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E 2015(Les Recontre Universities Entreprises, 대학과 기업과의 만남)
등록일: 2015. 3. 23. 조회수: 17342
귀빈 여러분, 그리고 신사숙녀 여러분, 올해로 한국과 프랑스는 수교 130년의 오랜 역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19세기에 맺어진 양국관계는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깊은 유대를 쌓아 왔습니다. 올해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양국 간 많은 행사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30여 년 전 프랑스에서 법학을 공부한 저에게 특히 오늘 행사는 대한민국의 고등고육을 대표하는 서울대학 총장으로써 여러분들 앞에서 ‘경제발전, 기술혁신, 그리고 대학의 역할’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롭고 또 매우 영광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준 주최 측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의 주제인 국가 경제발전과 고등교육의 역할, 특히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고등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냐의 질문에 대한 저의 대답은 당연히 Yes입니다. 한국의 고등교육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 총장인 제가 여기에 No를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단지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한국의 경제발전 경험이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 이후 아직 침체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 유럽 및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은 다양한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러한 산업정책에서는 기술혁신이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한편, 기술혁신은 기초가 튼튼한 교육과 연구를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고등교육연구기관인 대학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기 힘든 대학에 투자를 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기 때문에 정책 결정자들이 대학 투자에 망설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기술혁신을 위한 대학의 연구개발이 투자에 비해서 경제발전에 확실한 도움을 주는가에 대해서 기존 연구들이 서로 엇갈린 결과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발전이 연구개발뿐 아니라 다양한 원인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발전을 잘 살펴보면, 다른 요인과 함께 교육, 특히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가 초기 산업화는 물론 이후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경제선진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닥친 경제위기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90달러 정도였는데, 현재는 2만8천 달러에 이르러 지난 50여 년 동안 약 300배 성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한국은 후진국에서 선진국 그룹에 진입한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가 되었고,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탈바꿈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경제발전 요인으로 흔히 값싼 노동력, 정부의 효과적인 산업화와 수출진흥정책 등의 분석을 합니다. 그러나 값싼 노동력과 수출진흥정책은 당시 한국만 가진 우위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중남미나 아시아의 몇몇 나라들은 60년대나 7, 80년대에 한국 못지않은 잠재성과 경제성장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60년대 이후 지금까지 반세기에 걸쳐 꾸준한 경제성장을 거둔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이 가진 성공의 비결은 무엇 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분석이 있겠지만 저는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교육에 대한 투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요즘 자주 예를 들듯이 한국의 교육열은 공히 세계 최고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부뿐 아니라 학부모들의 열성적인 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의 산업화 초기에는 단순히 값싼 노동력뿐 아니라 질 좋은 노동력 창출에 큰 기여를 함으로써 한국의 초기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는 광범위한 초중등 교육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한국의 교육열이 단순히 초중등 과정에 머물지 않고 대학과정과 같은 고등교육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국의 모든 학부모들이 자녀를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열정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이것이 사회문제화 될 지경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한국의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적, 개인적 투자가 장기적으로는 초기 산업발전에 이어 한국 경제가 고부가가치 창출의 선진경제로 지속 성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한국 경제가 고도화, 첨단화 되는 과정에서 고급 연구 인력이나 관리자 등을 양성하여 이들이 제2의 도약을 견인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을 비롯한 한국의 대학은 한국경제가 필요로 하는 전문 관료, 기업인, 첨단 과학 및 기술자, 사회, 문화 전문인 등의 양성소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국이 경제성장 뿐 아니라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정치발전을 이루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80년대 산업화의 성장 속에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 간의 커다란 갈등이 생기자 대학을 중심한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양쪽의 대타협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그 결과 민주주의 직선제로의 전환을 이룬 87년 헌법 개정을 이루게 됩니다. 이후 87년 체제는 그 이전에 10차례의 헌법 개정이 일어난 것에 비해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대화합과 민주화를 유지하는 안정적인 체제의 기반을 제공하고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87년 사회 대타협이 10년 후 97년 아시아판 금융 및 외한위기가 찾아왔을 때 한국사회가 그 위기를 극복하고 또 한 차례의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한국의 고등교육은 2000년대 이후 한국경제가 선진 경제의 우수한 점을 효과적으로 벤치마킹함과 동시에 새로운 기술개발과 혁신을 주도하여 한국경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데 또 다른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새로운 기술과 혁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원천기술과 융합기술입니다. 