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의 비전 (2004.9.23)
등록일: 2009. 7. 6. 조회수: 14271
서울대학교의 비젼
정운찬(서울대학교 총장)
1. 대학개혁의 목표
과거 3-40년 동안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은 선진과학이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진국과 지식격차가 컸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선진학문과 기술을 전수ㆍ전파하는 것은 한국의 대학에 부여된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한국의 대학들은 이 역할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한국이 지난 30여 년간 연 8%대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인적자본 축적의 일익을 담당했던 서울대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난 50여 년간 서울대학교는 국가에 크게 공헌하는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각 분야에서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통해 한국 최고 대학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따라 선진국과 지식격차가 줄어들고 한국사회의 패러다임도 급격히 변화하면서,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도 사회로부터 변화와 개혁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지식전수라는 기존의 교육형태만으로는 더 이상 한국 및 세계경제에 적합한 생산적 인력을 배출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면서 서울대학교도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세계적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서 나가기 위하여, 지식전수로부터 지식창출교육으로의 이행을 ‘적극적’이며 동시에 ‘효율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세계라는 커다란 바다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서울대는 자발적으로 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서울대학교의 교육 및 연구 부문에서의 질적인 개선을 확실히 도모함으로써 세계일류대학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2. 교육개혁의 수행방안
교육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소홀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연구측면에서 볼 때에도, 양적으로는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의 여러 도전들에 맞설 수 있는 지적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사고를 배양할 수 있는 지식창출기반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명실상부한 세계일류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저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학구성원의 다양화, 기초교육의 강화, 적정규모화, 그리고 학문후속세대의 지원체제를 구축하는 것 등입니다.
(1) 대학구성원의 다양화
대학구성원들을 다양화함으로써 학생들은 서로의 이질적인 경험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질적 문화자본의 학습이 창의성의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은 지식생산자ㆍ지식창조자로 변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서울대는 학생이나 교수들을 다양하게 충원하는 일련의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입학시험제도를 개선하여 신입생들의 구성을 다양화하였습니다. 과거의 입시제도는 (한)국어, 영어, 수학 등의 학업성적이 주된 선발기준이었으며, 학교공부를 잘하는 도시지역의 중상층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입학한 신입생들은 대체로 도전정신이나 창의성이 부족하여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서울대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다양한 재능을 갖춘 사람을 뽑으려고 합니다. 수학능력시험(정부가 시행하는 학력고사)의 점수가 높은 학생, 내신(고등학교 내에서의 학업 및 다른 능력 등을 말함)이 좋은 학생, 국제올림피아드 입상자, 기타 다양한 재능이나 특기 소유자들을 따로따로 선발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창의성을 개발하는 역동적인 교육환경을 만들 것입니다.
특히 서울대는 이번 입시에서부터 지역균형선발제를 실시합니다. 이는 각 지역의 인재들을 골고루 선발하기 위한 제도로서, 다양한 문화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잠재력이 모여 상승효과를 내고자 함입니다.
대학원의 경우에도 외국, 특히 아시아권의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여 내국인 학생들과 함께 수학하는 보다 국제적인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내국인 학생들의 경험을 다양화하려고 합니다.
다음으로 교수들의 충원에서도 구성원의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동종교배방지의 원칙을 통하여, 타교출신자를 1/3 이상 채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수들의 출신학교나 출신학과를 다양화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성별 구성비에서도 다양화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교수 특별 T/O를 배정하는 등 양성평등추진제를 권장하고 있으며, 남녀교수 비율의 균형을 회복하는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국적의 다양화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재원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거나 초빙하는 프로그램을 이미 시작하였습니다.
서울대가 다양한 교수진용을 갖춘다면, 학생들이 받는 지적 자극의 스펙트럼도 넓어질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교수와 학생 간에 더욱 역동적인 교류가 일어날 것이며, 이는 곧 창의성 함양으로 귀착될 것입니다.
(2) 기초교육의 강화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수명이 불과 몇 달, 혹은 몇 년 밖에 가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세분화된 지식이나 특정 기술은 사회에 나가면 곧장 사장(死藏)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미 시스템화된 지식산출체계를 통해, 가지고 있지 않은 지식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쉽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수받은 기존의 지식만으로 무장한 인력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춘 인재이어야만 합니다. 서울대는 바로 이러한 창의력을 갖춘,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환경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서울대는 기초교육을 강화하고, 분과학문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세분화된 전공중심의 교육이나 응용기술 중심의 교육은 새롭게 변화하는 기술환경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교육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와 말하기 훈련 등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자연과학도,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식견을 갖춘 인문사회학도를 길러내고자 합니다.
