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속의 한국경제 - 2006년과 그 이후 (2006.1.23)
등록일: 2009. 7. 6. 조회수: 19790
지구화속의 한국경제 - 2006년과 그 이후
1. 2006년 한국경제 - 경기회복 전망과 구조적 문제
주요 기관들의 경제전망 보고서들을 보면 2006년 경제는 2005년보다는 나아지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즉, 2005년에는 4%를 넘기 어려웠던 경제성장률이 2006년에는 4%대 후반 또는 5% 정도를 기록함으로써 잠재성장률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지난 몇 년 간 경제성장률이 지지부진했었기 때문에 성장률 상승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률 회복전망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최근 우리나라의 성장률 전망 과정에서 발생해온 문제점들은 잠깐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지난 몇 년간 주요 경제예측기관들의 성장률 전망 담당자들은 실적치가 추정치와 너무 큰 괴리를 보인다는 애로를 여러 차례 토로한 바 있습니다. 즉 성장률 전망을 위해 추정한 방정식을 이용해서 계산한 전망치가 실적치와 단순한 오차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데, 그것이 수년간 체계적으로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부분이 설비투자 증가율인데, 최근 몇 년 동안 저금리 등을 감안할 때 설비투자가 큰 폭으로 늘어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치는 예측된 수준에 크게 못 미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예측오차는 우리 경제에 상당한 구조적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과거의 수치들을 이용해서 추정한 방정식은 과거의 경제구조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경제구조가 바뀌면 이 방정식들의 유용성이 사라지고 이를 통한 미래예측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한국경제의 전망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의 구조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어떤 식으로 풀려나가느냐에 따라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경제의 진로가 크게 바뀔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구조적 측면을 중심으로 경제전망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투자와 소비에 관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경제의 원활한 작동여부를 결정하는 조정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2. 투자 및 소비와 관련한 구조적 문제
(1) 설비투자의 전반적 위축
먼저 설비투자를 보면 외견상 여건은 상당히 좋아 보입니다. 2005년 상반기에 제조업의 매출액대비 경상이익률은 고유가와 환율하락에도 불구하고 8.8%라는 건실한 수준을 보였고, 부채비율도 2005년 상반기에 85.5%, 차입금 의존도는 20.1%로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서 적어도 설비투자의 외형적 여건은 상당히 양호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제조업의 유형자산 증가율은 2%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업들이 여유자금을 설비투자보다는 차입금 상환이나 유동성 확보에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설비투자가 위축된 것은 아닙니다. 해외직접투자를 보면 2004년 55.3% 증가에 이어 2005년 상반기에도 전년 동기대비 35.1%의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국내 명목 설비투자 증가율이 2002년 이후 매년 -2.9에서 2.5% 범위 내에서 소폭의 등락을 보이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렇게 해외투자와 국내투자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설비투자 부진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 자본의 한계생산성과 설비투자
우선 해외투자는 주로 저기술 산업에서 중국이나 동남아로 설비가 이전되면서 발생합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의 저렴한 인건비가 투자수익을 비교적 확실하게 보장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반면에 국내투자는 이미 손쉽게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단계는 지나쳤습니다. 국내투자의 수익률을 결정하는 자본의 한계생산성을 보면, 최근의 생산성이 1970년대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어떤 생산요소의 한계생산성은 다른 생산요소들에 비해 그 요소가 얼마나 희소한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인력과 기술에 비해 자본이 희소하면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높아지고, 반대로 인력과 기술에 비해 자본이 풍부하면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낮아지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인력과 기술에 비해 자본이 풍부한 상황, 또는 거꾸로 말해서 자본에 비해 인력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못 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대체 무슨 인력이 부족하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중국이나 동남아 수준의 임금을 준다고 하면 누가 그런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기업들이 원하는 수준의 자질을 갖추고 있고 또 충분한 임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수준의 고급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술수준도 많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선진국에 비해서는 크게 낮은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이 미국의 절반 또는 그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연구결과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 물량투입 중심의 성장과정에서 자본에 비해 인력과 기술이 부족해진 것이 투자수익률의 저하추세라는 구조적 문제를 낳고 그것이 설비투자 부진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에는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 자본축적과 함께 인적자본의 축적과 기술혁신이 꾸준히 병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윤기회의 불확실성과 옵션밸류
다음으로 투자수익률의 저하추세와 함께 투자수익률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것도 설비투자 부진의 구조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비교적 확실하게 돈이 되는 아이템이 많이 있었습니다. 선진국에서 중저급 기술을 들여오면 바로 돈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본만 있으면 큰 이윤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투자수요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쉽게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이나 기술들은 벌써 사업화가 되어 있습니다. 국내외에서 이미 검증된 확실한 이윤기회가 줄어들면서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야만 하는 불확실한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에 대해서 중립적인 기업들에게도 투자를 지연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투자라는 것은 불가역성(irrever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한 번 설비투자를 하고 나면 이를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기업들은 상당한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림(delay)을 택하게 됩니다. 즉,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가치있는 옵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기다림이라는 옵션밸류(option value)를 선택하는 것이 적어도 기업 입장에서는 합리적 선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옵션밸류의 예는 주변에 아주 많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이 돌이키기 힘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상당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물론 모든 이가 옵션밸류를 선택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은 어디에 투자해야 돈이 될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도 설비투자를 충분히 하지 않는 위험 기피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금융과 투자위축
다른 한 편으로 중소기업들은 이윤기회를 찾았다 할지라도 투자를 통해 이를 실현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소기업들은 금융시장에서 충분히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들은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보다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가계대출에 더 익숙한 실정입니다.
