨 서울대 학생으로서의 일체감을 갖기 보다는 이질감을 갖는 병폐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단과대학의 독립된 운영은 종합대학으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어 교육의 비능률과 중복, 교육 전공의 비정상적 분포, 연구의 비효율 등 여러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따라서 서울대학교가 세계적인 우수대학으로 발 돋음 하기 위하여 캠퍼스를 통합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흩어져 있는 캠퍼스를 한 곳으로 통합시키려면 방대한 부지와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에 국립대학인 서울대로서는 정부와의 교섭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우선은 8개의 캠퍼스를 반듯이 한 곳으로 통합할 것인지 아니면 두 서너 캠퍼스로 줄여나가는 것이 좋은지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65년경에는 동숭동에 있는 본부를 중심으로 하는 메인 캠퍼스, 공대를 중심으로 하는 공학캠퍼스(공릉동), 농과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농학캠퍼스(수원), 그리고 사범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캠퍼스 (용두동)로 줄이기로 하고 정부 요로에 그 계획서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8개의 캠퍼스가 4개로 줄인다고 종합대학으로서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론이 분분하여 결국 단일 캠퍼스를 모색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검토된 부지는 공대 캠퍼스를 대대적으로 확장시켜 농과대학을 제외한 모든 단과대학이 공릉동으로 집결하는 것이 유력하게 추진되었다. 그러나 인근에 있던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에게 미칠 영향이 있다는 정부의 충고로 그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후 경기도 과천 비산리 등 여러 곳이 거론되었으나 서울대가 경기도로 이주한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있어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당시 관악 골프장(현 관악 캠퍼스)을 내려다보면서 이 정도 부지면 모든 단과대학을 수용할 수 있는 캠퍼스로 적당하다고 판단하고 서울대 총장과 협의하여 1970년 3월, 정부가 전격적으로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를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한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정부는 이 일대를 녹지대, 공원지구, 개발제한지구 등으로 묶어 교육상 유해한 업소의 접근을 막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서울대는 캠퍼스를 종합화하게 되었으므로 그에 따른 종합화 마스터플랜을 급히 만들어야 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름 하여 서울대학교 종합화 기획위원회 산하 교육연구 및 기구조직 분과위원회와 시설분과위원회가 70년 5월에 조직된 것이다. 그러나 이 때 관악산 기슭으로 서울대생을 내몰아 학생 소요를 막으려는 정부의 저의가 있다고 하여 학생 및 일부 교수들이 관악 캠퍼스 이전을 반대하는 소요가 있었다. 학생들은 서울 중심 동숭동에서 서울 최남단 관악산까지 통학거리가 문제되었고 교수들은 대부분 강북에 거주하고 있어 장거리 통근에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반포에 일정부분 교수 아파트를 싼 값에 분양하는 특혜와 통근버스를 마련해 주었고 학생들에게도 통학버스를 운영하는 계획까지 세워 불만을 해소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여하튼 캠퍼스 종합화에 따른 구체적 아카데미 플랜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서울대학교는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우수대학으로 웅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마스터플랜의 교육 및 연구 기획위원으로는 당시 구미 각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중견 교수들이 임명되었다. 위원장에는 교무부처장인 나웅배 교수(당시 상대 경영학 전공, 부총리 역임)가 맡았고 위원으로는 인문·사회 계열에서 이홍구 교수(당시 교양과정부 정치학 전공, 국무총리 역임), 자연과학 계열에서 권숙일 교수(당시 문리대 물리학 전공, 과기처장관 역임), 공학 계열에서 박원희 교수(당시 공대 화학공학 전공, KIST원장 역임), 교육계열에서 정원식 교수(당시 사대 교육한 전공, 국무총리 역임), 행정 계열에서 조석준 교수(당시 행정대학원 행정학 전공), 의학 계열에서 이광호 교수(당시 의대 해부학 전공, 의대학장 역임 후 작고) 등 각 분야를 안배한 7명으로 구성되었다. 그 당시 기획위원회 분과위원들의 열의와 사명감은 대단하여 각자가 맡은 강의 시간외에는 대학 본부 회의실에 모여 진지한 토론으로 늦은 밤까지 작업이 계속되었다. 종합대학으로서의 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발전의 비젼을 만드는 등 세계적인 우수대학으로의 웅비를 기획하는 일이었기에 위원들의 열기는 찌는 여름을 잊을 정도로 뜨거웠다. 특히 필자는 총장님의 권유로 세계 명문대학의 학제 및 학사 행정을 두루 살피기 위하여 구미 여러 나라의 명문대학을 방문하여 많은 참고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리하여 3개월 후에는 분과위원들의 중간보고서 초안이 만들어져 전체 기획위원회에 회부되어 심의를 거쳤다. 이들 기획위원들과 분과위원들은 거의 한달 동안 초안을 축조심의 하면서 다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차 보고서 초안이 완성되었다. 1차 보고서 초안은 어디까지나 기획위원회의 안이므로 각 단과대학을 순회하면서 각 대학 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예상외로 각 대학 교수들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이는 각 대학이 지녀온 전통과 관례를 새로운 틀 속으로 종합하려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연합대학을 단순히 물리적 종합이 아닌 진정한 종합대학으로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보수적 성향의 교수 사회에서는 지나친 이상주의라는 비난을 면키 어려웠던 것이다. 1971년 2월에 만들어진 연구 보고서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 된다 . “위대한 대학의 역사란 벽돌과 콘크리트로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꿈과 믿음으로 이 룩 되는 것이며 대학의 발전이란 어떠한 필연적 법칙에의 추종이 아니라 창조적 선택 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그 운명이 어떠한 타율적 요소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고 자 율적 결정에 의하여 개척 될 때 대학은 본연의 자세로 견지할 수 있다. (중략)..” 결국 종합화 계획안에 의하면 교육기구를 대폭적으로 바꾸고 (예를 들어 문리과대학을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자연과학대학으로 재구성 및 상과대학 폐지 등...) 교수의 전공에 따라 단과대학에 산재해 있던 교수를 같은 전공학과로 통합하며 신입생을 계열별로 모집하고 서울대학교를 문교부 소속에서 벗어나 국무총리 직속으로 하여 다른 국립대학과 달리 격상시킨다는 계획안이다.

