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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자연과학 연구 60년 회고] 혼란기, 시련 속의 자연과학 - 장세헌

2008.04.03.

[한국의 자연과학 연구 60년 회고] 혼란기, 시련 속의 자연과학 - 장세헌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곧이어 좌우 대립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는 바람에 이 땅의 자연과학 연구는 미처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숨을 죽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기틀을 닦는 선구적인 시도들도 있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하나하나가 처음 시작하는 것이고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혼란과 재건

글쓴이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화학과를 다니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전에는 다른 이공학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전시(戰時)연구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일본인 교수가 내려주었던 연구 주제는 내가 관심 있었던 표면화학 분야가 아니라"수소이온 농도가 과산화수소의 분해 속도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과산화수소는 로켓 연료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그 일본인 교수는 자기가 맡았던 군수 연구의 일부 과제를 내게 맡겼던 것 같다. 한편 함께 화학과에 다니던 오태호(유기화학 전공, 뒷날 월북)는 플라스틱 연구에 관련된 과제를 맡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방을 맞아 1946년 여름 경성대학 화학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화학과의 조교(助敎)로 임용되었다. 이름은 조교였지만, 당시 통용되던 일본식 학제에서는 어엿한 교수진의 일원이었다. 같은 해 경성대학은 서울대학교로 바뀌었고, 글쓴이는 세계적인 물리화학자 이태규 교수를 위시하여 김순경, 김용호, 최규원, 최상업, 오태호 등과 함께 서울대학교 화학과 학생들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일본의 구 제국대학이나 해방 후의 경성대학을 졸업하였는데, 당시 한국의 실정에 비추어 화학과 교수진의 전문성은 대단히 높았다. 당시 서울대학교의 학제에서 교수의 임용기준은 “박사학위 소지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계 권위자, 또는 전문학교 졸업 후 5년 이상 연구한 자로서 12년간의 경험연수를 가진 자”였으며, 준교수(뒤에 부교수)는 “석사학위 소지자, 1년간 대학원에서 연구한 자, 또는 전문학교 졸업 후 4년간 연구한 자로서 10년간의 경험 연수를 가진 자,” 조교수는 “석사학위 소지자 또는 전문학교 졸업 후 3년간 연구한 자로서 8년간의 경험 연수를 가진 자,” (전임)강사는 “학사학위 소지자 또는 전문학교 졸업 후 3년간 연구한 자로서 4년간의 경험 연수를 가진 자”로 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방과 전쟁으로 혼란했던 시절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고, 현실적으로는 자연과학 및 응용과학 분야에서 학사학위가 없거나 해방 이전에 중학교 교사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학 교원으로 등용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따라서 교수진 전원이 구 제국대학 졸업자 이상의 경력 소지자로 구성된 화학과는 당시로서는 이례적일만치 수준 높은 교수진을 갖추게 되었고, 그 결과 예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실제로 1947년 1학기에는 16개 이상의 강좌가 화학과에 개설되었고, 1948년 예과가 폐지되면서 무려 70여 명의 신입생이 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위 '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학교 전체가 어수선해졌고, 화학과에서도 몇 명의 교수가 사표를 냈다. 문리대 학장을 겸했던 이태규 교수는 이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고, 결국 1948년 문리대 학장을 그만둔 뒤 미국 유타대학으로 연구차 떠났다. 하지만 이태규 교수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사표를 냈던 교수들을 대부분 복직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고, 당초 이삼년 머물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으로 떠났던 이태규 교수는 부득이하게 가족들을 미국으로 불러들이고 서울대학교에 사표를 냈다(이 사표는 1954년 수리되었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뒤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을 지도함으로써 척박한 고국에 과학 연구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했다. 글쓴이도 유타대학에서 그의 지도를 받고 박사학위를 딴 사람들 중 하나다. 글쓴이는 화학과 초창기 교수진 가운데 가장 늦은 1958년에 유학길에 올랐다. 1950년대 들어 서울대학교 화학과의 교수진 가운데 김순경과 최상업(1954), 최규원(1955), 김태봉(1956), 장세희(1958) 등이 차례로 유학길에 올랐다. 김순경(박사학위 취득 후 미국 템플대학에 취직) 등 일부는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어려움 속의 학생 지도

