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와 한국경제 (2006.4.19)
등록일: 2009. 7. 6. 조회수: 27732
세계화와 한국경제
정운찬 (서울대학교 총장)
1. 들어가며 - 세계화와 한국경제의 변화
세계화(globalization)는 1990년대 이후 두드러진 전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글로벌 스탠더드, 무한경쟁, 투명한 경영, 수익성 중시, 시장주의, 인센티브 등이 세계화를 묘사하는 단어들인데, 이 세계화 추세는 개방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뿐 아니라 폐쇄적인 경제에까지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마치 컴퓨터와 인터넷 같은 커다란 기술혁신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변화에 적응하도록 강요하고,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기술혁신의 경우, 컴퓨터가 도입되기 전에는 비슷한 생활수준으로 생활하던 사람들도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이에 적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누어지고, 후자의 경우 직․간접적으로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컴퓨터를 필요로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예외를 허용치 않고 이러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주판을 충분히 잘 이용해서 컴퓨터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 역시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주판 기술의 급격한 시장가치 하락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것을 직접 필요로 하든 그렇지 않든 기술혁신은 그 모든 이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속도 역시 가속화되어, 뒤늦게나마 새 기술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더라도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여 도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계화도 기술혁신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적응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것에 실패한 경제주체는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도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세계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시한 채 불투명한 경영을 일삼다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신을 초래하여 급격한 외화유출을 초래한 이 위기는, 우리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형성해 온 중진국 형 경제체제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파고에 휩쓸려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혹한 처벌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이제 세계화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그 교훈은 한국경제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스탠더드, 무한경쟁, 수익성, 시장주의 등을 강조하는 흐름이 뚜렷해졌습니다. 그 결과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많이 개선되었고 금융기관들의 부실도 상당부문 정리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되면서 예상치 않았던 부작용들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억대 연봉자가 늘어난 반면 중산층이 무너져 소득계층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경제 전반에 보수적이고 안전 지향적 경향이 만연하여 위험기피와 투자부진을 유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기업이나 금융 모두 위험부담(risk taking)을 꺼리면서 경제가 축소 지향적인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출산율의 저하도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현재 우리나라는 이와 같은 변화에 적절히 적응한 경제주체와 적응기회를 놓친 경제주체들 사이에 양극화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화에 수반되는 급격한 환경변화가 불확실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주체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욱 위험 회피적인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2. 세계화 파고 속의 한국경제 -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나라의 대응전략을 살피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로 인한 부작용이 왜 이렇게 심각한지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로는 크게 우리나라가 세계화에 수반되는 암묵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인센티브와 조정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세계화에 수반되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의 부족
세계화는 실제로 선진국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현재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진통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선진국의 기술이 후진국에 도입될 때 발생하는 어려움과도 유사한데, 이것은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공장에서 특정 기계를 만들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외국으로부터 청사진을 수입한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청사진은 새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계를 만들고 이용하는 과정에서는 설계도에 담을 수 없는 정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나사를 조일 때 어느 정도로 세게 조여야 하는지, 또 기계가 잘 돌아가려면 주변 환경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기계를 잘 만들고 이용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정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선진기술을 활용하는 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암묵적 지식이라 합니다.
세계화 과정도 기계를 도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재 우리는 세계화가 제시하는 청사진, 즉 시장주의나 무한경쟁 등을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수용해가고 있으나 그것을 적절히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암묵적 지식은 아직 습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암묵적 지식이 체화된 선진국의 경우, 경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재기할 기회를 주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에 따라 교육기회를 제공하거나 취업을 지원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적절히 구비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유럽에서는 정부의 공공지출을 중심으로, 미국에서는 공공지출과 개인의 기부금 등을 중심으로 지난 수 십 년간 여러 가지 안전장치들을 구축해 온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나라들에서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법적․제도적인 장치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습에 뿌리내린 관행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쟁”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암묵적인 사회적 안전장치의 토대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들이 없다면 경쟁은 더 이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밀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위험기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어야 사람들이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고자 할 것입니다. 줄타기를 시킬 때, 그물도 설치해주지 않고 빨리 줄을 타보라고 내몬다면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업들로 하여금 경쟁력 확보를 위해 연구개발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금융부문 등이 그 위험을 적절히 통합하고 분산하여 관리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야만 각 경제주체가 세계화 추세 속에서 무작정 위험을 기피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청사진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새로운 매커니즘의 작동에 필요한 암묵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늦기 때문에 세계화의 부작용을 초래한 것입니다.