이와 같은 희망찬 계획안은 학내외적으로 많은 저항과 비판을 받게 되어 상당부분을 수정 또는 보완하여 다소 현실화 시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울대학의 국무총리 직속은 국회의원들이 적극 반대하여 문교부 산하로 그대로 남게 되었다. 결국 지나친 이상형의 종합화계획안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소 발전된 계획안으로 1975년 3월 신학기를 기점으로 관악산 기슭의 새 캠퍼스로 옮겨 새로운 종합대학으로의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 서울대학교는 관악캠퍼스, 연건캠퍼스, 수원캠퍼스( 공대는 추후에 관악으로 합류)로 압축되었다. 이러한 종합화계획안으로 자연과학대학이 신생대학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또 각 대학에 흩어져 있던 같은 전공 계열 교수들이 같은 학과로 통합되었다.(물론 본인의 의사에 따라 현직에 있을 수도 있고 같은 전공학과로 옮길 수도 있었음.) 따라서 자연대의 모든 신생 학과는 여러 대학에서 같은 전공 교수들이 모여 영세성에서 벗어나 많은 수의 교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자연대 물리학과의 경우 문리대 물리학과에서 6명, 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에서 6명과 원자핵공학과에서 1명, 교양과정부에서 3명, 사범대 과학교육과에서 1명이 합류되어 총 17명이 모였으니 한 학과에 교수수로는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연대 다른 학과들도 모두 큰 학과로 새 출발을 하게 되고 공간도 충분하여 도약의 발판이 만들어졌다 할 수 있다.

III. 자연과학대 진흥을 위한 AID 차관사업

자연과학대학은 관악산 기슭의 새 캠퍼스에서 탄생되어 새로 지은 여러 개 동(棟)의 건물에 분산되어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연구시설은 종합화 이전에 쓰던 낡은 기자재여서 내실 있는 대학원 교육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행히 신생된 자연과학대학 대학원 교육 활성화을 위하여 1975년 9월 한국과 미국 정부는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차관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사업”을 1976년부터 1980년 9월까지 약 4년여에 걸쳐 추진하기로 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차관사업은 미국의 국제개발원(USAID)이 제공한 500만불 차관자금과 한국정부가 내자로 약 200만불에 해당하는 대충자금으로 추진된 것이다.