(3) 적정규모화
지난 수십 년간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은 “나도주의(me-tooism)”에 편승해서 백화점식으로 모든 분야의 학과를 만들어 종합대학이 되고, 가능한 한 학생수를 늘려 학생 1인당 교육원가를 절감하려는 우를 범했습니다. 이제 서울대는 지금까지의 팽창주의를 지양하고, 규모축소를 통해 교육의 내실화를 기할 것입니다.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조직과, 자원을 고갈시키는 과도한 정원을 축소해야 합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많은 학생들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곧 교육의 부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첫 발걸음으로 올해 서울대는 신입생 모집 정원을 3,900명에서 3,250명으로 감축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우선적으로 학생수를 축소하여야만 보다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학부생의 감축에 이어 대학원생의 감축도 추진할 예정입니다. 현재 서울대에서는 대학원생 1만 천명 모두가 일반학위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반면 하버드대학은 일반학위과정에 3,500명 정도의 학생만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교육을 수행하기 위해서 서울대학교가 담당할 수 있는 적정 규모의 학생정원을 책정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입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양질의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학생수를 줄이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4) 학문후속세대 지원체제의 구축
최근 10여 년 동안 서울대는 연구에 많은 중점을 두었습니다. 정부도 BK21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적어도 이공계 과학분야에서는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SCI에 등재된 논문의 수로 볼 때, 서울대가 2001년에는 세계 유수의 대학들 중에서 40위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한국의 대학 모두의 연구 성과를 합했을 경우 국가별 순위로 13위에 달하였습니다. 물론 연구업적의 질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서울대가 최근 들어 벌이는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지식창출기반의 구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연구업적의 질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을 거둔다고 하여도, 우수한 학문후속세대가 그 맥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면, 대학의 지식창출기반은 와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서울대는 대학원생들이 학문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안정적으로 쌓아갈 수 있는 지원체제를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서울대는 대학원생들이 학비와 생활비에 신경 쓰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장학금제도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 1단계로 내년부터 서울대 박사과정 등록생의 50%가 학비 전액과 월 60만원(약 500$)의 생활비를 받게 됩니다. 사회적 지원과 제도적 변화에 힘입어 재원이 확대된다면, 대학원생 전원에게 장학금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대학원의 정원도 장학금 재원과 연동되어 움직일 예정이므로, 학문후속세대는 소수정예체제로 변화될 것입니다. 전공별 정원은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여력에 따라, 즉 학교에서 지급하는 장학금과 학과교수들의 연구비 및 기타 재원확보여력에 따라 책정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학원정원의 축소계획도 바로 이런 소수정예체제라는 그림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3. 사회에 대한 요구
오늘날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학에 대해서도 지식기반사회의 수요에 맞는 시스템 변화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대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서울대학교는 그러한 요구를 겸허히 수용할 것입니다. 주요한 국가기간산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창조적 변화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 역시 대학이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체제변화를 해나가도록, 재정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1) 재정지원
우선, 교육과 연구의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의 과감한 재정적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한국 사회는 대학의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이에 대한 도움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대학은 사회의 끊임없는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도움이 없이는 대학혁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컨대 학생 1인당 교육경비, 학문후속세대 장학금, 교수-학생비율, 학생 1인당 도서관 장서수 등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감한 교육투자가 병행되어야만 대학이 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른바 비인기 분야라고 하더라도 대학의 수준향상과 한국사회의 비전을 찾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연구영역이 있습니다. 그런 전공분야들 역시 창의성과 문제인지능력을 키워주는 분야입니다. 예를 들면, 경제학에서는 경제사 특히 한국경제사가 그런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든가 사상사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들은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없다면 발전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연구자가 생계를 걱정하고 연구비 조달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높은 수준의 연구는 고사하고, 연구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속출할 것입니다.
(2) 자율
그리고 대학이 스스로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자율성을 늘려 주어야 합니다. 정부의 대학에 관한 여러 규제 조항들로 인해 대학은 급변하는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우수한 학생과 교수들을 유치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해외유학길을 나서려는) 우수학생과 교수를 끌어들이고,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연구경쟁에도 통제와 선택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선발, 교육과 연구, 그리고 행정에 자율을 허용하는 것이 환경의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필수사항입니다.