(2) 인센티브와 조정(coordination)
다음으로 세계화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의 하나인 인센티브와 조정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인센티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개인과 조직의 인센티브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지목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들 중에도 경제학의 핵심이 바로 인센티브며 그 이외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인센티브가 경제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센티브 그 자체뿐만 아니라, 개별 경제주체들 간에 인센티브를 어떻게 조정하는지의 문제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인센티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이 두 가지의 균형이 무너지고 조정실패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제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각 경제주체의 인센티브와 이들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마치 나무와 숲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확대한 것이 숲이 되지 않듯이, 미시적인 의사결정과 그것들이 거시적 영역에서 조정된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즉, 개별 경제주체들의 행위들은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뜻밖의 성질(emergent properties)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은행들이 부실을 줄여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추기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을 꺼리는 경우, 한편으로 그것은 부실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려, 역으로 은행들의 영업환경을 나쁘게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윈-윈 게임과 정반대의 현상이 바로 이러한 조정 실패인 것입니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한국경제도 나름대로 튼튼한 조정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금융-재벌의 삼각 유착관계로 이루어진 위험분담체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재벌이 과감하게 투자하면 정부가 금융지원을 통해서 위험을 분담해왔고, 이는 재벌의 투자위험을 전 국민이 지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은 경제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과잉 중복투자 등의 비효율을 가져왔고, 무엇보다 세계화 추세 속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상반되는 것이기에 이제는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조정메커니즘이 폐기된 이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이 확립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문제의 핵심입니다.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으며 많은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조정 매커니즘을 만든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암묵적 지식을 쌓는 작업, 또는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확립하는 작업입니다. 사회적 학습은 전 국민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는 장기적인 작업입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유착메커니즘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나타나겠지만, 이미 우리 경제가 너무 커졌기에 이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70년대에 PC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20년 이상의 오랜 적응 과정이 결국 90년대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분석과 같이, 세계화와 같은 경제․사회의 본질적인 변화에 대응해서 새로운 조정 장치를 확립하는 데에는 그 이상의 장기간의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정 장치를 확립한 이후의 결과는 아주 밝을 것입니다.
3. 한국경제,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경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화에 대응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조정 장치를 확립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보다 적극적인 인적투자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대응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조정장치의 확립
한국경제가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바로 새로운 조정 장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조정장치란 앞서 언급했듯이, 설계도면에 잘 나와 있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암묵적 지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연구되고 있는 사회 자본(social capital)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정 장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구성원들 간의 신뢰, 내가 상대방에게서 기대하는 행동이 실제로도 어긋나지 않는 것, 적절한 이타심(altruism)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좀 더 앞날을 내다보는 자세 등이 바로 이 사회 자본을 이루는 요소들이며, 이러한 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윈-윈 게임을 도출하는 방향으로 경제주체들의 인센티브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세계화에 수반된 문제들, 예컨대 양극화나 지나친 위험기피 등도 사회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한 경쟁과 경쟁탈락자에 대한 배려가 체계적으로 보장된다면 사회통합도 좀 더 용이할 것이며, 경제주체들 간의 신뢰가 충분하다면 불확실성이 줄어들어 지나친 위험기피 문제도 많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법과 제도의 확립이 중요합니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고 사회의 합의를 어긴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해야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조정 장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컨대, 회계부정을 저질렀을 때 미국에서는 단호한 처벌을 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사례도 있으며, 경제적 강자는 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고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사회 구성원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도 발전적으로 조정하기도 곤란할 것입니다.