이에 따라 기업 투자자금 중에서 내부유보금, 충당금 등 내부조달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2004년에 투자자금의 내부 조달률은 무려 74.3%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험관리, 정보생산 등 금융의 본질적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설비투자의 부진은 인력과 기술부족으로 인한 자본의 한계생산성 저하를 배경으로 기업과 금융의 위험기피가 어우러진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 소비의 위축
다음으로 소비를 보면 점진적인 회복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습니다. 우선 최근 소비 증가분 중에서 상당 부분이 해외소비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컨대 2005년 상반기 중 가계소비가 2.1% 증가했는데 이 중에서 해외소비의 기여도가 1%p입니다. 이것은 상류층의 소비가 나아지고는 있지만 경제전체적으로 수요를 자극하는 효과는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한편 소비자기대지수를 보면 기준치 100에 못 미치고 있어 중산층 이하의 소비심리 개선은 미흡함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수년간 지속된 소득양극화가 다시 소득계층간 소비심리 양극화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소비자기대지수를 소득계층별로 살펴보면 400만원 이상 고소득층은 2005년초 기대지수가 크게 상승한 이후 꾸준히 기준치 10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300만원 미만 소득계층의 기대지수는 여전히 100을 하회하고 있으며, 저소득층과 고소득층간 기대지수 차이는 좁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비성향은 고소득층에 비해서 저소득층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소득양극화로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게 되면 소비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경제의 소비 위축은 가계부채 등의 요인도 있었지만 소득양극화라는 외환위기 이후의 구조적 변화에도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변화에 대한 대응 - 지구화와 한국경제의 조정 메커니즘
지금까지 투자와 소비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투자위축이나 소비위축 모두 단순한 경기적 요인뿐만 아니라 구조적 요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자위축은 환경변화에 따른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해 기업과 금융이 대응하는 방식과 관련되고, 소비위축은 소득양극화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이 상존하는 한 성장률 수치의 개선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좀 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왜 나타나게 되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지난 1990년대 이후 우리 경제에 밀어닥친 환경변화, 특히 지구화(globalization), 그리고 여기에 대처하기 위한 조정메커니즘과 경제시스템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지구화와 한국경제의 변화
한국경제에서 불확실성을 높인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지목되고 있는 것이 지구화입니다. 지구화(globalization)는 1990년대 이후 두드러진 전세계적인 흐름으로서 글로벌 스탠다드, 무한경쟁, 투명한 경영, 수익성 중시, 시장주의, 인센티브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구화 흐름은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즉, 지구화는 모든 이들에게 적응과 변신을 강요하고 있고 적응에 실패한 이에게는 무자비한 처벌을 내리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도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지구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데에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글로벌 스탠다드를 무시한 채 불투명한 경영을 일삼다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신을 초래한 것이 급격한 외화유출의 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지난 수 십 년의 경제개발 드라이브 과정에서 형성된 중진국형 개발경제체제가 선진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구화의 물결을 견디지 못해 가혹한 처벌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주체들은 이제 어떻게든 지구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것이 한국경제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많이 개선되었고 금융기관들의 부실도 상당히 정리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확산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소득계층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고, 또 경제전체적으로 단기수익 중시경향이 확산되면서 위험기피와 투자부진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서 기업이나 금융이나 모두 리스크 테이킹을 꺼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경제가 지나치게 축소 지향적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 암묵적 지식의 부족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구화의 부작용이 특히 심하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구화라는 흐름은 원래 선진국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지에 있습니다. 무엇이든 외국 것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선진국의 기술이 후진국에 도입될 때 발생하는 어려움과도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와 관련해서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계를 만들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청사진을 수입했다고 해 봅시다. 