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과제 (2006.5.4)
등록일: 2009. 7. 6. 조회수: 24731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과제
정운찬 (서울대학교 총장)
1. 한국의 미래 발전, 강소(중)국이 해결책이다.
작년, 즉 2005년은 우리나라가 독립해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한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는 그동안 질곡의 역사를 경험하고 이제 선진국이란 성(城)문 앞에 서 있다.
환갑을 맞은 대한민국의 과거사를 잠시 살펴보자. 건국, 6·25 전쟁,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건설, 석유파동, 교육평준화, 10·26 사태와 6·10항쟁, 88올림픽, OECD 가입, IMF 차관, 남북정상 회담, 2002년 월드컵 개최,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위헌판결 등 참으로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겪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가 1백년 이상 걸린 산업화를 겨우 40여년 만에 달성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고, 정치적으로 볼 때 적어도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제도가 뿌리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괄목할 만한 발전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동안의 고도성장이 일부 대기업들의 힘에 의존해온 부분이 많았으며, 중산층은 점차 붕괴되고, IMF사태 이후 서민들은 생존권까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자녀양육에 대한 큰 부담감으로 인해 출산을 기피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저출산국이 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동안 우리사회가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루었을 뿐 정작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실천적 능력은 여전히 미성숙하다는 의견이 많다.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가고 있음에도 그러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결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약한 체력에는 무리한 수술과 극약처방보다는 기초 체력부터 탄탄하게 다져주는 것이 필요하듯이, 우리 사회도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치관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가치관을 토대로 우리는 어떠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은, 비록 규모에서는 세계 1위가 아니더라도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우리 사회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는 강건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초고속성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력을 구비하며, 다른 나라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인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즉,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강한 실력을 갖춘 `강소국가(强小國家)'또는 `강중국가(强中國家)'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일류국가의 모습이다.
작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혔던 아일랜드가 바로 대표적인 강소국이다. 불과 10~20년 전만하더라도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났던 척박한 아일랜드가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강소국이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방식, 또 일관된 정책'이라고 분석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용적인 사고방식, 정권은 바뀌어도 한결같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 훌륭한 인적자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적자본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교육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한 걸음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정체와 퇴보의 늪에 빠져들 것인가 하는 전환기의 기로에서, 교육의 문제에 더 큰 관심과 고민을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대학교육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커다란 자원인 인적자본을 양성하는 대학의 책무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대학교육은 기본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예측하여 지속적인 사회발전의 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국가의 지적 자산을 산출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 나아가 국가운영과 경제 안정을 위한 적절한 방안을 개발하고, 사회전반의 유기적 의사소통과 사회복지를 증진하는 데도 기여해야 한다.
한편, 시민사회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가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대학의 책임과 역할은 더욱 강조되는 추세다. 대학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창의적 지식을 습득하며,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감,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교육은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대학은 고등교육의 막중한 책무에 걸맞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으며 그 여건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고등교육이 시대의 요구에 따르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고등교육이 직면해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대학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감당해온 역할을 살펴보자. 1970년만 해도 8.4%에 불과하던 한국의 고등교육 취학률은 21세기에 들어 80%이상으로 열 배나 늘어나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을 공급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대학은 고도성장의 시대가 요구했던 사회적 역할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의 대학은 산업에서 자주 발생하는 ‘규모의 경제’가 고등교육에도 적용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왔다. ‘대학규모를 키우고 학생수를 늘리면 교육서비스의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양적 팽창을 추구해온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한국의 대학은 4년제 대학이 200개, 전문대학이 160개로 증가하였고, 전 인구 대비 대학생 수는 4.07%에 달해 세계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교육은 ‘너무 커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버렸다. 대학의 양적 팽창이 가져온 부작용은 실로 심각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대학의 질적 수준은 점차 하락하였고, 이는 대학생의 전반적인 기초학력 저하라는 현상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IMF 구제금융 후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그 결과 경제의 투명성이 상당히 제고되면서 부실을 걸러내는 기본 장치가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당시의 구조조정은 적자생존의 원칙 적용과 투명한 경영을 통해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대학교육은 위기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채 구조조정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대학이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치고 자기만족에 안주함으로써 이제 한국의 대학개혁은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은 많이 드는 버거운 과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앞으로는 양질의 교육여건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 역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대학의 구조조정은 대학의 생존을 위해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다가와 있다.
