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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박영규 교수

2008.04.03.

그날이 오면

한동안 대학가에서 즐겨 부르던 “그날이 오면”이란 노래를 다시 듣다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을 읽었을 때의 생각이 떠올랐다. 민주화 이후에 비로소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다시 숙고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듯 ‘그 날’이 온 이후에야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날을 기다려왔는지를 되묻고 성찰하게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관악캠퍼스는 갖가지 ‘그 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찬 문화적 공간이다. 70년대 이후의 대학은 특별히 민주화에 대한 기다림으로 가득했다. 민주화는 대학인 모두가 공유하는 꿈이었고 그 속에는 개인적인 성취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앞세워야 한다는 시대정신이 약간의 엘리트적 소명감과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지성적 논의를 허용하지 않던 폭력적 야만성을 경험하던 대학인들에게 민주화란 일종의 유토피아적 화두였던 것인데, 독재를 종식시킨다는 정치적 차원과 함께 음습한 권력이 지배하던 캠퍼스를 대학 본래의 정신이 숨 쉬는 곳으로 바꾸고자 하는 집합적 열망이 담겨있었다.

민주화와 함께 한국사회는 물론 캠퍼스 문화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온갖 종류의 논의와 활동이 활발한 지금의 상황을 보면 왜 더 이상 ‘그 날’을 기다리는 노래가 대학에서 불리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대학구성원들 모두가 공유하는 꿈은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되었고 많은 개별적인 기대와 욕망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관악캠퍼스에서 보는 발랄함과 활기참은 학생들의 개성적 옷차림이나 태도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기다림이 개별화되고 사적인 것이 된 상황, 집단적 꿈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움에서 그 힘을 얻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분명 민주화가 가져다 준 성취이고 보람이지만 꿈의 개별화와 사적 욕망의 분출 속에서 무언가 소중한 것들을 잃고 있다면 ‘그 날’을 맞이한 이후에 우리가 되물었어야 마땅한 성찰적 사고가 소홀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노랫말과 정서를 담은 ‘그 날이 오면’이란 노래가 다시 불려졌으면 싶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민감한 타산적 논리도 아니고, 어슬픈 슬로건적 이데올로기에 휩싸이는 것도 아니며 다수의 목소리에 현혹되지도 않는 어떤 정신, 그것 때문에 캠퍼스에 들어서면 무언가 신성한 공기를 감지할 수 있는 독특한 관악문화가 만들어지는 ‘그 날’을 꿈꾸는 노래 말이다. 밤을 새며 혼자 연구에 몰두하는 지적 탐구도, 진지한 토론으로 성찰의 능력을 키워가는 정열도,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기적같은 그 날을 기다리는 종교적 헌신도, 조용히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개개인의 소박한 꿈들까지도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주하는 ‘그 날’에의 꿈이 이곳에서 힘차게 자라났으면 싶다. 이 새로운 ‘그 날’이 오면 대학만이 지니는 독특한 권위, 지성적이고 윤리적이며 고결한 정신이 우리들 주변에서 힘을 얻을 것이고 그 덕택에 한국의 민주주의도 좀더 고급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대사람들> 2호 게재 (2005. 11. 15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