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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읽은 책] 내가 자란 책밭 - 박창범

2008.04.03.

[과학자가 읽은 책] 내가 자란 책밭 - 박창범

과거에 내가, 또는 나의 세대가 책 읽던 경험을 말하면 지금의 세대에겐 한낱 넋두리로 들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내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경험인데 어찌하랴. 지금까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책을 초등학생 때 읽었었다. 어렸을 때 읽게 되는 책이란 어떤 인연으로든 수집되어 집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각종 성경책뿐이었다. 구약, 신약, 신구약. 찬송가도 여럿이었는데 식구들 머리수보다 훨씬 많은 수의 교회 책이 쌓여 있었다. 다른 책을 보고 싶어도 집에 볼 책이 없었다. 아니 딱 하나가 있었는데 전화번호부만한 책 일곱 권으로 된 낡은 백과사전이었다. 1950년대에 발간된, 한권을 들기에도 무거운 사전이었다. 궁금했던 어떤 한 단어를 시작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전 속에서 다른 단어를 찾아나가며 설명과 그림을 보아나가는 것이 나의 첫 독서생활이었다. 그러다 보면 찾으려 했던 단어가 아닌 것에 눈이 끌려 다른 가지를 치고 엉뚱하게 딴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모르는 한자와 맞닥뜨리면 그냥 그림만 보고 넘어간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나에겐 이보다 즐겁고 신기한 여행이 없었다. 무료한 초등학생의 몇 년을 잡아두기에 분량도 충분했다.

집에 책이 넘쳐 내다 버려야 하는 시대가 된 지금 이런 얘기로는 남의 공감 사기가 힘들 것이다. 내가 이렇게 넘치는 책을 처음 본 것은 다니던 중학교의 도서관에 갔을 때였다. 누구나처럼 국내외 작가의 문학작품, SF소설 등을 읽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철학에 빠져 니이체 책을 손에 달고 다녔다. 그것은 대학에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기에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첫째는 과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 내가 왜 제대로 과학책 한 권을 읽지 않았을까? 둘째는 그렇게 열심히 철학책을 읽었는데 왜 나는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 역시 지금에 적용되는 것이 못 된다. 원로과학자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이렇다 할 교양 과학책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당시에 과학을 교과서 밖에서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학생과학』이라는 잡지와 전파과학사에서 나오는 문고서적이었다. 전파과학사의 책들은 과학의 전 분야에 걸쳐 과학의 최전선을 우리 국민이 접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책들이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고 흥미를 유지하기 힘든 책이었다. 더구나 그 책들의 상당수가 번역책이었는데 아마 어려움과 따분함은 번역에서 발생한 효과가 아니었나 싶다. 대신 내 눈을 휘둥그레 하게 해줬던 책은 형님께서 친구에게서 빌려온 몇 권의 『학생과학』이었다. 앞뒤가 다 떨어져 나간, 화장실에서 구출해온 책들이었지만 다이오드나 트렌지스터가 들어간 라디오 만들기를 비롯 모형 엔진비행기, 전자오르간, 모터로 가는 자동차 만들기 등등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내게는 보물같은 책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라기보다는 기술이었다. 과학은 그저 대답을 얻을 수 없는 내 의문사전 속에서만 커져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많은 철학책을 읽으려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깊은 충격을 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영향 때문이었는데 이 책은 과학과 문학의 세계 안에서만 닫혀있던 나에게 스스로의 눈을 달게 해 준 책이었다. 세계 인식에 대한 깊고 깊은 새로운 경지를 맛보게 해준 순간은 나에게 있어 당시에 이 책을 읽었을 때와 대학원생 때 일반상대론을 처음 읽었을 때 두 번 뿐이였다. 하지만 이 시절을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철학책들 내용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쳐다보았을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철학적 소양이 부족해서였겠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말도 안되는 번역의 문제도 있었다. 그때는 문장의 어려움이 철학적 내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하려 애썼는데 실은 앞뒤가 안 맞는 번역글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내가 더 이상 철학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어진 뒤의 일이었다. 요즈음은 어느 서점이나 교양과학서가 한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과학책이 나와 있다. 그 중에는 글솜씨가 빼어난 분들의 저서나 번역책들도 많아 우리나라의 미래 과학도들에게 과학의 참맛을 훌륭하게 전해주고 있으니 나의 학생시절과는 정말 사정이 달라졌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의 책읽기가 내가 과학자가 되는 데에 장애로 작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록 읽을 책 자체가 없어서 백과사전을 읽어야 했지만, 또 과학책을 못 읽고, 인문학 책만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양한 지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발상에 필요한 인문학적 창의성을 배우게 되었고, 자연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마음속에 수없이 물음표로 쌓아 오늘날 그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보람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밝혀진 놀라운 사실들을 멋지게 전달받아 수많은 느낌표를 받아보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책을 읽는 사람보다는 책을 쓰는 사람이라고 알려진 지금, 나는 미래 과학을 담당할 후배들에게 현대과학의 성취를 알려주는 것보다는 과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과 지금 무엇을 알아가고 있는가를 더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러한 것을 찾으며 책을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