3. 한국 고등교육 개혁의 과제와 방향
지금 세계는 지식기반사회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우수한 교육을 받은 인적 자원과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이 곧 한 나라의 정신적·물질적 자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평생직장의 통념이 무너지고 있는 오늘날,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종전처럼 정형화된 지식을 전수받는 것만으로는 미래사회의 복잡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대학은 더 이상 기성지식의 전수기관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길러내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이 장차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평생 동안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며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든든한 잠재역량을 키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대학은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학혁신은 이런 전제에서 대학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국의 고등교육이 추구해야 할 개혁의 과제는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의 측면에서, 그리고 세부적으로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 및 핵심 연구역량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방향: 대학규모의 축소와 대학별 특성화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원칙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할 능력을 갖춘 대학만이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대학만이 양질의 인적자본을 생산해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과 합리적 절차에 따라 대학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로써 전체적인 교육의 효율성과 수월성이 제고되어 수준 높은 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정부나 사회에서 확보할 수 있는 교육재원이 대학의 기대치에 비해 너무나 취약한 반면, 등록금을 마냥 올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내실 있고 효율적인 교육체계를 갖추려면 우선 대학의 규모를 축소하는 데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대학규모의 축소가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이 되어야 하는 근거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높은 한국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을 들 수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구태의연한 교육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지식의 창출은커녕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기 어렵다. 학생들은 단지 익명의 수강생 가운데 한 명으로 수업에 임하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기대하기 힘들고 창의적인 학습과정을 체험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수동적인 지식전달 교육만 받은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했을 때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대학 구조조정의 또 다른 축은 대학별 특성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거의 비슷한 학제, 대동소이한 내용의 교육을 하고 있다. 지역균형 발전의 취지에서 지방대학을 육성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전국 모든 지역의 대학들이 엇비슷한 성격과 규모의 대학을 유지한다면 소모적 경쟁과 자원의 낭비만 초래할 뿐이다. 균형적 발전이란 지역별 입지여건과 특성에 맞게 각 지역이 서로 다른 부문에서 고르게 비교우위를 가질 때만 제대로 성취될 수 있다.
학사과정 뿐 아니라 석․박사과정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한 대학이 대학원을 확충하면 다른 대학들도 이를 답습하여 국내 대학원 학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박사학위를 받고도 안정된 교육 및 연구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박사 실업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인적 자원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균등화된 대학체제로는 다원화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를 효과적으로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2) 교육의 질적 향상: 기초교육 강화를 통한 전문교육의 내실화
지식전수의 교육에서 지식 창출의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초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날 대학의 기초교육은 전공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형식적 요건 정도로 소홀히 취급되어 전공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은 자기 분야밖에 모르는 편협한 근시안적 인간으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이 직접적인 효용을 다했을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전문지식을 확대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기초교육의 방치는 결과적으로 전문지식의 부실을 초래한 것이다.
많은 기업이 현장에 당장 투입해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인재를 요구하며 대학교육의 부실을 비난한다는 보도가 많다. 그러나 사려 깊은 기업경영인들에게 직접 들어보면 일부 언론에 보도된 통념과는 달리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술 자체보다는 훌륭한 의사소통 능력, 변화에 적응하고 평생 동안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건강한 시민의식, 남을 배려하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인간적 품성, 세계를 보는 폭넓은 시야 등을 기업이 원하는 인재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꼽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을 글로벌 인재라고 일컫는데, 이는 반드시 외국어를 잘 하거나 다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글로벌 인재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현지인들과 잘 적응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것은 세계공통재능, 즉 상식과 교양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이를 말한다.
이제부터라도 한국의 대학은 ‘general’ education이라는 말의 본래 취지에 걸맞게, 학생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배우고 전문교육의 기초를 다지는 동시에 바르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총체적’ 기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대학은 기초교육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제의식을 계발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스스로 학습하고 창의적 학습체험을 설계할 수 있도록, 산파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서울대학교는 지난 2002년부터 인문학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핵심교양 과목군을 설정하여, 학생들이 반드시 자기 전공분야 이외의 다른 영역의 교과목을 일정수 이상 이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능력이자 성숙한 지성인이 되기 위한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글쓰기와 말하기 과목을 새로 개설하고, 학생들의 글쓰기 과정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에 대해 직접 상담해주는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모든 핵심교양 과목에 석․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을 글쓰기 수업조교로 배치하여 글쓰기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작년에 개설된 프레쉬맨 세미나 역시 학문간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학생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다.