사실 세계화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 쉽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갈등을 잘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세계화 이전에는 비슷한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지내던 사람들도 세계화 과정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이 공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잘 관리하고 사회 자본을 축적하는 데에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멸이 아니라 윈-윈을 선택하게 하려면 리더가 나서서 윈-윈이 가능하다는 데에 대한 확신과 함께 조정결과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한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처럼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개인의 단기적인 이득을 추구하다가 공멸하곤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장기적으로 모두 이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경제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을 줄여서 투자를 늘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세계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 인간에 대한 투자
다음으로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세계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잘 이용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법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성장 동력인, 인간에 대한 투자를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세계화된 세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혁신이 이익 창출의 원천이 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천문학적 규모의 이익이나 새로운 컴퓨터 칩, 좋은 영화 한 편이 벌어들이는 이익은 모두 창의적 인재들의 머릿속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창의적 인재를 키우는 데에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대학교육입니다. 그러므로 대학교육의 성패가 나라의 장래를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대학은 아직은 세계화 시대의 고등교육의 막중한 책무에 상응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 여건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그동안 한국의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대학규모를 키우고 학생 수를 늘리는 데 집중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지금 한국의 대학은 4년제 대학이 200개, 전문대학이 160개로 팽창하였고, 대학생 수는 전 인구의 4.07%로 세계 최고규모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대학의 양적 팽창이 가져온 부작용은 매우 심각합니다. 1990년대 이후 한국대학의 수준은 점차 하락해서 대학생의 전반적인 기초학력이 저하되었으며, 연구실적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질적 측면에서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인센티브와 조정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인센티브 또는 시장적 해결방식은 구조조정과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나, 대학은 위기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채 구조조정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양질의 교육여건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 역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대학 구조조정은 대학규모의 축소를 수반해야 할 것입니다. 즉, 교육재원이 취약한 현실에서 내실 있고 효율적인 교육체계를 갖추려면 우선 대학의 규모를 축소하는 데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한국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높은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는 지식의 창출은커녕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핵심 분야의 역량 강화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과감한 지원육성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대학원생들에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하고, 교수들의 연구여건 개선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하는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조정 측면에서 대학 구조조정은 대학별 특성화와 기초연구의 강화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인적투자에 대해서는 조정실패가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컨대, 고교 평준화의 경우 정책의 의도는 교육기회의 평등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거주 지역에 따른 교육기회의 질적 격차를 가져와서 교육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념과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교육에 대한 지나친 투자 역시 일종의 조정 실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교육에서도 조정실패의 폐해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전국 모든 지역에서 엇비슷한 성격과 규모를 유지하고 있어서 소모적 경쟁과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의 경우도 과거에는 한 대학이 대학원을 확충하면 다른 대학들도 이를 답습하여 국내 대학원 학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 결과 박사학위를 받고도 안정된 교육 및 연구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박사 실업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인적 자원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정실패를 극복하고 균형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별 입지여건과 특성에 맞게 각 지역이 서로 다른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균등화된 대학체제로는 다원화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를 효과적으로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기초교육 강화를 들 수 있습니다. 기초교육과 기초연구는 장기적으로 지식 창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시장에서 그 가치가 정확히 평가되지 않는 성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비시장적 조정을 통해서 이 부문을 육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화 시대에는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응용지식보다 훌륭한 의사소통 능력, 변화에 적응하고 평생 동안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건강한 시민의식, 남을 배려하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인간적 품성, 세계를 보는 폭넓은 시야 등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국가 발전전략의 관점에서 대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의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경제가 발전할수록 개발연구에 비해 기초연구가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효과가 더욱 크다고 합니다. 즉, 똑같은 예산을 즉시 상업화할 수 있는 항목에 투자하는 것보다 당장은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기초연구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더 높인다는 것입니다. 교수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와 연구 결과의 불확실성 등 여러 난관이 있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선진경제로 도약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4. 마치며
이와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과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조정능력을 높여 궁극적으로 선진경제로 나아가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정장치가 확립되지 않아 양극화가 심화되고 위험기피 성향이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경험해왔습니다. 이상의 논의 내용을 요약컨대, 이제는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조정 장치들, 즉 사회자본, 제도 등을 적절히 구축해감으로써 인센티브와 조정의 균형을 회복해가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윈-윈 게임을 이끌어내고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세계화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성장 동력인 인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대학교육을 개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규모의 축소와 핵심역량 강화, 대학별 특성화, 기초연구의 강화 등의 대학 구조조정을 추진해가야 하며, 사회 전반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
