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서울대학교 국가정책포럼
등록일: 2016. 10. 27. 조회수: 16159
존경하는 서울대학교 가족 여러분, 그리고 귀한 자리 함께 해 주신 내외귀빈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서울대학교는 2016년 10월 15일로 개교 7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척박했던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온 서울대학교를 뒤돌아보면서 미래 대한민국의 설계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에 올 상반기에 ’국가정책포럼’을 신설하였고, 반년 가까운 시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오늘 이렇게 첫 행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국가정책포럼 위원장인 송호근 교수님을 비롯해서 귀한 시간을 할애하여 위원으로 활동해 주신 여러 교수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서울대학교 국가정책포럼은 오르지 서울대학교 교수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가정책포럼은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지성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 교수들의 지혜를 모으고 국가적 의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미래 대한민국과 대한국민이 나아가야 할 길을 함께 연구하고 고민하는 소중한 포럼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오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박원순 서울시장님, 남경필 경기도지사님, 안희정 충남도지사님, 원희룡 제주도지사님 감사합니다. 중차대한 시기에 대한민국의 지방권력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미래 국가권력의 방향설정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분들이기에 귀한 말씀을 기대해 봅니다. 또한 현재 의회 권력을 대표하는 새누리당,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3당의 정책책임자이신 김광림, 변재일, 김성식 정책위원회 의장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지난 4·13총선결과는 여소야대로 귀결되었습니다. 이는 집행권력과 의회권력의 분리현상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준엄한 뜻은 정부와 국회 사이에 권력을 분점하면서 협치를 실현하라는 것일 것입니다. 근래 보기 드문 여소야대 정국에 각 당은 슬기롭게 대처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20대 국회의 첫 국정감사와 그에 따른 각종 현안의 처리과정은 국민적 신뢰를 확보하기에 미흡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오늘 제1회 서울대학교 국가정책포럼에서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헌법학자로서 몇 가지 소회와 당부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세계사적으로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한 현대사회의 이면에 국가이기주의적인 패권주의가 부활함에 따라 대한민국의 미래도 불안을 떨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우리는 물질적·경제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였지만, 사회구조적·정신적 위기는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쌓여온 적폐들이 아직도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낡은 인식과 이념의 장벽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시대정신(Esprit du temps)에 부응해야할 역사적 소명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공동체적 가치의 핵심인 공익, 공공성, 공동선(共同善, common good)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국가형성(nation-building)은 하늘이 무너져도 법과 원칙이 지배하는 정의로운(Fiat Justitia, Ruat Caelum) 사회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상과 현실을 아우르는 실존적 사고(existentialisme juridique)에 입각한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2014년 서울대학교 제26대 성낙인 총장 취임사 중에서)
첫째,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를 도모해야 합니다. 외교안보와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 하나 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국가의 존립과 안전에 관한 사항은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가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통일방안, 햇볕정책, 한반도신뢰프로세스 모두 허공에 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북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핵실험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개된 냉전시대의 유물인 민족분단은 한반도에서만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19세기말 서세동점으로 인한 아시아의 황폐화는 이제 21세기에 이르러 동서양의 충돌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동북아질서는 새로운 재편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민국호의 갈 길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한 번 더 숙고해야 합니다.
민족의 숙원인 통일대업을 달성하고 연구하는 장은 대학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서울대학교는 그간 ‘통일평화연구원’을 개설하여 올 해로 10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제 그간의 연구와 교육성과를 바탕으로 ‘통일평화대학원’ 과정을 개설하여 미래 한국의 청사진을 그려 갈 예정입니다. 분단과 전쟁의 폐허에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입니다. 분단 극복과 통일을 위한 우리들의 노력은 기약할 수 없을지라도 쉼 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한 대장정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길이 열려야 합니다. 금강산도 열려야 하고 평양길도 열려야 합니다. 철마도 달려야 합니다. 더불어 개성공단도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제2·제3의 개성공단이 개설된다면 자유의 바람은 훨씬 빨리 북녘 땅에 뿌리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통일대학원이 아니라 통일평화대학원을 지향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하고도 간단합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는 세계 인류공영을 위한 ‘평화학’의 메카가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사를 반추해 보십시오. 세계 10대 강국 중에서 전쟁을 일으킨 이후 식민 지배를 하지 않은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소련, 중국, 일본, 더 나아가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르기까지 이들 나라들은 한 결 같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세계정복과 정벌의 야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5천년 역사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다른 나라를 침탈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가 인류공영을 위한 평화학의 메카가 되어야 할 당위이기도 합니다.