이 청사진은 새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계를 만들고 이용하는 과정에서는 설계도에 담을 수 없는 정보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나사를 조일 때 어느 정도로 세게 조여야 하는지, 또 기계가 잘 돌아가려면 주변 환경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등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표시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선진기술을 활용하는 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암묵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지구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구화가 제시하는 청사진, 즉 시장주의나 무한경쟁 등을 자의든 타의든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는 데 필요한 암묵적 지식은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극화나 위험기피 등의 문제도 이러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경쟁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재기할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을 통해서 교육기회를 제공하거나 일자리 찾는 것을 도와주고 사회적 안전망도 잘 갖추어 놓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사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럽에서는 정부의 공공지출을 중심으로, 미국에서는 공공지출과 개인의 기부금 등을 중심으로 지난 수 십 년간 여러 가지 안전장치들을 튼튼히 구축해 온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 나라들에서는 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법적․제도적으로 마련된 장치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습에 뿌리내린 관행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쟁”은 그냥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암묵적인 사회적 안전장치의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들이 없다면 경쟁은 더 이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위험기피 문제도 비슷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어야 사람들이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고자 할 것입니다. 줄타기를 하는데 그물도 설치해주지 않고 빨리 줄을 타보라고 내몬다면 누가 선뜻 나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연구개발을 통해서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제 갈 길을 찾는 것을 장려하는 환경, 그리고 위험을 잘 통합하고 분산하여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금융부문의 역량, 이런 것들도 지구화가 위험기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장치들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지구화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의 청사진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청사진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메커니즘의 작동에 필수적인 암묵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주 인색해서 지구화의 부작용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인센티브와 코디네이션
다음으로 지구화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의 하나인 인센티브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인센티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경제학자들 중에는 경제학의 핵심은 인센티브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인센티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인센티브가 어떻게 조정되는지, 즉 코디네이션 문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삼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코디네이션이 잘 되지 않는 조정실패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아서 각 경제주체의 인센티브와 이들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마치 나무와 숲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확대한 것이 숲이 되지 않듯이 미시적인 의사결정과 그것들이 거시적 영역에서 조정된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경제주체들의 행위들은 뜻밖의 성질(emergent properties)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은행들은 부실을 줄여 글로벌 스탠다드를 맞추려고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을 꺼릴 수 있는데 그것은 경제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려 오히려 은행들의 영업환경을 나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윈-윈 게임의 정반대되는 현상이 바로 이러한 조정실패인 것입니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한국경제도 나름대로 튼튼한 조정 장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부-금융-재벌의 삼각 유착관계로 이루어진 위험분담체계가 그것입니다. 재벌이 과감하게 투자하면 정부가 금융을 통해서 위험을 부담해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 국민이 재벌의 투자 위험을 분담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커니즘은 경제가 복잡해지면서 과잉 중복투자 등의 비효율을 낳고 또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서 결국은 폐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조정메커니즘이 폐기된 이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이 확립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누구나 어려울 땐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받듯이 과거의 유착메커니즘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입니다만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사실 많은 고통이 따르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암묵적 지식을 쌓는 작업, 또는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을 요구하는 작업이고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확립하는 작업입니다. 사회적 학습은 전 국민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새로운 조정 장치를 만드는 과정으로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는 장기적 작업입니다.
(2) 한국경제, 지구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새로운 조정장치의 확립
그러면 새로운 조정장치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설계도면에 잘 나와 있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암묵적 지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연구되고 있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내가 상대방에게서 기대하는 행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 다소의 이타심(altruism) 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는 좀 더 앞날을 내다보는 자세 등이 사회적 자본을 이루는 요소들인데 이러한 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경제주체들의 다양한 인센티브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윈-윈 게임을 도출하는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습니다.