다른 한편 학생들에게 사회적 책임감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길러주기 위해 정식 교과과정에 봉사활동을 도입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사회봉사활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봉사활동은 대학이 사회로부터 받는 지원의 반대급부로서, 대학이 외면할 수 없는 일정의 사회적 의무에 속한다. 또한 학생들이 공부가 단지 개인의 영달만이 아니라 장차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는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면, 학업의 성취동기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3) 핵심 연구역량의 강화: 첨단분야와 기초학문의 균형 육성
한국대학의 연구역량은 취약한 연구기반에 비하면 괄목하게 성장하였다. 한국 대학 전체의 연구성과를 합치면 국가별로는 국민총생산의 순위에 버금가는 세계 13위 수준에 도달했다. 서울대는 SCI에 등재된 논문의 수로는 지난 2004년 세계 31위로, 유럽 대학과 비교하면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만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비슷한 규모의 미국 주립대학에 투입되는 예산에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한 기반에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등교육은 아직도 양적인 성장에 그치고 있을 뿐, 질적인 도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이다. 한국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내실화로 도약할 기로에 서 있듯, 핵심 연구역량 역시 질적인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핵심분야에 대해 과감한 지원육성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울대는 현재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교육의 질적 강화를 위해 대학(원)생 정원을 줄이는 한편, 작년부터 1700명의 대학원생들에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 전액과 최소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교수들의 연구여건 개선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지만, 당분간 대학운영의 제반경비를 절감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연구여건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다.
4. 차별화와 자율화가 대학이 살 길이다
대학이 바뀌기 위해서는 먼저 대학들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최상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대학은 단지 사회의 기능적 일부가 아니라 국가발전을 선도하고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학만의 힘으로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의 대학이 세계적 수준의 교육과 연구를 성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부와 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 정부와 사회에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요청한다.
(1) 재정적 지원과 투자가 절실하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중요한 생산요소를 생산하는 부분이다. 재정적인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된다면, 양질의 인적자본을 확충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이는 다시 연구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2) 현재 일부 분야에만 치우쳐 있는 연구지원 체계를 개선하여 다양한 분야들이 서로 유기적 상승효과를 낼 수 있도록 균형 있는 종합적 지원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고급지식 창출을 위해 필요한 연구에 대해서는 연구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3) 기초학문 분야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날로 커지는 취업난의 여파로 학생들은 기초학문 분야를 외면하고 당장에 필요한 자격증 획득에 유리한 분야로만 몰리고 있다. 이런 현상이 계속 방치된다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연구역량을 강화하는 데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4) 대학은 더 큰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유능한 학생과 교수들을 유치하고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 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어 차별화된 특성을 키워나간다면 굳이 인재들이 해외로 나갈 이유도 없다. 교수들의 연구 측면에서도 해당 연구단위의 운용은 외부로부터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교육과 연구와 행정에서 최대한의 자율을 허용할 때 시대환경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양질의 교육과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강소(중)국을 지향하는 나라에서 경쟁력의 원천은 바로 인적자원이다. 인적자원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고등교육인 만큼,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 정부의 지원과 관심은 아낌이 없어야 한다. 또한 대학은 이를 바탕으로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조화롭게 발전시키고, 자율적이고 차별화된 교육 서비스를 통해 튼실한 인적 하부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선진국이란 성안에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정운찬 (서울대학교 총장)
1. 한국의 미래 발전, 강소(중)국이 해결책이다.
작년, 즉 2005년은 우리나라가 독립해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한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는 그동안 질곡의 역사를 경험하고 이제 선진국이란 성(城)문 앞에 서 있다.