둘째, 대한민국은 그간 최단기간에 가장 압축적으로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하였습니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안착하는 데 있어서 성공적인 경제발전은 핵심적인 물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정치헌법학적으로 두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two turn-over)를 달성한 국가를 민주주의 국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를 구현하였습니다. 주한외국대사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길 바라는 것과 같다”라는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침내 이를 해냈습니다. 하지만 외형적인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자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껍데기만의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혁명은 기존의 낡은 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의지의 미래를 향한 전달자(porteur d’avenir)입니다. 그간 한국사회는 민주주의를 향한 민주주의의 성전을 위한 혁명적 분위기가 지배해 왔습니다. 그 어떠한 주장이나 행위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었습니다. 실정법보다는 정의나 법이념이 정당화되었습니다. 민주화와 민주주의는 곧 정의였습니다. 여기에 실정법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민주주의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자유는 넘쳐납니다. 그 어떤 정치권력도 넘치는 자유를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혁명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정의나 법이념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주어진 실정법을 충실히 지키는 법적 안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동시대의 실존적 상황을 외면한 그 어떠한 주의나 주장도 정의로울 수 없습니다. 잘못된 법은 지난 30년 가까이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을 통해서 충분히 걸러냈습니다. 이제는 떼법의 시대를 끝내야 합니다. 국민의 생활 속에 법이 지배하는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저는 법무부 법교육위원회 초대 위원장과 경찰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생활법치’를 강조해 왔고, 이제 경찰청의 핵심정책으로 생활법치가 채택되어 있음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제복이 더 이상 떼법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셋째, 산업화의 고귀한 유산을 이어가야 합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야기된 양극화 현상은 우리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헌법이 추구하는 경제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다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허공을 향해서 절망하는 목소리가 넘쳐납니다. 다 같은 우리의 이웃이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입니다. 더구나 젊은이들이 미래에의 희망을 잃어간다면 그것은 곧 대한민국병의 시작입니다. 그들이 모두 미래를 향한 내일의 설계를 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가 힘을 모아야 합니다.
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경제 장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에 대한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규정해 왔습니다. 1987년 헌법에서는 사회정의를 넘어서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서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87년 헌법에서 강조한 경제의 민주화가 25년이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최고의 화두로 던져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하였고 또 실천하려는 의지도 박약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1997년의 IMF사태와 2008년 세계적인 재정위기를 거치면서 사회적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지점에서 국가경제정책의 방향은 경제민주화로 나아갔어야 마땅합니다.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 바로 시작하는 것 또한 더 중요합니다.
서울대학교에는 대도시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학생도 중요하지만 도서벽지에서 오상지절의 기개를 품고 간난을 헤쳐 나온 학생은 더욱 중요합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우수한 인재들이 의식주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여 합니다. 서울대학교 학생회관은 작년부터 아침과 저녁을 천원에 제공합니다. 동시에 약 850명에 이르는 소득순위 차상위 계층의 학부 재학생 전원에게 등록금 면제뿐만 아니라 매달 30만원의 기초생활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또 다시 차가운 계절이 다가옵니다. 어려운 학생과 삶에 지쳐있는 국민에게 희망의 불씨를 넣어주는 따뜻한 보살핌과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입니다.
넷째, 세계는 중대한 변곡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금년에 서울에서 펼쳐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대회는 전 세계인을 놀라게 했습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했습니다. 시합이 열리기 전 어느 누구도 알파고의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알파고의 승리였습니다.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동안 쌓아 올린 산업화의 성과가 거대한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7월 마이크로소프트(MS) 본사의 초청으로 시애틀에 갔습니다. MS 본사 대강당(Amphitheater)에는 천 명 가까운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자비로 운집해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를 비롯해서 세계 각국의 최고 전문가들이 강연과 토크 쇼에 등장했습니다. 조지아텍의 이러닝 전문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인터넷강의를 통해서 수 천 명의 석사를 배출하는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MIT를 중심으로 하는 Edex에 이어 우리나라도 K-Mooc 시대를 열었습니다. 21년간 예일대학 총장을 역임한 레빈 박사는 실리콘 밸리에서 Cousera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대학교육도 변해야 합니다. 언제까지 대학의 캠퍼스가 지금처럼 작동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느 순간 캠퍼스의 변화와 종말이 올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난 9월말 2박3일의 짧은 일정동안에 버클리대학에서 개최된 세계대학 총장회의에 참석한 후 실리콘 밸리의 한국 전문가와의 면담, 애플·구글·페이스북의 방문을 통해서 실리콘 밸리의 눈부신 발전상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4년 전 개인 자격으로 구글과 페이스북을 방문했을 때와 또 다른 세계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산학협력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젊은 교수 세 분이 현재 실리콘 밸리에 안식년으로 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 분만 스탠퍼드대학에 있고 나머지 한 분은 애플, 나머지 한 분은 구글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학문 간의 경계도 없습니다. 