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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쥬' 실천 그리고 청년의 마음을 가진 배우

2013.04.17.

‘신영균-서울대학교 발전기금’ 설립한 신영균 동문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 신영균 동문(치대 48년 졸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60~70년대 한국 영화에서 선 굵은 외모와 호소력 있는 연기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배우 신영균’을 떠올릴 것이다. 영화배우이자 현실에서 사업,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활동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 있지 않다. 신영균 문화예술재단 이사장으로 시작된 기부자로서의 행보는 우리 사회에 잔잔한 감동을 전해오고 있다. 2013년 2월 그는 서울대에 제주도의 토지를 기부했다. ‘당연한 일’에 인터뷰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기부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2012년 관악극회의 연극 <하얀 중립국>에서 후배들과 함께 했다. 50여년 만의 무대였고 후배들과 함께 한 감회는

서울대학교 발전기금 설립한 신영균 동문 <하얀 중립국>은 서울대 연극 동문회에서 ‘관악극회’를 조직 후 첫 작품이라 의미가 더 크다. 처음에 후배들의 출연 제의에 기쁘게 수락했는데, 49년 만의 연극이라 부담도 크고 대본도 잘 안들어왔다. 힘들겠다 싶어 이순재 회장에게 다음에 출연하겠다고 얘기하고 단념하고 있었는데, 후배들의 간곡한 출연 부탁에 고민하고 있었다. 신문에 제가 출연한다는 이미 기사가 나왔다(웃음). 제 나이가 여든을 넘었는데 20대 후배들과 한 무대에서 연극을 하니 행복과 건강, 그리고 젊어진 기분이 들더군요. 덕분에 2012년은 정말 뜻있고 행복한 해가 되었다.

치의대 재학 시절 총연극부를 창립해 공연 활동을 하셨다고 들었다.

연극을 정말 좋아하고, 배우를 하고 싶어 처음엔 대학을 안 가려고 했죠. 고교 졸업 후 2년여 연극무대를 따라다녀봤는데 고생을 많이 했다. 배우를 직업으로 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무대를 떠나 2년 정도 공부하고 서울대 치대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도 연극이 못 견디게 하고 싶은 거예요(웃음). 학교 전체를 대상으로 종합 연극부를 조직했죠. 작가이자 감독인 박 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작품도 올렸고, 고인이 되신 이낙훈 선생도 그때 함께 활동했던 멤버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치과의사로 살았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아, 치과를 2년만에 접고 국립극장 무대에 섰다. 우연찮은 기회로 영화계에 데뷔,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산불>, <무숙자>, <대원군> 등 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마지막 출연작인 <저 높은 곳을 향하여>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는 무려 300편이 넘는다. 2012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 회고전 주인공으로 선정돼 젊은 관객과 만나기도 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이 열렸는데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은 한국영화사에 공로를 세운 영화인을 주인공으로 선정하는데 저를 불러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50여년 전 영화들을 보니 감개무량했다. 8 편(<십년세도>(1964), <미워도 다시 한번>(1968), <봄봄>(1969),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1971),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77), <무숙자>(1968), <쌀>(1963), <대원군>(1968))이 상영됐는데 네 작품을 봤다. 관객이 올까 싶었는데 과거 팬들이 많이 찾아 영화도 보고 오랜만에 팔 아프게 사인도 했다(웃음).

1980년대부터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영화에서 목사역을 맡았던 게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검열이 무척 심했다. 키스신도 안되고 사람을 죽여도 안 되고… 그러다 보니 영화가 재미가 없어졌다. 영화를 제작해도 관객이 없어 제작이 줄고, 작품 수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영화와 멀어진 것 같다. ‘은퇴’에 관한 질문을 받는데, 영화배우에게 은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다시 배우로 출연할 수 있고, 사실 마지막으로 꼭 한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그가 영화배우로 일하던 시절에는 영화 배우, 감독, 제작자 모두 충무로에서 만나고 모였다. 서울에 개봉관이 열 개밖에 없던 시절, 대부분이 충무로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스카라, 국도극장, 명보극장(現 명보 아트홀), 대한극장 등이 대표적이었다. 영화배우 시절 그는 모은 돈을 투자해 명보극장을 인수하였다. 상영작들 가운데 그가 주연한 작품도 많이 있었고, 명보극장은 그의 인생과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충무로의 극장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스카라극장은 헐려 오피스 빌딩이 되고 국도극장엔 호텔이 들어섰다.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명보극장 뿐이다. 그에게도 많은 사람들이 극장을 팔라면서 많은 돈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팔아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신영균 예술문화재단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명보극장을 팔라는 제안이 들어와서 가족회의를 열었다. 장남(한주홀딩스 신언식 회장)이 며칠간 고민하더니, 명보극장은 아버지가 <빨간 마후라의 사나이> 등 주연했던 영화들을 많이 상영한 곳이고 이마저 충무로에서 없어지면 영화 역사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영화계에 기증하는 제안을 했다. 좋은 생각이다 싶어 기증을 결심했고, 그게 제 기부의 시작이었다.

모교에 기부할 때에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신영균-서울대학교 발전기금 협약식 모교에는 늘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꼭 보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평생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배우가 ‘딴따라’라고 불리던 시절 모교 덕분에 혜택을 받은 바가 있고, 영화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기부 문화가 일반적이지는 않은데 많이들 참여했으면 좋겠다. 아직까지 사회가 좀 메말라있는 것 같다. 돈 있는 사람들이 과감하게 앞장서서 해야겠지만 기부가 꼭 돈이 많아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부를 반드시 돈으로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문화가 확산됐으면 좋겠다.

그는 2006년 금혼식 비용으로 마련했던 1억원을 사회복지단체에 기탁하며 기부의 진정한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2012년에는 서강대에 아트 & 테크놀러지 전공 발전기금을 출연해 후학 양성을 부탁했다. “더 많이 베풀고 싶은데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는 그에게서 겸손과 기품이 느껴졌다. 인생에서 크게 실패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무 큰 욕심을 내지 않아서라고 담담히 전하며 모교에, 사회에 감사를 전하는 그는 청년의 마음을 가진 배우이자 한국 사회의 진정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선택이다. 젊은이들, 후배들에게 인생 선배로서 당부의 한마디.

후배들에게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전정신’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걸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올해 서울대 입학식(3월 4일)에 SM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가 초대돼 특강을 했다고 들었다. 이대표도 우리 학생들에게 도전정신을 가질 것으로 강조했다고 들었다. 도전 속에서 개인은 물론 우리 사회, 국가의 밝은 미래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분야이든 자신의 끼를 살려 하고 싶은 것을 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