지구화에 수반된 양극화나 위험기피 등의 문제들도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공정한 경쟁과 경쟁탈락자에 대한 배려가 체계적으로 보장된다면 사회통합도 좀 더 용이했을 것이고 경제주체들 간의 신뢰가 충분하다면 불확실성이 줄어들어 지나친 위험기피 문제도 많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좀 덜 추상적인 차원에서 법과 제도의 확립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사회의 합의를 어겼을 때 엄한 처벌이 따라야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조정장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컨대 회계부정을 저질렀을 때 미국에서는 가혹한 처벌을 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사례도 있고, 경제적 강자는 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미에 맞게 법을 고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사회 구성원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발전적으로 조정하기도 곤란할 것입니다.
사실 지구화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 쉽기 때문에 갈등을 잘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평소에는 비슷비슷하게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도 지구화의 파고 속에서 차별화되면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이 공멸을 부를 수도 있다는 데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잘 관리하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데에는 지도자의 리더쉽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멸이 아니라 윈-윈을 선택하게 하려면 리더가 나서서 윈-윈이 가능하다는 데에 대한 확신과 함께 윈-윈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한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처럼 사람들은 개인의 단기적 이기심을 추구하다가 공멸하곤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장기적으로 모두 이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을 줄여서 투자를 늘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2006년 한국경제는 경기회복이라는 시각뿐만 아니라 새로운 조정 장치를 만들고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1. 2006년 한국경제 - 경기회복 전망과 구조적 문제
주요 기관들의 경제전망 보고서들을 보면 2006년 경제는 2005년보다는 나아지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즉, 2005년에는 4%를 넘기 어려웠던 경제성장률이 2006년에는 4%대 후반 또는 5% 정도를 기록함으로써 잠재성장률 수준을 회복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지난 몇 년 간 경제성장률이 지지부진했었기 때문에 성장률 상승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률 회복전망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최근 우리나라의 성장률 전망 과정에서 발생해온 문제점들은 잠깐 짚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지난 몇 년간 주요 경제예측기관들의 성장률 전망 담당자들은 실적치가 추정치와 너무 큰 괴리를 보인다는 애로를 여러 차례 토로한 바 있습니다. 즉 성장률 전망을 위해 추정한 방정식을 이용해서 계산한 전망치가 실적치와 단순한 오차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데, 그것이 수년간 체계적으로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가장 크게 나타나는 부분이 설비투자 증가율인데, 최근 몇 년 동안 저금리 등을 감안할 때 설비투자가 큰 폭으로 늘어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치는 예측된 수준에 크게 못 미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체계적인 예측오차는 우리 경제에 상당한 구조적 변화가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즉 과거의 수치들을 이용해서 추정한 방정식은 과거의 경제구조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데, 경제구조가 바뀌면 이 방정식들의 유용성이 사라지고 이를 통한 미래예측도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한국경제의 전망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의 구조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경제의 구조적 문제가 어떤 식으로 풀려나가느냐에 따라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 경제의 진로가 크게 바뀔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구조적 측면을 중심으로 경제전망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투자와 소비에 관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경제의 원활한 작동여부를 결정하는 조정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2. 투자 및 소비와 관련한 구조적 문제
(1) 설비투자의 전반적 위축
먼저 설비투자를 보면 외견상 여건은 상당히 좋아 보입니다. 2005년 상반기에 제조업의 매출액대비 경상이익률은 고유가와 환율하락에도 불구하고 8.8%라는 건실한 수준을 보였고, 부채비율도 2005년 상반기에 85.5%, 차입금 의존도는 20.1%로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서 적어도 설비투자의 외형적 여건은 상당히 양호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최근 제조업의 유형자산 증가율은 2%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기업들이 여유자금을 설비투자보다는 차입금 상환이나 유동성 확보에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설비투자가 위축된 것은 아닙니다. 해외직접투자를 보면 2004년 55.3% 증가에 이어 2005년 상반기에도 전년 동기대비 35.1%의 증가율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국내 명목 설비투자 증가율이 2002년 이후 매년 -2.9에서 2.5% 범위 내에서 소폭의 등락을 보이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이렇게 해외투자와 국내투자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설비투자 부진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 자본의 한계생산성과 설비투자