당시에는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으므로, 사실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의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어떻게든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들의 논문 주제를 잡고 지도해 주어야 했다. 글쓴이는 미국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한만운, 김태린(이상 한국전쟁 기간), 김시중, 김길종(이상 서울대학교 환도 후) 등 네 명의 대학원 학생의 논문을 지도했다. 한만운은 리제강(Liesegang) 현상을 연구했다. 젤(gel)에 침전을 이룰 수 있는 성분을 포함한 물질을 녹이고, 여기에 침전을 만드는 나머지 성분을 집어넣으면(예를 들어 염화이온이 함유된 젤에 질산은 용액을 떨어뜨리면) 침전이 생기는데, 침전이 한 곳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젤의 표면에서 동심원 고리 모양을 이루면서 생겨나는 것을 리제강 현상이라고 한다. 김태린은 용액 중의 콜로이드 분산을 연구했다. 용액 속에서 크롬이나 황이 콜로이드 형태로 분산될 때 그 색깔의 변화를 보고 분산의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 연구 주제였다. 김시중은 전기영동(electrophoresis) 실험을 했는데 청계천 등에서 전지와 같은 부품을 사다가 장비를 직접 만들었다. 또 김길종은 단분자화학을 연구 주제로 삼았다.

당시 여건은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지도교수였던 글쓴이는 연구하고 싶은 주제라든가 다른 연구와의 관계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우선"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는 주제"를 골라 학생들에게 권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학술지를 통해(당시에는 학술지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미국에 가 있던 이태규 교수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학술지를 화학과에 기증하기도 했다) 물리화학 분야의 논문들을 뒤적이다가"이건 할 수 있겠다" 싶은 것이 나오면 그것을 학생들과 함께 해 보았다. 당연하게도, 연구비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실험을 하려면 최소한의 시약이나마 필요한데, 그것을 구할 예산도 없었기에 편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학부 교육에 배당된 과 예산 중 일부를 대학원생 실험비로 전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과 예산 가운데 물리화학 분야의 실험 예산이 나에게 배당되는데, 그 중 일부를 돌려 대학원생 실험에 필요한 시약 등을 구입하였다. 또 의예과에도 적지 않은 신세를 졌다. 당시 문리대가 의예과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글쓴이도 의/치의예과 학과장을 맡았던 적이 있다). 특히 화학과는 의예과 학생들의 일반화학과 유기화학 강의와 실험을 맡았다. 의예과는 실험 수요가 많아서 실험비는 비교적 넉넉히 책정되어 있었던 반면, 대부분 실험의 세팅이 통일되어 있어서 실제 운영 비용은 예산에 비해 상당히 아낄 수 있었다. 여기서 아낀 돈을 화학과 대학원생 실험비에 보태기도 했다.

