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명: JBARI Omayma)
나는 봉사를 격려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겨울철에 옷을 모아서 기부하거나, 라마단 때 음식 재료를 사고 기부하기 위해서 모금을 모으고 그랬던 나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어렸을 때 나의 조그마한 용돈 일부를 종종 기부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직접 봉사 과정에 참여하고 싶었다. 당시 펜팔링이 취미였던 나는, 프랑스인 친구 “스테파노스”를 통해 “Revive a Rural African Child(RRAChild)”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다. 우간다에 있는 단체이고, 우간다 시골에 사는 아이들의 교육, 음식, 위생, 등을 보장하기 위한 단체다. 그때 RRAChild에서 하는 펜팔링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우간다에 사는 아이한테 편지를 쓰고 학용품을 사서 보냈다. 그리고 그때 담당자분에게 제가 컸을 때 RRAChild에게 무조건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기억이 있다. 이게 나의 첫 봉사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첫 대면 봉사는 고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새로 설립된 동네 청년 봉사 단체에 가입하고 같이 활동했다. 주로 했던 활동은 겨울에 옷이랑 따뜻한 이불을 모아서 나누는 것, 음식 재료를 나누는 것, 초등학교 환경 개선 등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국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나라 모로코에 있었을 때 다행스럽게도 KOICA 프로그램으로 모로코에 봉사자로 오게 된 한국인 친구들이 몇 명이 있었다. 그 친구들이 모로코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고 감사한 마음에 나도 언젠가 한국에 가게 된다면 거기서 봉사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고 몇 년 뒤에 한국에 정부초청장학생으로 오게 되었다. 2020년3월3일, 코로나19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을 때 한국에 도착했다. 모두에게 힘들었던 코로나 시대, 타국 생활이 처음인 나에게는 더욱더 힘들었다. 학교나 서울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나는, 1학기 때는 대부분 혼자 밥 먹고 혼자 다니고 혼자 공부했다. 지금은 온라인으로라도 친목 행사를 하는 게 정상이지만 2020년 초에는 모두에게 처음이고 익숙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온라인 행사조차도 없었던 것 같다. 그대로 1학기가 끝났고, 여름 방학 때 한국에 가면 봉사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 생각났다. 그리고 봉사를 통해서 나 자신을 되찾기로 했다. SNS로 알게 된 “코리아레거시커미티(KLC)” 덕분에 2020년8월21일에 한국에서의 첫 봉사를 했다. 원각사 노인무료급식소에서 주방 일을 하고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나눠 드리는 봉사였다. 그때 한국 노인 빈곤 문제에 대해서 처음 알았다. OECD 국가 중 한국 노인빈곤율이 가장 높다는 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던 것 같다. 그리고 KLC는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 하고자 설립된 비영리단체다.
한국에서의 내 인생은 봉사를 시작한 전과 후로 나뉜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1학기 때 주로 혼자였던 모습과 달리 자연스럽게 활동이 많아지고 친구도 많아지고 활발히 지내고 있다. 그리고 첫 봉사가 끝나고 지금까지 계속 노인 문제 관련해서 KLC와 함께 여러 곳에서 봉사를 해왔다. 성남시 안나의집, 원각사 노인무료급식소, 광야홈리스센터, 영등포 쪽방상담소, 가톨릭사랑평화의집, 서울역 참좋은친구들, 그리고 명동성당 명동밥집에서 봉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크게 네 종류의 봉사를 해봤다: 첫 번째는 KLC의 메인 봉사인 도시락 나눔이다. 준비된 음식을 담거나 기부받은 도시락을 나누는 형식으로 하고 있다. 많은 어르신들이 도시락 받으러 찾아오시고 때로는 하루에 700인분까지 나눠 드릴 때가 있다. 그리고 어르신들 집까지 도시락을 배달하는 도시락 배달 봉사도 했었고,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을 봉사 기관에 와서 먹고 가시는 분들에게 배식 봉사를 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봉사 덕분에 작은 친절함의 단어가 사람을 얼마나 기쁘게 할 수 있는지를 배웠던 것 같다. “맛있게 드세요” 또는 “건강하세요”와 같은 단어들이 어르신들 얼굴에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노인 관련 봉사를 하다 보니까 봉사에 가장 중요한 게 도시락 자체가 아닌 그분들을 대하는 진심과 따뜻한 한마디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봉사는 연탄 봉사다. 내 기억 속에서 제일로 잊혀지지 않는 경험이었다. 겨울철에 우리가 전기 난방으로 따뜻하게 있을 때는 아직도 연탄이 있어야 조금이나마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분들이 많다. 