정운찬 (서울대학교 총장)
1. 들어가며 - 세계화와 한국경제의 변화
세계화(globalization)는 1990년대 이후 두드러진 전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글로벌 스탠더드, 무한경쟁, 투명한 경영, 수익성 중시, 시장주의, 인센티브 등이 세계화를 묘사하는 단어들인데, 이 세계화 추세는 개방경제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뿐 아니라 폐쇄적인 경제에까지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마치 컴퓨터와 인터넷 같은 커다란 기술혁신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 변화에 적응하도록 강요하고,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기술혁신의 경우, 컴퓨터가 도입되기 전에는 비슷한 생활수준으로 생활하던 사람들도 컴퓨터가 상용화되면서 이에 적응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나누어지고, 후자의 경우 직․간접적으로 경제적인 불이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는 컴퓨터를 필요로 하지 않던 사람들에게도 예외를 허용치 않고 이러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컨대, 주판을 충분히 잘 이용해서 컴퓨터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 역시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주판 기술의 급격한 시장가치 하락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것을 직접 필요로 하든 그렇지 않든 기술혁신은 그 모든 이들에게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 속도 역시 가속화되어, 뒤늦게나마 새 기술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더라도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여 도태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세계화도 기술혁신과 같이, 모든 이들에게 적응을 강요하고 있으며 그것에 실패한 경제주체는 가혹하게 처벌함으로써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도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세계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글로벌 스탠더드를 무시한 채 불투명한 경영을 일삼다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신을 초래하여 급격한 외화유출을 초래한 이 위기는, 우리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형성해 온 중진국 형 경제체제가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파고에 휩쓸려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혹한 처벌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는 이제 세계화에 적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으며, 그 교훈은 한국경제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글로벌 스탠더드, 무한경쟁, 수익성, 시장주의 등을 강조하는 흐름이 뚜렷해졌습니다. 그 결과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많이 개선되었고 금융기관들의 부실도 상당부문 정리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가 확산되면서 예상치 않았던 부작용들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억대 연봉자가 늘어난 반면 중산층이 무너져 소득계층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경제 전반에 보수적이고 안전 지향적 경향이 만연하여 위험기피와 투자부진을 유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기업이나 금융 모두 위험부담(risk taking)을 꺼리면서 경제가 축소 지향적인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출산율의 저하도 불확실한 미래, 그리고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경제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현재 우리나라는 이와 같은 변화에 적절히 적응한 경제주체와 적응기회를 놓친 경제주체들 사이에 양극화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화에 수반되는 급격한 환경변화가 불확실성을 증가시킴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주체들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더욱 위험 회피적인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2. 세계화 파고 속의 한국경제 -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나라의 대응전략을 살피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세계화로 인한 부작용이 왜 이렇게 심각한지 분석해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로는 크게 우리나라가 세계화에 수반되는 암묵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 그리고 인센티브와 조정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세계화에 수반되는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의 부족
세계화는 실제로 선진국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현재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 서있습니다.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진통을 겪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선진국의 기술이 후진국에 도입될 때 발생하는 어려움과도 유사한데, 이것은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공장에서 특정 기계를 만들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외국으로부터 청사진을 수입한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청사진은 새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담고 있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계를 만들고 이용하는 과정에서는 설계도에 담을 수 없는 정보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나사를 조일 때 어느 정도로 세게 조여야 하는지, 또 기계가 잘 돌아가려면 주변 환경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기계를 잘 만들고 이용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정보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 같이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선진기술을 활용하는 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암묵적 지식이라 합니다.
세계화 과정도 기계를 도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현재 우리는 세계화가 제시하는 청사진, 즉 시장주의나 무한경쟁 등을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수용해가고 있으나 그것을 적절히 작동시키는데 필요한 암묵적 지식은 아직 습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로 인해 양극화와 소득분배 악화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암묵적 지식이 체화된 선진국의 경우, 경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동시에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재기할 기회를 주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에 따라 교육기회를 제공하거나 취업을 지원하며, 사회적 안전망을 적절히 구비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국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유럽에서는 정부의 공공지출을 중심으로, 미국에서는 공공지출과 개인의 기부금 등을 중심으로 지난 수 십 년간 여러 가지 안전장치들을 구축해 온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나라들에서는 공정한 경쟁이 가능하도록 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법적․제도적인 장치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습에 뿌리내린 관행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쟁”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암묵적인 사회적 안전장치의 토대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들이 없다면 경쟁은 더 이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밀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위험기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어야 사람들이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고자 할 것입니다. 줄타기를 시킬 때, 그물도 설치해주지 않고 빨리 줄을 타보라고 내몬다면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업들로 하여금 경쟁력 확보를 위해 연구개발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금융부문 등이 그 위험을 적절히 통합하고 분산하여 관리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워야만 각 경제주체가 세계화 추세 속에서 무작정 위험을 기피하는 태도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 사회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청사진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 새로운 매커니즘의 작동에 필요한 암묵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늦기 때문에 세계화의 부작용을 초래한 것입니다.