자율이 도덕적 불감증 또는 연구자원의 남용을 가져온다고 우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열 마리의 개미가 있으면 그중에서 서너 마리의 개미는 일을 열심히 하고, 또 다른 서너 마리는 적당히 일을 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합니다. 만약 가장 일을 잘 하는 개미들만으로 다시 10마리를 만든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서너 마리는 열심히 일하고, 다른 서너 마리는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개미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요? 바로 일을 열심히 하는 서너 마리의 개미입니다. 게으른 개미를 견제하기 위해서 열 마리 모두를 적당히 일하는 개미로 만드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기간에 달성한 연구업적과 수량만을 가지고 연구자를 평가한다면, 1, 2년짜리 단기연구만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1, 2년에 할 수 있는 연구라면, 우리보다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반년 또는 1년이면 할 것이고, 뒤진 나라들도 2-3년이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의적이고 질 높은 연구는 대개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기, 수량중심의 평가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다양한 평가기준과 관리기준이 필요하며, 연구 및 교육자들 스스로가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4. 대학개혁과 한국의 미래
오늘날의 대학은 서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사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유학자와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이 있었으며 사설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시기인 조선에서는 성균관과 향교 등이 있었고, 그 이전 시대에는 국자감, 태학 등의 국가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들 교육기관의 역할은 바로 사회를 경영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와 같은 신분제도가 없으며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세계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경영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갈 인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과거시대보다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하며, 더 창의적이고 과제해결 능력이 높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국사회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어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인재가 필요합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의 미래가 바로 한국의 미래입니다. 대학이 살아 움직이면서 제 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미래가 밝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모든 대학이 자율성과 독창성을 가진 교육과 연구의 중심지로서 제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대학개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육제도를 고쳐 창의성 발휘, 생산성 향상, 그리고 국제경쟁력 제고를 도모해야만 한국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이를 위해 교육투자와 교육을 교육자에게 일임하는 자율성의 증대는 필수조건입니다.
정운찬(서울대학교 총장)
1. 대학개혁의 목표
과거 3-40년 동안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은 선진과학이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선진국과 지식격차가 컸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선진학문과 기술을 전수ㆍ전파하는 것은 한국의 대학에 부여된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한국의 대학들은 이 역할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한국이 지난 30여 년간 연 8%대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인적자본 축적의 일익을 담당했던 서울대의 역할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난 50여 년간 서울대학교는 국가에 크게 공헌하는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각 분야에서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통해 한국 최고 대학의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에 따라 선진국과 지식격차가 줄어들고 한국사회의 패러다임도 급격히 변화하면서,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서울대학도 사회로부터 변화와 개혁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지식전수라는 기존의 교육형태만으로는 더 이상 한국 및 세계경제에 적합한 생산적 인력을 배출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면서 서울대학교도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세계적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앞서 나가기 위하여, 지식전수로부터 지식창출교육으로의 이행을 ‘적극적’이며 동시에 ‘효율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세계라는 커다란 바다에서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서울대는 자발적으로 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서울대학교의 교육 및 연구 부문에서의 질적인 개선을 확실히 도모함으로써 세계일류대학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2. 교육개혁의 수행방안
교육 측면에서 볼 때,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여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소홀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연구측면에서 볼 때에도, 양적으로는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의 여러 도전들에 맞설 수 있는 지적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사고를 배양할 수 있는 지식창출기반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명실상부한 세계일류대학으로 만들기 위해, 저는 크게 네 가지 측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학구성원의 다양화, 기초교육의 강화, 적정규모화, 그리고 학문후속세대의 지원체제를 구축하는 것 등입니다.
(1) 대학구성원의 다양화
대학구성원들을 다양화함으로써 학생들은 서로의 이질적인 경험과 문화를 공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질적 문화자본의 학습이 창의성의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은 지식생산자ㆍ지식창조자로 변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서울대는 학생이나 교수들을 다양하게 충원하는 일련의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선 입학시험제도를 개선하여 신입생들의 구성을 다양화하였습니다. 과거의 입시제도는 (한)국어, 영어, 수학 등의 학업성적이 주된 선발기준이었으며, 학교공부를 잘하는 도시지역의 중상층에게 유리한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통하여 입학한 신입생들은 대체로 도전정신이나 창의성이 부족하여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서울대는 여러 가지 기준으로 다양한 재능을 갖춘 사람을 뽑으려고 합니다. 수학능력시험(정부가 시행하는 학력고사)의 점수가 높은 학생, 내신(고등학교 내에서의 학업 및 다른 능력 등을 말함)이 좋은 학생, 국제올림피아드 입상자, 기타 다양한 재능이나 특기 소유자들을 따로따로 선발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극을 주고 창의성을 개발하는 역동적인 교육환경을 만들 것입니다.