우선 해외투자는 주로 저기술 산업에서 중국이나 동남아로 설비가 이전되면서 발생합니다. 중국이나 동남아의 저렴한 인건비가 투자수익을 비교적 확실하게 보장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반면에 국내투자는 이미 손쉽게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단계는 지나쳤습니다. 국내투자의 수익률을 결정하는 자본의 한계생산성을 보면, 최근의 생산성이 1970년대에 비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여기서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어떤 생산요소의 한계생산성은 다른 생산요소들에 비해 그 요소가 얼마나 희소한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즉, 인력과 기술에 비해 자본이 희소하면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높아지고, 반대로 인력과 기술에 비해 자본이 풍부하면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낮아지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은 인력과 기술에 비해 자본이 풍부한 상황, 또는 거꾸로 말해서 자본에 비해 인력과 기술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자리를 못 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대체 무슨 인력이 부족하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중국이나 동남아 수준의 임금을 준다고 하면 누가 그런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 기업들이 원하는 수준의 자질을 갖추고 있고 또 충분한 임금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수준의 고급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술수준도 많이 높아지기는 했지만 아직 선진국에 비해서는 크게 낮은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의 기술수준이 미국의 절반 또는 그보다 낮은 수준이라는 연구결과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과거 물량투입 중심의 성장과정에서 자본에 비해 인력과 기술이 부족해진 것이 투자수익률의 저하추세라는 구조적 문제를 낳고 그것이 설비투자 부진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의 경우에는 자본의 한계생산성이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미국에서 자본축적과 함께 인적자본의 축적과 기술혁신이 꾸준히 병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윤기회의 불확실성과 옵션밸류
다음으로 투자수익률의 저하추세와 함께 투자수익률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것도 설비투자 부진의 구조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과거에는 비교적 확실하게 돈이 되는 아이템이 많이 있었습니다. 선진국에서 중저급 기술을 들여오면 바로 돈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본만 있으면 큰 이윤을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투자수요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쉽게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이나 기술들은 벌써 사업화가 되어 있습니다. 국내외에서 이미 검증된 확실한 이윤기회가 줄어들면서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야만 하는 불확실한 상황이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에 대해서 중립적인 기업들에게도 투자를 지연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투자라는 것은 불가역성(irreversibility)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한 번 설비투자를 하고 나면 이를 돌이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기업들은 상당한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림(delay)을 택하게 됩니다. 즉, 기다림 자체가 하나의 가치있는 옵션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기다림이라는 옵션밸류(option value)를 선택하는 것이 적어도 기업 입장에서는 합리적 선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옵션밸류의 예는 주변에 아주 많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이 돌이키기 힘든 중요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확신이 서지 않을 때 상당한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물론 모든 이가 옵션밸류를 선택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은 어디에 투자해야 돈이 될지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도 설비투자를 충분히 하지 않는 위험 기피적 선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금융과 투자위축
다른 한 편으로 중소기업들은 이윤기회를 찾았다 할지라도 투자를 통해 이를 실현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중소기업들은 금융시장에서 충분히 자금을 조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금융기관들은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보다는 부동산을 담보로 한 가계대출에 더 익숙한 실정입니다.
이에 따라 기업 투자자금 중에서 내부유보금, 충당금 등 내부조달의 비중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2004년에 투자자금의 내부 조달률은 무려 74.3%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험관리, 정보생산 등 금융의 본질적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을 여실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설비투자의 부진은 인력과 기술부족으로 인한 자본의 한계생산성 저하를 배경으로 기업과 금융의 위험기피가 어우러진 구조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2) 소비의 위축
다음으로 소비를 보면 점진적인 회복세가 나타나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낙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습니다. 우선 최근 소비 증가분 중에서 상당 부분이 해외소비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컨대 2005년 상반기 중 가계소비가 2.1% 증가했는데 이 중에서 해외소비의 기여도가 1%p입니다. 이것은 상류층의 소비가 나아지고는 있지만 경제전체적으로 수요를 자극하는 효과는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한편 소비자기대지수를 보면 기준치 100에 못 미치고 있어 중산층 이하의 소비심리 개선은 미흡함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 수년간 지속된 소득양극화가 다시 소득계층간 소비심리 양극화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소비자기대지수를 소득계층별로 살펴보면 400만원 이상 고소득층은 2005년초 기대지수가 크게 상승한 이후 꾸준히 기준치 100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 300만원 미만 소득계층의 기대지수는 여전히 100을 하회하고 있으며, 저소득층과 고소득층간 기대지수 차이는 좁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소비성향은 고소득층에 비해서 저소득층이 더 높습니다. 따라서 소득양극화로 저소득층의 소득이 줄게 되면 소비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경제의 소비 위축은 가계부채 등의 요인도 있었지만 소득양극화라는 외환위기 이후의 구조적 변화에도 상당 부분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변화에 대한 대응 - 지구화와 한국경제의 조정 메커니즘
지금까지 투자와 소비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투자위축이나 소비위축 모두 단순한 경기적 요인뿐만 아니라 구조적 요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자위축은 환경변화에 따른 불확실성과 위험에 대해 기업과 금융이 대응하는 방식과 관련되고, 소비위축은 소득양극화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적 문제들이 상존하는 한 성장률 수치의 개선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좀 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한국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왜 나타나게 되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지난 1990년대 이후 우리 경제에 밀어닥친 환경변화, 특히 지구화(globalization), 그리고 여기에 대처하기 위한 조정메커니즘과 경제시스템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지구화와 한국경제의 변화