(2) 인센티브와 조정(coordination)
다음으로 세계화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의 하나인 인센티브와 조정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인센티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습니다. 외환위기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개인과 조직의 인센티브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도덕적 해이(moral hazard)가 지목되어왔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들 중에도 경제학의 핵심이 바로 인센티브며 그 이외는 모두 부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로, 인센티브가 경제행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센티브 그 자체뿐만 아니라, 개별 경제주체들 간에 인센티브를 어떻게 조정하는지의 문제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인센티브가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이 두 가지의 균형이 무너지고 조정실패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제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각 경제주체의 인센티브와 이들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마치 나무와 숲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확대한 것이 숲이 되지 않듯이, 미시적인 의사결정과 그것들이 거시적 영역에서 조정된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즉, 개별 경제주체들의 행위들은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뜻밖의 성질(emergent properties)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은행들이 부실을 줄여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추기 위해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을 꺼리는 경우, 한편으로 그것은 부실을 줄이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려, 역으로 은행들의 영업환경을 나쁘게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윈-윈 게임과 정반대의 현상이 바로 이러한 조정 실패인 것입니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한국경제도 나름대로 튼튼한 조정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부-금융-재벌의 삼각 유착관계로 이루어진 위험분담체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재벌이 과감하게 투자하면 정부가 금융지원을 통해서 위험을 분담해왔고, 이는 재벌의 투자위험을 전 국민이 지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메커니즘은 경제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과잉 중복투자 등의 비효율을 가져왔고, 무엇보다 세계화 추세 속에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상반되는 것이기에 이제는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조정메커니즘이 폐기된 이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이 확립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문제의 핵심입니다.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으며 많은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조정 매커니즘을 만든다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암묵적 지식을 쌓는 작업, 또는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확립하는 작업입니다. 사회적 학습은 전 국민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과정으로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는 장기적인 작업입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유착메커니즘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나타나겠지만, 이미 우리 경제가 너무 커졌기에 이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에서도 70년대에 PC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 20년 이상의 오랜 적응 과정이 결국 90년대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했다는 분석과 같이, 세계화와 같은 경제․사회의 본질적인 변화에 대응해서 새로운 조정 장치를 확립하는 데에는 그 이상의 장기간의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조정 장치를 확립한 이후의 결과는 아주 밝을 것입니다.
3. 한국경제,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경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화에 대응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조정 장치를 확립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보다 적극적인 인적투자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대응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조정장치의 확립
한국경제가 세계화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작업이 바로 새로운 조정 장치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조정장치란 앞서 언급했듯이, 설계도면에 잘 나와 있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암묵적 지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연구되고 있는 사회 자본(social capital)도 우리가 필요로 하는 조정 장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구성원들 간의 신뢰, 내가 상대방에게서 기대하는 행동이 실제로도 어긋나지 않는 것, 적절한 이타심(altruism)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좀 더 앞날을 내다보는 자세 등이 바로 이 사회 자본을 이루는 요소들이며, 이러한 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윈-윈 게임을 도출하는 방향으로 경제주체들의 인센티브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세계화에 수반된 문제들, 예컨대 양극화나 지나친 위험기피 등도 사회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면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한 경쟁과 경쟁탈락자에 대한 배려가 체계적으로 보장된다면 사회통합도 좀 더 용이할 것이며, 경제주체들 간의 신뢰가 충분하다면 불확실성이 줄어들어 지나친 위험기피 문제도 많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법과 제도의 확립이 중요합니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고 사회의 합의를 어긴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해야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조정 장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컨대, 회계부정을 저질렀을 때 미국에서는 단호한 처벌을 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사례도 있으며, 경제적 강자는 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고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사회 구성원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도 발전적으로 조정하기도 곤란할 것입니다.