환갑을 맞은 대한민국의 과거사를 잠시 살펴보자. 건국, 6·25 전쟁,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경부고속도로 건설, 석유파동, 교육평준화, 10·26 사태와 6·10항쟁, 88올림픽, OECD 가입, IMF 차관, 남북정상 회담, 2002년 월드컵 개최,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위헌판결 등 참으로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겪었다. 그 결과 경제적으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가 1백년 이상 걸린 산업화를 겨우 40여년 만에 달성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고, 정치적으로 볼 때 적어도 겉으로는 민주주의의 제도가 뿌리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나라의 괄목할 만한 발전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그동안의 고도성장이 일부 대기업들의 힘에 의존해온 부분이 많았으며, 중산층은 점차 붕괴되고, IMF사태 이후 서민들은 생존권까지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자녀양육에 대한 큰 부담감으로 인해 출산을 기피하면서 우리나라는 세계 1위의 저출산국이 되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동안 우리사회가 제도적인 민주화를 이루었을 뿐 정작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실천적 능력은 여전히 미성숙하다는 의견이 많다. 사회 각계각층의 갈등의 골이 깊어져 가고 있음에도 그러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은 아직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그럴듯한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결코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약한 체력에는 무리한 수술과 극약처방보다는 기초 체력부터 탄탄하게 다져주는 것이 필요하듯이, 우리 사회도 보다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가치관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가치관을 토대로 우리는 어떠한 미래 사회의 모습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이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 사회의 모습은, 비록 규모에서는 세계 1위가 아니더라도 국민 대다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우리 사회에 건강한 활력을 불어넣는 강건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초고속성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경제력을 구비하며, 다른 나라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인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즉,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강한 실력을 갖춘 `강소국가(强小國家)'또는 `강중국가(强中國家)'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일류국가의 모습이다.
작년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에 의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꼽혔던 아일랜드가 바로 대표적인 강소국이다. 불과 10~20년 전만하더라도 국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났던 척박한 아일랜드가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강소국이 된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방식, 또 일관된 정책'이라고 분석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실용적인 사고방식, 정권은 바뀌어도 한결같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힘은 무엇보다 훌륭한 인적자원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적자본을 개발하는 것이 바로 교육에 달려 있다. 우리가 한 걸음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시 정체와 퇴보의 늪에 빠져들 것인가 하는 전환기의 기로에서, 교육의 문제에 더 큰 관심과 고민을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대학교육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커다란 자원인 인적자본을 양성하는 대학의 책무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대학교육은 기본적으로 시대의 변화를 올바르게 읽어내고 예측하여 지속적인 사회발전의 동력을 제공하는 한편, 국가의 지적 자산을 산출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 나아가 국가운영과 경제 안정을 위한 적절한 방안을 개발하고, 사회전반의 유기적 의사소통과 사회복지를 증진하는 데도 기여해야 한다.
한편, 시민사회와 시장경제에 대한 신뢰가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면서, 대학의 책임과 역할은 더욱 강조되는 추세다. 대학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잠재력을 계발하고 창의적 지식을 습득하며,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감,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기르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교육은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의 대학은 고등교육의 막중한 책무에 걸맞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으며 그 여건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고등교육이 시대의 요구에 따르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내실을 다지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고등교육이 직면해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대학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감당해온 역할을 살펴보자. 1970년만 해도 8.4%에 불과하던 한국의 고등교육 취학률은 21세기에 들어 80%이상으로 열 배나 늘어나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을 공급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대학은 고도성장의 시대가 요구했던 사회적 역할을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의 대학은 산업에서 자주 발생하는 ‘규모의 경제’가 고등교육에도 적용된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왔다. ‘대학규모를 키우고 학생수를 늘리면 교육서비스의 원가를 절감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양적 팽창을 추구해온 것이다. 그 결과 지금 한국의 대학은 4년제 대학이 200개, 전문대학이 160개로 증가하였고, 전 인구 대비 대학생 수는 4.07%에 달해 세계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교육은 ‘너무 커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버렸다. 대학의 양적 팽창이 가져온 부작용은 실로 심각하다. 1990년대 이후 한국대학의 질적 수준은 점차 하락하였고, 이는 대학생의 전반적인 기초학력 저하라는 현상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IMF 구제금융 후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그 결과 경제의 투명성이 상당히 제고되면서 부실을 걸러내는 기본 장치가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 당시의 구조조정은 적자생존의 원칙 적용과 투명한 경영을 통해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대학교육은 위기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채 구조조정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대학이 구조조정의 시기를 놓치고 자기만족에 안주함으로써 이제 한국의 대학개혁은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은 많이 드는 버거운 과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앞으로는 양질의 교육여건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 역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대학의 구조조정은 대학의 생존을 위해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박한 과제로 다가와 있다.