일반적으로 융합기술 개발에 비해 원천기술 개발은 투자시간과 비용이 더 많이 필요하고, 상업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원천기술을 활용하여,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분야의 원천기술들을 서로 연계하여 관련 있게 만들면서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는 융합기술은 경제적 가치와 성공 가능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산업의 경계가 불투명해지고, 신기술, 신산업이 속속히 등장하며, 경쟁의 패턴이 빠르게 변하는 21세기에는 융합기술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랜 연구개발 기간이 필요한 원천기술에만 의존해서는 빠르게 변하는 산업환경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서울대학이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학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와 시대에 맞는 ‘상황적 진리’를 모두 연구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저는 작년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서울대학교가 나아갈 방향의 하나로 ‘선(善)한 인재상’의 정립을 제시하였습니다. 선의지(善意志, Guter Wille)가 충만한 인재를 양성해야 하고, 지식활동 또한 선의지로 충만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저는 또한 시대가 어려울 때일수록 낡은 인식과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패러다임에 입각한 시대정신(Esprit du temps)에 부응해야 할 역사적 소명도 강조했습니다. 이는 우리 시대에서 문제 해결에 필요한 상황적 진리를 연구하고 교육해야 한다는 책임을 의미한 것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여 학문의 세분화 시대를 맞이했지만, 21세기에는 이렇게 세분화된 학문을 다시 합치면서 더 큰 시너지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융합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은 시대의 변화와 사회의 수요에 따라 변화하고 진화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발전과 기술발전을 위한 대학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진 것입니다.
첫째, 대학은 기존의 최고기술을 제대로 교육시키는 동시에, 원천기술과 더불어 융합기술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학제 간 교류(interdisciplinary connections)와 융합이 더욱 활발히 추진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서울대학교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서울대학교에는 의대, 수의대, 약대, 농대, 자연대 등 생명공학과 관련된 모든 학과들이 있는데, 이들 학과들이 각자 자기분야에서 최고수준의 연구를 하고 있음은 물론 상호 밀접한 교류를 통해서 융합연구를 적극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는 대학원에 학문의 융합과 산학협동을 통한 융합기술의 개발을 목적으로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을 설립하였습니다. 학제 간 교류는 반드시 자연과학기술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융합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서울대학교는 자유전공학부를 신설하여 학문 간의 벽을 허물면서 시대적 요구에 필요한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고 있습니다.
둘째, 학제 간 융합을 국제간 교류(international connections)로 확대시키면 효율성을 더욱 높일 수 있습니다. 학문의 내용이 깊어지고 폭이 넓어지면서 특정 국가나 대학에서 이를 모두 효과적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제적 차원에서 학제 간 교류가 필요합니다.
서울대학교의 예를 들면, 세계 각국의 유수한 대학들과 과학기술적 교류는 물론 사회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늘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화 방향은 학제적 접근과 결합하여 더욱 넓은 범위의 통합학문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국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개의 전공분야가 아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법률을 아우르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서울대학교는 국제대학원을 설립하고, 국제문제를 통합적으로 교육하고 연구하는 ‘학제적 국제학(interdisciplinary international studies)’인 사회과학의 융합학문을 발전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융합전략은 자연과학분야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분야로까지 영역을 넓히고 국제화 전략을 통해 융합의 지리적 범위도 넓혀야 합니다. 이와 관련되어 효율적인 교육과 깊이 있는 연구를 담당해야 할 최고 고등교육연구기관인 대학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대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다양한 기술이 집합되고 새롭게 융합되는 플랫폼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다양해 보이지만 자연과학기술이건, 사회과학기술이건 모두 기술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최고기술을 습득하고, 새로운 원천기술을 만들어 내거나 또는 융합기술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교육 또는 산업현장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기술혁신(innovation) 또는 연구개발(R&D) 통계자료에서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기술혁신 관련 데이터는 주로 새로운 자연과학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사례만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제발전과의 관계, 그리고 대학의 역할을 제대로 측정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기술에 자연과학적 기술뿐 아니라 사회과학적 기술을 포함하면, 다방면의 학문을 다루고 있는 대학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 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활용을 위한 대학의 역할을 고려할 때 대학에 대한 투자는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현 시대가 요구하는 융복합기술은 기업 자체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에 대학과 정부가 함께 협력해서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직접적인 공헌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정부가 대학의 교육과 연구에 지원을 주저한다면 제대로 된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가 없습니다. 사회발전의 최후의 보루는 대학입니다. 대학은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최고 고등교육연구기관인 대학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여 정부와 사회가 함께 가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