미국에서 쌓은 경험

미국 유타대학에서는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이태규 교수는 물론, 그와 공동연구를 수행하던 아이링(Henry Eyring)으로부터도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이태규 교수와 아이링은 유변학(流變學, rheology) 분야에서 유명한"리-아이링 이론"을 확립한 바 있다. 글쓴이도 아이링의 지도 아래 액체이론과 통계열역학 등을 배웠고, 이를 바탕으로 분자의 기본 성질로부터 액체의 표면장력을 계산해 내는 연구를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이론 분야의 첫 연구였다. 미국에서는 또 흡착량 측정 실험을 했는데, 미량천칭(microbalance)을 이용하여 흡착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이론 연구의 경험을 접목시켜 흡착 현상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를 병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이론과 실험 연구를 병행했던 것은 돌이켜 보면 좋은 전략이었다. 이후 귀국해서는 이론적인 방향으로 연구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3년 만에 마치고 돌아온 1961년 무렵, 문리대와 의대 사이에는 의예과 운영을 둘러싸고 알력이 있었다. 의대 쪽에서는 문리대는 의예과의 강의만 맡고 행정과 운영은 의대에서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문리대 쪽에서는 그런 식의 분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의예과 학생들까지 이 분쟁에 가세하여, 당시 의예과 부장이었던 지창렬(물리학과) 교수는 의예과로 출근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글쓴이는 귀국하여 바로 의예과 부장을 맡게 되었다. 인사차 의대로 찾아 갔더니 의대 교수들은"아이들이 그러던데, 실험비 받아서 전부 자기들이 가지고, 강의는 시간강사들이 때워서 엉터리로 한다면서"라며 평소 쌓였던 불만을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나는 지금 전임 교수가 열 명밖에 안 되어 화학과 전공 강의도 시간강사가 반 이상을 맡고 있는 형편이니, 의예과 학생들의 주장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또 의대 생화학교실에서 예과 실험을 맡아서 할 때에 비해서는 실험이 파행 없이 잘 운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험실습비에 대해서는, 의예과 학생의 실험실습비 가운데 화학과로 배당되는 것은 3분의 1(물리학과, 생물학과와 나누므로) 뿐이므로 실험 한 강좌(조교 1인)당 돌아오는 돈은 그야말로 얼마 되지 않는 것이고, 실험을 할 때마다 값비싼 뷰렛이나 삼각플라스크 등이 몇 개씩 깨지거나 분실되어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의대에서 지원하는 실습비는 사실 비용을 충당하기에도 빠듯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럼에도 의대가 실습비에 대해 의심을 한다면 실습은 의대에서 맡고 강의는 우리 형편 닿는 대로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자 함께 배석해 있던 교무부장(이승훈 교수)이 중재를 하여 의대에서도 받아들였다. 총장실 앞에서 의예과 학생들이 연좌 농성을 하는 등 사태가 확대되자 쌍방이 모두 사태 해결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의예과 교육을 계속 화학과에서 맡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미국에서 생각했던 실험들은 여기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글쓴이의 연구 주제도 자연히 이론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글쓴이는 미국에서 배운 액체이론을 바탕으로 액체 구조 계산을 시작했고, 비용이 많이 드는 실험을 하지 않고도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다.

설비 제작부터 내 손으로

귀국한 뒤로는 우수한 학생들을 많이 지도하는 행운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연구를 했다. 물론 요즘과 같이 연구과제를 신청하고 연구비를 받는 방식의 연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사실 요즘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1970년대까지는 우리나라 화학의 어느 분야에도 제대로 된 연구, 또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연구란 없었다. 1950년대에는 거의 모든 교수들이 유학을 떠나 대학 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에는 유학을 떠났던 교수들이 한명씩 두명씩 돌아왔지만, 전쟁통에 모든 것이 파괴되어 사람이 살 집조차도 모자랐던 판이라 연구란 언감생심이었다. 단지 어떻게든 학생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뜻이 있는 학생은 유학할 수 있도록 길러내는 정도였다. 이리하여 글쓴이가 유학하고 60년대 초에 돌아온뒤에도 약 10년 가까이 본격적인 연구는 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글쓴이는 미국에서 돌아올 때 로그표 등 실험에 필요한 물품을 약간 사서 돌아왔고, 그 뒤 미네소타계획이나 대일청구권 자금 등의 재원을 통해 전동 계산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전동 계산기는 후일 이론 계산에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학생들의 학위논문 주제는 나의 도미(渡美) 전과 마찬가지로"할 수 있는 것"을 우선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액체 구조 계산과 같은 이론적 과제가 주로 다루어졌고, 실험도 우리나라 실정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골라서 했다. 당시에는 이처럼 학생들이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논문 주제를 잘 골라주는 교수가 좋은 지도교수였다. 예를 들어 화학과의 장세희 교수(유기화학)는 인삼이나 오가피와 같은 한방 약재, 또는 무당개구리의 복피세포 등 우리나라의 천연자원을 연구 소재로 삼아 많은 연구업적을 올렸을 뿐 아니라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같은 과의 최규원 교수는 원래 물리화학을 전공했으나 이후 분석화학의 교육과 연구에 힘을 쏟아 폴라로그래피(polarography) 연구를 이끌었다.