한국경제에서 불확실성을 높인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지목되고 있는 것이 지구화입니다. 지구화(globalization)는 1990년대 이후 두드러진 전세계적인 흐름으로서 글로벌 스탠다드, 무한경쟁, 투명한 경영, 수익성 중시, 시장주의, 인센티브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지구화 흐름은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즉, 지구화는 모든 이들에게 적응과 변신을 강요하고 있고 적응에 실패한 이에게는 무자비한 처벌을 내리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1997년 외환위기도 국내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지구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데에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글로벌 스탠다드를 무시한 채 불투명한 경영을 일삼다가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신을 초래한 것이 급격한 외화유출의 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지난 수 십 년의 경제개발 드라이브 과정에서 형성된 중진국형 개발경제체제가 선진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지구화의 물결을 견디지 못해 가혹한 처벌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주체들은 이제 어떻게든 지구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었고, 그것이 한국경제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많이 개선되었고 금융기관들의 부실도 상당히 정리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확산되면서 동시에 원하지 않았던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소득계층의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고, 또 경제전체적으로 단기수익 중시경향이 확산되면서 위험기피와 투자부진을 유발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서 기업이나 금융이나 모두 리스크 테이킹을 꺼리는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경제가 지나치게 축소 지향적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 암묵적 지식의 부족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지구화의 부작용이 특히 심하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구화라는 흐름은 원래 선진국에서 비롯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처지에 있습니다. 무엇이든 외국 것을 받아들일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우리 것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선진국의 기술이 후진국에 도입될 때 발생하는 어려움과도 비슷한 점이 많은데, 이와 관련해서 암묵적 지식(tacit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계를 만들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청사진을 수입했다고 해 봅시다. 이 청사진은 새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정보를 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계를 만들고 이용하는 과정에서는 설계도에 담을 수 없는 정보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컨대 나사를 조일 때 어느 정도로 세게 조여야 하는지, 또 기계가 잘 돌아가려면 주변 환경이 어떠해야 하는지 등등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표시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잘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선진기술을 활용하는 데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정보들을 암묵적 지식이라고 합니다.
지구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구화가 제시하는 청사진, 즉 시장주의나 무한경쟁 등을 자의든 타의든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것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게 하는 데 필요한 암묵적 지식은 아직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극화나 위험기피 등의 문제도 이러한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선진국의 경우에는 경쟁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재기할 기회를 주는 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을 통해서 교육기회를 제공하거나 일자리 찾는 것을 도와주고 사회적 안전망도 잘 갖추어 놓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사회마다 차이는 있지만 유럽에서는 정부의 공공지출을 중심으로, 미국에서는 공공지출과 개인의 기부금 등을 중심으로 지난 수 십 년간 여러 가지 안전장치들을 튼튼히 구축해 온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 나라들에서는 또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도록 시장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법적․제도적으로 마련된 장치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습에 뿌리내린 관행들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쟁”은 그냥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암묵적인 사회적 안전장치의 토대 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치들이 없다면 경쟁은 더 이상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정글로 돌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위험기피 문제도 비슷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어야 사람들이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고자 할 것입니다. 줄타기를 하는데 그물도 설치해주지 않고 빨리 줄을 타보라고 내몬다면 누가 선뜻 나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기업들이 연구개발을 통해서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제 갈 길을 찾는 것을 장려하는 환경, 그리고 위험을 잘 통합하고 분산하여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금융부문의 역량, 이런 것들도 지구화가 위험기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암묵적인 사회적 장치들일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지구화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의 청사진은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청사진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메커니즘의 작동에 필수적인 암묵적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주 인색해서 지구화의 부작용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인센티브와 코디네이션