AID사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수의 연구능력 제고를 위한 미국대학 및 연구기관 파견 연수 2) 미국인 저명학자의 초빙을 통한 협동연구 및 대학원 교육 강화 3) 실험기자재 및 도서의 구입지원 4) 단기간의 학회 참석 및 연구협의 지원 등 네 가지 항목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항목이 자연대 교수의 미국 연수를 통한 교수진의 능력향상과 연구 분위기 쇄신이라 할 수 있다. 또 미국에서 저명학자를 초빙하여 자연대 대학원 강의의 질적 향상과 공동연구 활성화를 꾀할 수 있게 되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어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교수 연수를 위하여 자연대 모든 교수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6개월에서 1년 사이 미국에 있는 대학 또는 연구소에서 자기의 연구계획을 수행할 수 있는 곳으로 파견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교수는 각자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여 분야별 분과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승인은 받게 되었으나 어디까지나 교수 자신의 뜻이 중요한 결정요인이었다. 연구코자하는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선택은 각자의 몫이고 또 그 기관의 수락서가 계획안에 첨부되어야 했다. 이와 같이 하여 자연대 모든 교수는 4년여에 걸쳐 미국에서 연수를 받게 되어 능력향상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교수의 연수 효과는 AID사업 후에 발표된 교수들의 논문이 국제적 저명학술지에 계속 게재됨으로써 밝혀졌다. 또 교수의 업적의 향상은 대학원 교육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고 연구 분위기 활성화에도 불을 댕겼다 할 수 있다.

다음은 미국서 초빙된 50여명의 저명학자들의 열의도 대단하였다. 이들은 사업기간동안 대학원 강의 내용을 Lecture Note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이 노트는 국내 다른 대학 자연계 대학원 학생들에게도 일부 배포되어 한국 대학원 교육의 질적 향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자연대에서 모처럼 AID자금으로 국제회의를 주관하여 자연대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효과도 보았다. 1978년 9월에 열린 “이휘소 박사 추념 국제 소립자 심포지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심포지움에는 외국에서 저명학자 40여명이 참가하였고 그 중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학자도 두 사람 (Salam 교수와 Lederman 교수) 있었다. 이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논문은 700페이지가 되는 “Proceedings of Seoul Symposium on Elementary Particle Physics"라는 책자로 발간되어 20여 개국 대학 도서관과 연구소에 배포되어 자연대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1979년 여름에는 “수학 웍?脾굼? AID자금으로 자연대가 주관하여 열려 국내 모든 대학 수학자들이 한자리 모여 연수 및 공동연구의 분위기를 조성한 행사도 국내 대학의 대학원 교육 강화에 기여한바 있다.

다음으로 AID사업으로 실험실습 기자재와 도서를 구입할 수 있는 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각 학과에서는 연구 활성화에 필요한 기자재와 도서를 구입하여 연구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필요한 도서는 AID조정관에 연락하면 즉시 구입하도록 제도화 되어있어 능률적인 연수를 할 수 있었다. AID사업 중 중요한 목표의 하나는 사업 기간 내에 적어도 25명의 신임교수를 내자로 채용한다는 것이다. 이 때 신규교수로 채용된 교수진은 수학분야 6명, 물리·천문분야 12명, 화학분야 12명, 생물분야 3명, 지학분야 5명 등 38명이 신규로 채용되었다. AID사업이 시작되던 1976년 자연대 교수 수는 79명이었으나 1982년 4월에는 117명으로 확충되어 AID사업계획으로 신규 채용된 교수 수는 자연대 전체 교수 수의 1/3에 해당되는 괄목할만한 비약을 꾀하게 되었다.

대학원 교육 체제 면에서도 AID사업과 관련하여 변화가 생겼다. 문교부가 AID사업에 의한 자연과학대학의 연구능력 향상을 인정하여 대규모의 연구비 지원을 결정하고 이러한 연구비의 합리적 운영과 집행을 위하여 자연과학종합연구소를 법정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대학원 육성정책은 대학원 학생을 연구소 연구조원으로 인정하여 재정적 지원이 가능케 한 것이다. 따라서 대학원 학생이 연구조원의 신분으로 등록금과 일부 생활비를 지원받게 된 것은 대학의 오랜 숙원 사업을 성취한 것이다. 이것은 AID사업의 부산물로 대학원생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게 되는 제도의 효시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차관사업이 5년이라는 한시적 사업이고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못하여 좋은 출발은 하였으나 영속 시킬 수 있는 재원이 마련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하겠다. 다만 이와 같은 사업이 있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큰 소득이라 하겠다. AID사업으로 자연대가 세계 우수대학으로 발 돋음 하는데 크게 공헌한 것에 우리는 감사할 따름이다.