특히 서울대는 이번 입시에서부터 지역균형선발제를 실시합니다. 이는 각 지역의 인재들을 골고루 선발하기 위한 제도로서, 다양한 문화적, 지역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의 잠재력이 모여 상승효과를 내고자 함입니다.
대학원의 경우에도 외국, 특히 아시아권의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여 내국인 학생들과 함께 수학하는 보다 국제적인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내국인 학생들의 경험을 다양화하려고 합니다.
다음으로 교수들의 충원에서도 구성원의 다양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동종교배방지의 원칙을 통하여, 타교출신자를 1/3 이상 채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수들의 출신학교나 출신학과를 다양화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성별 구성비에서도 다양화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교수 특별 T/O를 배정하는 등 양성평등추진제를 권장하고 있으며, 남녀교수 비율의 균형을 회복하는 노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더불어 국적의 다양화도 시도하고 있습니다. 재원의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외국인 교수를 채용하거나 초빙하는 프로그램을 이미 시작하였습니다.
서울대가 다양한 교수진용을 갖춘다면, 학생들이 받는 지적 자극의 스펙트럼도 넓어질 것입니다. 이를 통해 교수와 학생 간에 더욱 역동적인 교류가 일어날 것이며, 이는 곧 창의성 함양으로 귀착될 것입니다.
(2) 기초교육의 강화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수명이 불과 몇 달, 혹은 몇 년 밖에 가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배운 세분화된 지식이나 특정 기술은 사회에 나가면 곧장 사장(死藏)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이미 시스템화된 지식산출체계를 통해, 가지고 있지 않은 지식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쉽게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변화된 환경 속에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전수받은 기존의 지식만으로 무장한 인력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춘 인재이어야만 합니다. 서울대는 바로 이러한 창의력을 갖춘,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환경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서울대는 기초교육을 강화하고, 분과학문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세분화된 전공중심의 교육이나 응용기술 중심의 교육은 새롭게 변화하는 기술환경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교육방식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글쓰기와 말하기 훈련 등에 힘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자연과학도,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식견을 갖춘 인문사회학도를 길러내고자 합니다.
(3) 적정규모화
지난 수십 년간 서울대를 비롯한 한국의 대학들은 “나도주의(me-tooism)”에 편승해서 백화점식으로 모든 분야의 학과를 만들어 종합대학이 되고, 가능한 한 학생수를 늘려 학생 1인당 교육원가를 절감하려는 우를 범했습니다. 이제 서울대는 지금까지의 팽창주의를 지양하고, 규모축소를 통해 교육의 내실화를 기할 것입니다.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조직과, 자원을 고갈시키는 과도한 정원을 축소해야 합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많은 학생들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곧 교육의 부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첫 발걸음으로 올해 서울대는 신입생 모집 정원을 3,900명에서 3,250명으로 감축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우선적으로 학생수를 축소하여야만 보다 나은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학부생의 감축에 이어 대학원생의 감축도 추진할 예정입니다. 현재 서울대에서는 대학원생 1만 천명 모두가 일반학위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반면 하버드대학은 일반학위과정에 3,500명 정도의 학생만이 재학하고 있습니다. 수월성을 추구하는 교육을 수행하기 위해서 서울대학교가 담당할 수 있는 적정 규모의 학생정원을 책정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정원을 조정하는 방안을 강구할 것입니다. 한정된 예산으로 양질의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학생수를 줄이는 길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4) 학문후속세대 지원체제의 구축
최근 10여 년 동안 서울대는 연구에 많은 중점을 두었습니다. 정부도 BK21 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적어도 이공계 과학분야에서는 많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SCI에 등재된 논문의 수로 볼 때, 서울대가 2001년에는 세계 유수의 대학들 중에서 40위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한국의 대학 모두의 연구 성과를 합했을 경우 국가별 순위로 13위에 달하였습니다. 물론 연구업적의 질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
서울대가 최근 들어 벌이는 일련의 개혁조치들은 지식창출기반의 구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연구업적의 질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성공을 거둔다고 하여도, 우수한 학문후속세대가 그 맥을 이어나가지 못한다면, 대학의 지식창출기반은 와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서울대는 대학원생들이 학문연구자로서의 경력을 안정적으로 쌓아갈 수 있는 지원체제를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서울대는 대학원생들이 학비와 생활비에 신경 쓰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장학금제도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그 1단계로 내년부터 서울대 박사과정 등록생의 50%가 학비 전액과 월 60만원(약 500$)의 생활비를 받게 됩니다. 사회적 지원과 제도적 변화에 힘입어 재원이 확대된다면, 대학원생 전원에게 장학금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대학원의 정원도 장학금 재원과 연동되어 움직일 예정이므로, 학문후속세대는 소수정예체제로 변화될 것입니다. 전공별 정원은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여력에 따라, 즉 학교에서 지급하는 장학금과 학과교수들의 연구비 및 기타 재원확보여력에 따라 책정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학원정원의 축소계획도 바로 이런 소수정예체제라는 그림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3. 사회에 대한 요구