그래도 자연과학에서 실험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다. 글쓴이는 귀국한 뒤 이론 연구에 주력하면서도,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가며 실험을 하고자 노력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액체의 흡착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미량천칭을 직접 개량해 쓰기도 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기억을 되살려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석영 섬유(quartz fiber)로 만든 저울대를 브리지(bridge)에 얹어서 균형을 맞추고, 저울대의 한 쪽에는 자석을 달고 다른 한 쪽에는 시료를 달도록 했다. 자석이 달린 쪽 옆에는 코일을 설치했다. 코일에 전류를 흘리면 저울대를 끌어당길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저울대를 수평으로 맞추는 데 필요한 전류의 양을 측정하면 반대편에 달린 시료의 무게를 측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표준 저울추로 전류의 양을 가늠한 뒤 저울 상자 안을 진공으로 만들고, 액체 시료를 넣은 뒤 표면의 흡착 현상의 세기를 무게로 측정하곤 했다. 물론 전압계와 같은 측정장치는 대일청구권 자금 등으로 들여온 것을 달았으니 100% 직접 만들었다면 과장이겠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 많은 부분을 혼자 고안하여 독창적으로 해결했다. 특히 석영 섬유나 유리관을 밀폐하는 데 쓰이는 오링(O-ring) 같은 자재는 국내에서 구할 수 없어서, 유타에 유학 중이던 양강 박사 등에게 부탁해서 건네받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연구비도 없고 시설도 부족했으므로, 이처럼 자기가 스스로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1967년 동숭동 캠퍼스 안에 새 과학관 건물이 완공되면서 그곳으로 이주했지만, 과학관 시절(1967-1975)에도 이렇다 할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주로 통계열역학 같은 이론적인 일에 매달리기는 했지만, 가장 큰 장벽은 역시 연구비 문제였다. 1980년대 전까지는 연구비를 따낸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우선 돈을 줄 수 있는 기관이 전무했다. 특히 기초과학에서 연구비를 받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실험실습비라고 해 봐야 초보적인 시약과 간단한 유리기구를 살 수 있는 돈이 전부였다.

본격적인 연구는 80년대 중반 이후

1974년 지금의 관악캠퍼스로 이주하고 나서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시작되었다. 다만 이 글은 초창기를 다루고 있으니만큼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접기로 하자.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오늘날과 같이 교수마다 실험실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관악캠퍼스로 옮긴 뒤에도 한동안은"물리화학 연구실","유기화학 연구실"과 같이 분야별로 공동 실험실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 화학과의 교수진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새로 들어온 젊은 교수들의 연구 공간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화학과 교수회의에서 이것을 해결하게 된 것은 1980년대가 다 되어서의 일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국가의 자연과학 연구 지원이 충분치 않았다는 아쉬운 마음도 든다. 교수들의 연구 설비 뿐 아니라 학생들의 교육 설비도 실로 부족한 상황을 헤치고 나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980년 이전까지 국가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장소를 내 주고 전기와 수도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지원을 해 주지 않았다. 차관을 통한 지원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을 논하기는 부족한 듯하다. 그러나 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1985년 전후해서 본격적으로 경쟁력 있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원도 양과 질 모두 크게 성장했다. 지금 과거를 돌아보면 실로 격세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