IV. 젊은 교수들의 개혁의지 발동 -교수 시국 선언 파동

대학교수 사회는 보수적이다. 통제 받는 제도로 불이익을 받아도 그 제도 개선을 위한 노력에는 유보적이다. 그러나 60년대 말에는 많은 젊은 교수들이 영입되면서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문제가 되었던 도화선은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할 때 부교수의 T·O (정부에서 대학에 할당한 정원의 수)가 있어야 승진할 수 있고 연구 경력이나 승진 요건을 갖추었어도 T·O가 생기지 않으면 몇 년이고 승진이 유보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적체된 조교수들이 이 제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정부에 이 제도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문교부의 제도는 지나치게 인위적이며 기득권을 보호하는 차원이었고 또 교수수가 많지 않을 때나 적용될 수 있는 제도를 사회 변화와 무관하게 유지하려는데 문제점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조교수는 7~8년씩 봉직하고도 부교수 T·O가 없어 승진을 못하고 있는 교수들, 또 아직은 승진할 때는 아니나 언젠가는 그러한 제도로 발이 묶이게 될 조교수들이 조교수회를 조직하여 정부에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자는 의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는 문리대만의 문제는 아니고 서울대 전체의 문제였으나 문리대의 경우가 다른 대학에 비하여 적체현상이 심각하였기 때문에 문리대의 조교수들이 조교수회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문리대 인문계를 대표하여 구기성 교수(독문학 전공, 현 독일대 교수), 사회계를 대표하여 노재봉 교수(정치외교학 전공), 자연계를 대표하여 권숙일 교수 (물리학 전공, 필자)가 모여 정부에 건의할 내용을 검토하고 어떤 형식으로 발표해야 하는지를 토의하였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이러한 건의문을 사회에 표출시켜 국립대학의 제도적 모순을 지적하고 정부의 합당한 제도 개선을 강력히 촉구하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우선 건의안 내용에 대하여 상당한 토의가 있었다. 우선 급한대로 교수 승진에 관한 건의와 대학교수의 처우개선(그 당시 서울대 교수 봉급으로는 생활하기가 몹시 어려운 형편이었음)을 명시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내용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대학교수의 모습으로 비추어 사회에서 호의적 반응을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대학교수의 처우문제는 제외하고 승진문제와 대학의 자율성을 강조하기로 하였다. 대학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조치로 승진 규제를 완화하는 선언문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물론 대학의 자율성을 내세우면 정치적 이슈로 반정부적 선언으로 간주되어 망설이기도 하였으나 대학교수들이 모처럼 대사회 선언을 하면서 차원 높은 선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 첫째로 대학의 자율성 보장이고, 둘째로 교수 승진제도의 개선이었다.

드디어 서울대 문리대 조교수회가 소집되어 조교수들이 교수 회의실에 모였다. 그리고 인문계 구기성 교수가 조교수들이 모인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에 대하여 조교수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 그 결과 모든 조교수들은 전폭적인 지지로 박수갈채를 보내어 만장일치로 선언문이 통과되었다. 이 사실이 일간지에 일제히 보도되자 사회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교수들이 오죽하면 대사회 시국선언을 하겠느냐하고 일면 동정을 하면서도 반정부적 정치 선언으로 비춰져 교수들에게 불이익이 닥치지 않을까 걱정도 하였다. 결국 이 선언문을 작성한 세 사람은 문교부로부터 출석 명령을 받아 문교부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또 정부는 시국 선언에 대한 배후 조사 및 정치적 목적 등을 조사하였으나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다만 인문계 및 사회계 교수들은 다소 고통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다행이 필자는 자연계 교수이고 정치성이 없다고 인정되어 가벼운 조사만 받았다. 그러나 대학의 자율화는 큰 명분이었고 당시 군사 정권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다. 다만 교수직급에 대한 T·O 문제는 없어지게 되어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선언문에서 제외한 대학교수의 처우 문제는 정부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년에 걸쳐 조금씩 인상되어 열악한 사정에서 헤어 날 수 있었다.