3. 한국 고등교육 개혁의 과제와 방향
지금 세계는 지식기반사회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우수한 교육을 받은 인적 자원과 이들이 생산하는 지식이 곧 한 나라의 정신적·물질적 자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사회 어느 분야에서나 평생직장의 통념이 무너지고 있는 오늘날,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종전처럼 정형화된 지식을 전수받는 것만으로는 미래사회의 복잡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
대학은 더 이상 기성지식의 전수기관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길러내는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이 장차 어떤 직종에 종사하든, 평생 동안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며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든든한 잠재역량을 키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의 대학은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학혁신은 이런 전제에서 대학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하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한국의 고등교육이 추구해야 할 개혁의 과제는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의 측면에서, 그리고 세부적으로 고등교육의 질적 향상 및 핵심 연구역량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방향: 대학규모의 축소와 대학별 특성화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원칙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할 능력을 갖춘 대학만이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능력 있는 대학만이 양질의 인적자본을 생산해낼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경쟁과 합리적 절차에 따라 대학의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로써 전체적인 교육의 효율성과 수월성이 제고되어 수준 높은 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다.
하지만 정부나 사회에서 확보할 수 있는 교육재원이 대학의 기대치에 비해 너무나 취약한 반면, 등록금을 마냥 올릴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내실 있고 효율적인 교육체계를 갖추려면 우선 대학의 규모를 축소하는 데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
대학규모의 축소가 대학 구조조정의 기본방향이 되어야 하는 근거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높은 한국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을 들 수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구태의연한 교육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지식의 창출은커녕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기 어렵다. 학생들은 단지 익명의 수강생 가운데 한 명으로 수업에 임하기 때문에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기대하기 힘들고 창의적인 학습과정을 체험할 기회를 가질 수 없다. 이렇게 수동적인 지식전달 교육만 받은 학생들이 장차 사회에 진출했을 때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대학 구조조정의 또 다른 축은 대학별 특성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다수 대학들은 거의 비슷한 학제, 대동소이한 내용의 교육을 하고 있다. 지역균형 발전의 취지에서 지방대학을 육성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전국 모든 지역의 대학들이 엇비슷한 성격과 규모의 대학을 유지한다면 소모적 경쟁과 자원의 낭비만 초래할 뿐이다. 균형적 발전이란 지역별 입지여건과 특성에 맞게 각 지역이 서로 다른 부문에서 고르게 비교우위를 가질 때만 제대로 성취될 수 있다.
학사과정 뿐 아니라 석․박사과정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한 대학이 대학원을 확충하면 다른 대학들도 이를 답습하여 국내 대학원 학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 박사학위를 받고도 안정된 교육 및 연구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박사 실업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인적 자원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였다.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균등화된 대학체제로는 다원화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를 효과적으로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2) 교육의 질적 향상: 기초교육 강화를 통한 전문교육의 내실화
지식전수의 교육에서 지식 창출의 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초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그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지난날 대학의 기초교육은 전공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형식적 요건 정도로 소홀히 취급되어 전공과정을 이수한 학생들은 자기 분야밖에 모르는 편협한 근시안적 인간으로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이 직접적인 효용을 다했을 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전문지식을 확대 재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기초교육의 방치는 결과적으로 전문지식의 부실을 초래한 것이다.
많은 기업이 현장에 당장 투입해 활용할 수 있는 맞춤형 인재를 요구하며 대학교육의 부실을 비난한다는 보도가 많다. 그러나 사려 깊은 기업경영인들에게 직접 들어보면 일부 언론에 보도된 통념과는 달리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술 자체보다는 훌륭한 의사소통 능력, 변화에 적응하고 평생 동안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건강한 시민의식, 남을 배려하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인간적 품성, 세계를 보는 폭넓은 시야 등을 기업이 원하는 인재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꼽고 있다. 세계시장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을 글로벌 인재라고 일컫는데, 이는 반드시 외국어를 잘 하거나 다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글로벌 인재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현지인들과 잘 적응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것은 세계공통재능, 즉 상식과 교양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이를 말한다.