사실 세계화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 쉽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갈등을 잘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입니다. 세계화 이전에는 비슷한 생활수준을 유지하며 지내던 사람들도 세계화 과정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이 공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잘 관리하고 사회 자본을 축적하는 데에는 지도자의 리더십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멸이 아니라 윈-윈을 선택하게 하려면 리더가 나서서 윈-윈이 가능하다는 데에 대한 확신과 함께 조정결과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한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처럼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개인의 단기적인 이득을 추구하다가 공멸하곤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장기적으로 모두 이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경제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을 줄여서 투자를 늘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세계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 인간에 대한 투자
다음으로 좀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세계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잘 이용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방법도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성장 동력인, 인간에 대한 투자를 통해 가능할 것입니다. 세계화된 세계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혁신이 이익 창출의 원천이 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소프트웨어를 팔아서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천문학적 규모의 이익이나 새로운 컴퓨터 칩, 좋은 영화 한 편이 벌어들이는 이익은 모두 창의적 인재들의 머릿속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창의적 인재를 키우는 데에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대학교육입니다. 그러므로 대학교육의 성패가 나라의 장래를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대학은 아직은 세계화 시대의 고등교육의 막중한 책무에 상응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그 여건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그동안 한국의 대학은 교육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대학규모를 키우고 학생 수를 늘리는 데 집중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결과 지금 한국의 대학은 4년제 대학이 200개, 전문대학이 160개로 팽창하였고, 대학생 수는 전 인구의 4.07%로 세계 최고규모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은 대학의 양적 팽창이 가져온 부작용은 매우 심각합니다. 1990년대 이후 한국대학의 수준은 점차 하락해서 대학생의 전반적인 기초학력이 저하되었으며, 연구실적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질적 측면에서는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앞서 말씀드린 인센티브와 조정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인센티브 또는 시장적 해결방식은 구조조정과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나, 대학은 위기의 징후를 감지하지 못한 채 구조조정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실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양질의 교육여건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대학 역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대학 구조조정은 대학규모의 축소를 수반해야 할 것입니다. 즉, 교육재원이 취약한 현실에서 내실 있고 효율적인 교육체계를 갖추려면 우선 대학의 규모를 축소하는 데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한국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높은데,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는 지식의 창출은커녕 지식을 전수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해내기 어렵습니다.
아울러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핵심 분야의 역량 강화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과감한 지원육성책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대학원생들에게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생활비를 보조하고, 교수들의 연구여건 개선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하는 등의 지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조정 측면에서 대학 구조조정은 대학별 특성화와 기초연구의 강화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인적투자에 대해서는 조정실패가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예컨대, 고교 평준화의 경우 정책의 의도는 교육기회의 평등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거주 지역에 따른 교육기회의 질적 격차를 가져와서 교육기회의 평등이라는 이념과는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교육에 대한 지나친 투자 역시 일종의 조정 실패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학교육에서도 조정실패의 폐해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은 전국 모든 지역에서 엇비슷한 성격과 규모를 유지하고 있어서 소모적 경쟁과 자원의 낭비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대학원의 경우도 과거에는 한 대학이 대학원을 확충하면 다른 대학들도 이를 답습하여 국내 대학원 학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 결과 박사학위를 받고도 안정된 교육 및 연구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박사 실업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인적 자원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정실패를 극복하고 균형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역별 입지여건과 특성에 맞게 각 지역이 서로 다른 부문에서 비교우위를 가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균등화된 대학체제로는 다원화 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를 효과적으로 양성할 수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로 기초교육 강화를 들 수 있습니다. 기초교육과 기초연구는 장기적으로 지식 창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시장에서 그 가치가 정확히 평가되지 않는 성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비시장적 조정을 통해서 이 부문을 육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화 시대에는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응용지식보다 훌륭한 의사소통 능력, 변화에 적응하고 평생 동안 학습할 수 있는 능력,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건강한 시민의식, 남을 배려하고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인간적 품성, 세계를 보는 폭넓은 시야 등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정부는 국가 발전전략의 관점에서 대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의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경제가 발전할수록 개발연구에 비해 기초연구가 경제성장률을 높이는 효과가 더욱 크다고 합니다. 즉, 똑같은 예산을 즉시 상업화할 수 있는 항목에 투자하는 것보다 당장은 이득이 되지 않더라도 잠재력이 있는 기초연구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인 성장잠재력을 더 높인다는 것입니다. 교수들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와 연구 결과의 불확실성 등 여러 난관이 있지만,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선진경제로 도약하기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4. 마치며
이와 같이 복잡하고 다양한 과제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조정능력을 높여 궁극적으로 선진경제로 나아가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우리 경제는 외환위기 이후 세계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정장치가 확립되지 않아 양극화가 심화되고 위험기피 성향이 심화되는 등의 부작용을 경험해왔습니다. 이상의 논의 내용을 요약컨대, 이제는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조정 장치들, 즉 사회자본, 제도 등을 적절히 구축해감으로써 인센티브와 조정의 균형을 회복해가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윈-윈 게임을 이끌어내고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세계화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성장 동력인 인간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대학교육을 개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규모의 축소와 핵심역량 강화, 대학별 특성화, 기초연구의 강화 등의 대학 구조조정을 추진해가야 하며, 사회 전반의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