V. 한국과학원(KAIS)의 등장과 자연대의 위축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학자들이 60년대 후반에 늘고 있었으나 이공계를 전공한 많은 박사학위 소지자는 외국에서 좋은 시설과 대우로 귀국을 꺼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두뇌 유출이라는 어려운 문제점을 해결해야하는 급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60년대에 들어와 한국경제는 급속히 성장하여 새로운 기술개발이 시급하였으나 고급두뇌들이 귀국하지 않아 정부는 이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행히 한·미 양국정부의 합의로 산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정부출연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게 되어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발족하게 되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고급두뇌 유치를 위하여 당시 대학교수 봉급의 3배를 주고 주거용 아파트를 제공하는 파격적인 대우로 이공계 고급두뇌를 유치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지원으로 KIST는 성공적으로 출범 하였고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연구개발과 기술지원을 주 연구 업무로 순조로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고급두뇌의 근본적 유출을 막고 고급두뇌를 국내에서 양산할 수 있는 특수 교육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국과학원(현 한국과학기술원)의 설립이 설득력을 얻어 최상급의 연구시설을 갖추고 대학원만을 운영하는 교육기관이 과학기술부 산하로 1971년에 설립되었다. 이때는 대학원 교육만을 전담하기 때문에 국내 대학 학부를 마친 학생들을 유치하게 되었다. 한국과학원은 연구시설을 최상으로 구비하고 교수진은 국내 교수 봉급의 3배로 하여 돌아오지 않던 젊은 과학자들을 유치하여 국내 학생들의 외국 대학원 유학을 차단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대학교 이공계를 졸업한 학부생들은 상당수가 한국과학원으로 진학하게 되어 서울대 이공계 학과의 대학원은 고사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더욱이 한국과학원 학생들에게는 병역면제특혜까지 부여되어 서울대의 대학원에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학생만이 지원하게 되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한국과학원의 시설은 전부 과학기술부에서 지원되므로 최첨단 장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내 대학원생들이 굳이 외국 유학의 길을 택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서울대의 시설은 영세하고 낙후되어있어 한국과학원과의 경쟁은 생각조차하기 힘들 정도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과학원의 설립은 서울대 자연계 학과에는 크나큰 충격을 안겨 재활을 설계해야하는 절박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5년 서울대가 종합화 계획안에 의하여 관악으로 이전하면서 세계 우수대학으로 육성한다는 정부의 의지가 있었기에 서울대 이공계 교수들의 꾸준한 진정으로 대학원 문제가 하나 둘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서울대 대학원 학생에게도 병역특례가 허용되었는가 하면 해를 거듭하면서 대학원의 연구시설도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첨단화되었다. 교수 처우도 한국과학원 교수의 봉급 수준으로 서서히 상향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과학원의 설립은 초기에는 서울대뿐만 아니라 국내 많은 대학 대학원에 큰 충격을 안겨 어려움이 많았으나 결국에는 벤치마킹하는 목표물이 생겨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 과학계의 비약적인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어 한국과학원의 설립은 다행한 출범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항상 모범적인 선두주자가 보여야지만 그 기관 또는 부서를 벤치마킹하여 후발 기관이 추격하는 양상이 되어 새로운 기관의 설립에 많은 경우 투자의 중복을 이유로 반대하는 경향이 있으나 지나친 중복이 아니면 선의의 경쟁의 대상자로서 또 선두주자를 내세워 발전 방향을 가늠케 하여 일면 발전적 요소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VI. 맺는 글

60년대 중반 문리대 이학부 시절에는 영세한 교수진과 빈약한 시설로 연구 환경이 몹시 취약했으나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는 소장 학자들이 새로이 교수진에 합류하면서 대학원 교육도 정상화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학생들은 한ㆍ일 회담 및 한ㆍ일 협정조인 반대, 군사정권 반대, 3선 개헌 반대, 학생 교련 강화 반대, 유신체제 철폐운동 등 시국에 대한 계속된 소요로 강의다운 강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많은 기간 교문을 닫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가 국제적 우수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종합화계획안이 발의되었고 그에 따라 자연과학대학이 출범하면서 AID차관 사업과 맞물려 대학원 교육은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였다. 자연과학대학은 대폭적인 신임교수 채용과 시설의 첨단화로 80년대 중반에는 비로소 국제적인 연구 결과가 양산되어 이런 결과는 국제 저명학술지에 발표되면서 우수대학으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60년대 중반과 80년대 중반사이 자연과학대학은 교수들의 잠재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연구 분위기의 활성화시켜 머지않아 세계 수준의 대학으로 다가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시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