이제부터라도 한국의 대학은 ‘general’ education이라는 말의 본래 취지에 걸맞게, 학생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을 배우고 전문교육의 기초를 다지는 동시에 바르게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총체적’ 기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대학은 기초교육을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문제의식을 계발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스스로 학습하고 창의적 학습체험을 설계할 수 있도록, 산파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서울대학교는 지난 2002년부터 인문학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는 핵심교양 과목군을 설정하여, 학생들이 반드시 자기 전공분야 이외의 다른 영역의 교과목을 일정수 이상 이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능력이자 성숙한 지성인이 되기 위한 의사소통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글쓰기와 말하기 과목을 새로 개설하고, 학생들의 글쓰기 과정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에 대해 직접 상담해주는 글쓰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모든 핵심교양 과목에 석․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을 글쓰기 수업조교로 배치하여 글쓰기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작년에 개설된 프레쉬맨 세미나 역시 학문간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문제의식을 학생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다.
다른 한편 학생들에게 사회적 책임감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길러주기 위해 정식 교과과정에 봉사활동을 도입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사회봉사활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봉사활동은 대학이 사회로부터 받는 지원의 반대급부로서, 대학이 외면할 수 없는 일정의 사회적 의무에 속한다. 또한 학생들이 공부가 단지 개인의 영달만이 아니라 장차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는 책임감을 느끼도록 한다면, 학업의 성취동기를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3) 핵심 연구역량의 강화: 첨단분야와 기초학문의 균형 육성
한국대학의 연구역량은 취약한 연구기반에 비하면 괄목하게 성장하였다. 한국 대학 전체의 연구성과를 합치면 국가별로는 국민총생산의 순위에 버금가는 세계 13위 수준에 도달했다. 서울대는 SCI에 등재된 논문의 수로는 지난 2004년 세계 31위로, 유럽 대학과 비교하면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만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비슷한 규모의 미국 주립대학에 투입되는 예산에 훨씬 못 미치는 열악한 기반에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이룬 것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등교육은 아직도 양적인 성장에 그치고 있을 뿐, 질적인 도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이다. 한국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내실화로 도약할 기로에 서 있듯, 핵심 연구역량 역시 질적인 도약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핵심분야에 대해 과감한 지원육성책이 절실히 필요하다.
서울대는 현재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교육의 질적 강화를 위해 대학(원)생 정원을 줄이는 한편, 작년부터 1700명의 대학원생들에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 전액과 최소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교수들의 연구여건 개선을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재원이 필요하지만, 당분간 대학운영의 제반경비를 절감함으로써 단계적으로 연구여건을 개선하는 데 힘쓰고 있다.
4. 차별화와 자율화가 대학이 살 길이다
대학이 바뀌기 위해서는 먼저 대학들 스스로 현실을 직시하고 최상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대학은 단지 사회의 기능적 일부가 아니라 국가발전을 선도하고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내는 곳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학만의 힘으로 그런 목적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다. 한국의 대학이 세계적 수준의 교육과 연구를 성취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부와 사회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런 취지에서 우리 정부와 사회에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요청한다.
(1) 재정적 지원과 투자가 절실하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인적 자본(Human Capital)이라는 중요한 생산요소를 생산하는 부분이다. 재정적인 투자가 지속적으로 확대된다면, 양질의 인적자본을 확충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이는 다시 연구의 질적 수준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2) 현재 일부 분야에만 치우쳐 있는 연구지원 체계를 개선하여 다양한 분야들이 서로 유기적 상승효과를 낼 수 있도록 균형 있는 종합적 지원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고급지식 창출을 위해 필요한 연구에 대해서는 연구의 전 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3) 기초학문 분야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날로 커지는 취업난의 여파로 학생들은 기초학문 분야를 외면하고 당장에 필요한 자격증 획득에 유리한 분야로만 몰리고 있다. 이런 현상이 계속 방치된다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연구역량을 강화하는 데 심각한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4) 대학은 더 큰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유능한 학생과 교수들을 유치하고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 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운영되어 차별화된 특성을 키워나간다면 굳이 인재들이 해외로 나갈 이유도 없다. 교수들의 연구 측면에서도 해당 연구단위의 운용은 외부로부터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교육과 연구와 행정에서 최대한의 자율을 허용할 때 시대환경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양질의 교육과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강소(중)국을 지향하는 나라에서 경쟁력의 원천은 바로 인적자원이다. 인적자원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고등교육인 만큼,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 정부의 지원과 관심은 아낌이 없어야 한다. 또한 대학은 이를 바탕으로 기초학문과 실용학문을 조화롭게 발전시키고, 자율적이고 차별화된 교육 서비스를 통해 튼실한 인적 하부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선진국이란 성안에 들어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