대학에서 다양한 전공을 한 학생들이 전문대학원에서 종합적인 사고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지난 3차에 걸친 산업혁명이 기계화와 대량생산에 이어진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었다면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과 로봇(Robot), 데이터 사이언스(Data Science)와 클라우드(Cloud), 사물인터넷(IoT, Internet of Things), 그리고 바이오(Bio), 이러닝(E-learning), 자율형자동차 등을 통한 새로운 경제의 장은 가희 제4차 산업혁명이 열렸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탈경계 즉 경계를 무너뜨리고 초학제적 융합을 통한 새로운 최적화 단계에 접어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그간 정보통신기술(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ies) 분야에서 세계적인 위상을 확보해 왔습니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에도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중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웃한 중국과 일본의 중요성은 더해 갑니다. 금년 초에 자가용 비행기로 아침에 서울에 도착한 MS의 수석부회장은 오전에 서울공대 교수 랩을 찾았고, 점심은 총장과 함께 한 후, 다시 오후에 서울공대 교수 랩을 방문하고 바로 베이징으로 날아갔습니다. 한국의 이 분야 중요성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긴 합니다만, 한국에 대한 외국의 시각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가능하다면 서울대학교는 새로 조성하는 시흥캠퍼스를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캠퍼스로 구축하고자 합니다. 기숙대학(RC)이나 단과대학이 이전하는 그런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걸 맞는 캠퍼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2년 전에 설립된 서울대학교 ‘빅데이터연구원’은 방 두 칸에 불과합니다. 서울시민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서 박원순 서울시장께서 개포동의 옛 학교를 통째로 서울대학교에 할애해 주시려합니다. 남경필 경기지사께서는 판교 벨리에 서울대학교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서울대학교 안에서는 제대로 연구할 공간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이를테면 빅데이터연구원이 시흥에 자리 잡으면 동시에 데이터사이언스 혁신전문대학원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제4차 산업혁명에 즈음한 연구의 한 축을 구축하여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인천공항과 인접한 이점을 살려서 산학협력을 통한 국제적 산학클러스터가 형성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헌법 개정 논의와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헌법학자로서 약간의 소회를 밝히고자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에 제정된 이후 1987년 개정이 아홉 번째 개헌에 해당됩니다. 1960년 제2공화국, 1963년 제3공화국, 1972년 제4공화국, 1980년 제5공화국에 이어 1987년 헌법은 제6공화국헌법이라 합니다. 한국헌법사는 바로 격변의 대한민국헌정사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아홉 번의 개헌 중 어느 하나도 평화 시에 행해진 예가 없습니다. 39년 동안 아홉 번의 헌법, 그야말로 불안정한 ‘헌법의 왈츠’가 계속되었습니다. 이제 그 1987년 헌법이 30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만큼 헌법의 안정을 구가하였습니다. 이는 곧 국가와 헌정의 안정을 의미합니다.
이번이야말로 정변이 없는 안정된 상태에서 국민적 합의에 따른 축복으로서의 대한민국헌법을 만들고 다듬을 때가 되었습니다. 아홉 번에 이르는 동안 단 한 번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발의하고 국민적 토론이 전개된 적이 없습니다. 저는 19대 국회 헌법연구자문위원회에서 일단의 책임을 맡은 바 있습니다. 처음으로 평상시에 헌법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또 그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헌법 개정은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여야정치권의 전폭적이고 전면적인 합의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간 소상상태에 빠졌던 개헌논의가 대통령의 10월 24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서 탄력을 받을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을 거치면서 임기 초·중반에는 한 결 같이 개헌을 반대하다가 임기 말에 이르러 개헌을 공식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헌의 내용 즉 콘텐츠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 것이며 그 합의는 협치를 통해서 권력분점을 구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권력은 어느 특정 계층이나 특정인이 독점하는 체제가 아니라 다 함께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기본권과 관련해서는 세계적인 경향을 충실히 반영하고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라 제기된 헌법적 가치를 가지는 기본권을 도입하여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럽연합 기본권헌장’은 중요한 참고가 될 것입니다. 세계화는 곧 지방화라 하지 않습니까. 지방자치를 완성하여 권력의 수직적 분립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헌법규범의 체계정합성을 이루어야 합니다. 정치인들에 의한 정치인들을 위한 개헌과정에서 헌법의 법리와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침탈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규범들에 대한 교정이 뒤따라야 합니다. 대법원에 의해 위헌으로 결정된 국가배상법의 군인‧군무원에 대한 이중배상 금지조항이 유신헌법에서 헌법규범으로 이식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입니다.(성낙인, 헌법학 제16판, 법문사 참조)
끝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근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균형’(balance)입니다. 정의의 여신은 ‘균형의 저울추’를 들고 있습니다. 그 균형은 단지 권력의 균형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권력의 균형은 몽테스키외의 ‘견제와 균형’ 이론으로 정립되어 삼권분립이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하지만 균형은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사회 모든 곳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사회의 양극화현상에 따라 경제민주화, 동반성장, 공유경제, 사회적경제 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은 시장경제가 야기한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하여 정립된 사회적 시장경제질서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여 경제에 있어서 사회의 균형을 일탈한 증좌입니다.
서울대학교가 지향하는 균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들은 서울대학교 입학생들이 우리 국민 전체의 시각에서 균형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또 그렇게 입학한 학생들이 균형감각을 가진 사회의 지도적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각별한 배려를 약속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