오늘날 한국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학에 대해서도 지식기반사회의 수요에 맞는 시스템 변화를 주문하고 있습니다. 대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서울대학교는 그러한 요구를 겸허히 수용할 것입니다. 주요한 국가기간산업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창조적 변화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것입니다. 국가와 사회 역시 대학이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체제변화를 해나가도록, 재정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1) 재정지원
우선, 교육과 연구의 개선을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의 과감한 재정적 지원이 필수적입니다. 한국 사회는 대학의 개혁을 요구하면서도 이에 대한 도움에는 매우 인색합니다. 대학은 사회의 끊임없는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도움이 없이는 대학혁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컨대 학생 1인당 교육경비, 학문후속세대 장학금, 교수-학생비율, 학생 1인당 도서관 장서수 등을 향상시키기 위해 과감한 교육투자가 병행되어야만 대학이 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른바 비인기 분야라고 하더라도 대학의 수준향상과 한국사회의 비전을 찾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연구영역이 있습니다. 그런 전공분야들 역시 창의성과 문제인지능력을 키워주는 분야입니다. 예를 들면, 경제학에서는 경제사 특히 한국경제사가 그런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든가 사상사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들은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없다면 발전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연구자가 생계를 걱정하고 연구비 조달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높은 수준의 연구는 고사하고, 연구를 아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속출할 것입니다.
(2) 자율
그리고 대학이 스스로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자율성을 늘려 주어야 합니다. 정부의 대학에 관한 여러 규제 조항들로 인해 대학은 급변하는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우수한 학생과 교수들을 유치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해외유학길을 나서려는) 우수학생과 교수를 끌어들이고,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연구경쟁에도 통제와 선택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학생선발, 교육과 연구, 그리고 행정에 자율을 허용하는 것이 환경의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필수사항입니다.
자율이 도덕적 불감증 또는 연구자원의 남용을 가져온다고 우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결과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열 마리의 개미가 있으면 그중에서 서너 마리의 개미는 일을 열심히 하고, 또 다른 서너 마리는 적당히 일을 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합니다. 만약 가장 일을 잘 하는 개미들만으로 다시 10마리를 만든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서너 마리는 열심히 일하고, 다른 서너 마리는 적당히 일하고 나머지는 게으름을 피운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개미에 중점을 두어야 할까요? 바로 일을 열심히 하는 서너 마리의 개미입니다. 게으른 개미를 견제하기 위해서 열 마리 모두를 적당히 일하는 개미로 만드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단기간에 달성한 연구업적과 수량만을 가지고 연구자를 평가한다면, 1, 2년짜리 단기연구만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1, 2년에 할 수 있는 연구라면, 우리보다 선진적인 나라에서는 반년 또는 1년이면 할 것이고, 뒤진 나라들도 2-3년이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의적이고 질 높은 연구는 대개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단기, 수량중심의 평가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다양한 평가기준과 관리기준이 필요하며, 연구 및 교육자들 스스로가 통제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4. 대학개혁과 한국의 미래
오늘날의 대학은 서구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사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유학자와 관료를 양성하는 기관이 있었으며 사설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가까운 시기인 조선에서는 성균관과 향교 등이 있었고, 그 이전 시대에는 국자감, 태학 등의 국가교육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들 교육기관의 역할은 바로 사회를 경영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과거와 같은 신분제도가 없으며 과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세계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를 경영하고 미래를 개척해 나갈 인재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과거시대보다 더 많은 인재가 필요하며, 더 창의적이고 과제해결 능력이 높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국사회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내어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인재가 필요합니다.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의 미래가 바로 한국의 미래입니다. 대학이 살아 움직이면서 제 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미래가 밝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모든 대학이 자율성과 독창성을 가진 교육과 연구의 중심지로서 제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대학개혁의 근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교육제도를 고쳐 창의성 발휘, 생산성 향상, 그리고 국제경쟁력 제고를 도모해야만 한국의 미래가 보장됩니다. 이를 위해 교육투자와 교육을 교육자에게 일임하는 자율성의 증대는 필수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