다음으로 지구화가 가져온 중요한 변화의 하나인 인센티브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인센티브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경제학자들 중에는 경제학의 핵심은 인센티브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인센티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는 아닙니다. 개별 경제주체들의 인센티브가 어떻게 조정되는지, 즉 코디네이션 문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삼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코디네이션이 잘 되지 않는 조정실패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단순하지가 않아서 각 경제주체의 인센티브와 이들을 조정하는 메커니즘이 마치 나무와 숲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를 확대한 것이 숲이 되지 않듯이 미시적인 의사결정과 그것들이 거시적 영역에서 조정된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경제주체들의 행위들은 뜻밖의 성질(emergent properties)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은행들은 부실을 줄여 글로벌 스탠다드를 맞추려고 중소기업에 대한 신용대출을 꺼릴 수 있는데 그것은 경제전반의 활력을 떨어뜨려 오히려 은행들의 영업환경을 나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윈-윈 게임의 정반대되는 현상이 바로 이러한 조정실패인 것입니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에는 한국경제도 나름대로 튼튼한 조정 장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부-금융-재벌의 삼각 유착관계로 이루어진 위험분담체계가 그것입니다. 재벌이 과감하게 투자하면 정부가 금융을 통해서 위험을 부담해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 국민이 재벌의 투자 위험을 분담한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메커니즘은 경제가 복잡해지면서 과잉 중복투자 등의 비효율을 낳고 또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서 결국은 폐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과거의 조정메커니즘이 폐기된 이후 이를 대체할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이 확립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누구나 어려울 땐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받듯이 과거의 유착메커니즘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입니다만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조정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사실 많은 고통이 따르는 작업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암묵적 지식을 쌓는 작업, 또는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을 요구하는 작업이고 새로운 제도와 관행을 확립하는 작업입니다. 사회적 학습은 전 국민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고 새로운 조정 장치를 만드는 과정으로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는 장기적 작업입니다.
(2) 한국경제, 지구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새로운 조정장치의 확립
그러면 새로운 조정장치란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설계도면에 잘 나와 있지 않고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암묵적 지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최근에 많이 연구되고 있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내가 상대방에게서 기대하는 행동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 다소의 이타심(altruism) 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기보다는 좀 더 앞날을 내다보는 자세 등이 사회적 자본을 이루는 요소들인데 이러한 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져야 경제주체들의 다양한 인센티브들이 사회 전체적으로 윈-윈 게임을 도출하는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습니다.
지구화에 수반된 양극화나 위험기피 등의 문제들도 사회적 자본이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공정한 경쟁과 경쟁탈락자에 대한 배려가 체계적으로 보장된다면 사회통합도 좀 더 용이했을 것이고 경제주체들 간의 신뢰가 충분하다면 불확실성이 줄어들어 지나친 위험기피 문제도 많이 해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좀 덜 추상적인 차원에서 법과 제도의 확립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사회의 합의를 어겼을 때 엄한 처벌이 따라야만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조정장치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컨대 회계부정을 저질렀을 때 미국에서는 가혹한 처벌을 받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벼운 처벌을 받는 사례도 있고, 경제적 강자는 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구미에 맞게 법을 고칠 수도 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경쟁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고 사회 구성원 간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발전적으로 조정하기도 곤란할 것입니다.
사실 지구화는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을 야기하기 쉽기 때문에 갈등을 잘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평소에는 비슷비슷하게 사이좋게 지내던 사람들도 지구화의 파고 속에서 차별화되면서 이해관계의 갈등을 일으킬 수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것이 공멸을 부를 수도 있다는 데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잘 관리하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데에는 지도자의 리더쉽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멸이 아니라 윈-윈을 선택하게 하려면 리더가 나서서 윈-윈이 가능하다는 데에 대한 확신과 함께 윈-윈에서 이탈하는 것이 이득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한 강한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처럼 사람들은 개인의 단기적 이기심을 추구하다가 공멸하곤 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지도자가 장기적으로 모두 이익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경제에 드리워진 불확실성을 줄여서 투자를 늘리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2006년 한국경제는 경기회복이라는 시각뿐만 아니라 새로운 조정 장치를 만들고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느냐라는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