연탄 봉사 때는 연탄을 수레에 올리고 집집에 옮기는 일을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했다. 봉사자가 없을 때는 나이가 많으신 분이 혼자서 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연탄 봉사가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봉사인 이유는 내가 실제로 독거노인들이 사는 동네를 처음 본 봉사였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안 좋은 집들을 보고 조금만 걸으면 옆에 화려한 고층 건물들이 다시 보인다. 두 장면이 그렇게 붙어 있는 게 나에게 매우 놀라운 현실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눈을 둘러보면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지나가다가 바로 옆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지 못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탄 봉사를 처음 하고 난 날에는 팔이 아파서 숟가락도 들기가 힘들었던 봉사였지만, 쪽방촌 동네 상태를 보고 그만큼 의미가 있는 봉사였다는 것을 느끼고 그 이후에도 연탄 봉사에 또다시 참여했다.
세 번째는 도배 봉사였다. 쪽방촌에 사는 어르신들 방에 직접 들어가서 도배를 했다. 쪽방은 건물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고 에어컨도 두 분씩 나눠 쓰고 방들이 습하고 환기가 안 돼서 살기 매우 안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벌레도 많고 냄새도 안 좋아서 그런 곳에서 어르신들이 산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개인적으로 도배 봉사가 신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쪽방촌이 너무 닫힌 공간이라서 살충제 냄새에 접착제 냄새 때문에 숨쉬기 힘들었었고 틈틈이 나가서 공기를 쐐서 돌아오고 그랬어야 했다. 이렇게 힘든 봉사였는데도 불구하고 끝나고 봉사 사진을 보니까 사진에 담긴 내 모습이 웃는 모습이었다. 친구가 된 다른 봉사자들과 함께해서 재미가 있었고 이것이 봉사의 매직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마스크 포장 봉사를 했다. 작년에 마스크 구하기가 어려웠을 때 어르신들이 마스크 하나를 더러워져도 오랫동안 쓴다는 것을 들었다. 그때 KLC가 기부받은 마스크 10000장을 포장했고 어르신들에게 나눠드렸다. 지금은 마스크가 문제가 되지 않아 너무나 다행스럽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렇게 봉사를 하면서 많은 감정을 느꼈고 여러 연령층과 여러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시간을 내서 꾸준히 봉사하려는 대학생들과 직장인들, 어렸을 때부터 계속 외국에 살았다가 봉사를 위해서 한국에 돌아온 한국인분들, 그리고 특히 어려운 시기에 봉사를 운영하는 분들, 모두가 멋지고 존경스러웠다. 또한, 노인과 관련한 봉사에서 작은 행동이나 나눔이 상대방의 힘든 생활과 마음을 얼마나 달랠 수 있는지, 땀을 흘리는 봉사자에게도 봉사가 얼마나 기쁨을 줄 수 있는지를 배웠다. 사회봉사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조금 더 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봉사를 한다고 하면 왜 남의 나라에서 봉사하느냐, 왜 일을 안 하는 사람을 돕느냐와 같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어느 분의 말씀은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사연들이 있는지도 어떤 일들을 겪어왔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도 과거에 우리처럼 가족이 있었을 수도 있고 직장이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와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아니면 선택하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걷게 된 길이 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도 미래에 똑같은 모습이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요즘은 모두가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시기인 만큼 서로를 도와주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코로나로 문을 닫았거나 봉사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는 기관들이 있어서 노숙인과 독거노인에 더욱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주변 한국인 친구들과 외국인 친구들에게 좋은 일은 같이하자고 항상 봉사를 추천하고 SNS에서 아랍어와 영어와 한국어로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노인과 노숙인 관련 봉사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 시간, 또는 신체적 능력을 이용해서 남들을 도와줄 수 있다. 봉사는 생각보다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순하고 당연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