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강의: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 (2003.8.18)
등록일: 2009. 7. 3. 조회수: 20109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3년간 교수를 했고, 서울에서 25년간 교수를 해서, 총 28년 동안 교수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강의를 하기 전에 긴장을 했던 때가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의 최고의 브레인 집단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오면서 조그만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제가 15, 6년 전에 영국의 London School of Economics라는 곳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내에 있는 캠퍼스 때문인지 저에게 단독 연구실을 안 주고 다른 사람과 같이 쓰라고 해서 썼는데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경제학과의 주임교수에게, 미국대학들은 다 시설이 좋아서 방문교수에게 방 하나씩 주는데, 왜 영국은 그것을 못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They have facilities, we have the mind”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미국사람들은 facility가 있지만, 우리는 정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American university have the mind, too(미국 대학들도 정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지요. 그러자 앨 포드라는 그 교수가, “Well, then we have better mind”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법원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맑고 밝은 정신을 갖고 계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만, 계속 견지하셔서 우리나라 최고의 브레인집단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기에 와서 강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 강의록을 이리 바꿔보고 저리 바꾸어 보았지만 최종 강의록을 만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게다가 지난 주말에, 상당히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의 한 일선 기자가 한국경제에 관해 쓴 글을 읽고 상당한 공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루하실지 모르겠지만, 먼저 그것을 읽어 드리는 것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여기에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은 생략하고,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에서, 기업현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불황과 악전고투하는 당신은 부쩍 잦아진 정부 당국자들의 경기회복 발언에 반색할지 모르겠다. 경제정책운영을 책임진 부총리며 한국은행 총재 등이 올 하반기 중 회복세로 반전해 내년에는 5%대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을 경청은 하되 너무 깊게 믿지 않는 편이 좋다. 관리들 낙관론을 믿고 크게 투자하거나 사업을 왕창 벌였다간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 정부 말대로 머지않아 경기하강세에 바닥이 찍힐 가능성은 있으나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며 생산성이 나아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한국경제 감상법의 포인트는 경기와 경제를 구분하는 것이다. 경기는 단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순환적 흐름이고, 경제란 10년, 20년 지속가능한 잠재성장 능력을 뜻한다. 경기에 현혹돼 경제를 읽지 못한다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격이다. 확실히 경기는 점차 바닥에 다가서는 느낌을 준다. 재정투입이다 금리인하다 하면서 불을 땠던 경기부양의 약발도 나타날 것이고, 운 좋으면 미국발 훈풍도 불어올 조짐이다. 얼마 있으면 정부 당국자들이 개선된 지표들을 흔들며, 정부 잘 한 덕에 경제가 살아난 듯 떠들어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경기회복과 한국경제의 위기탈출은 별개 문제다. 설사 소비가 좀 잘 살아나고 투자며 수출이 일시 풀린다고 해서 경제가 지속가능한 성장궤도에 진입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중병에 걸린 환자도 가끔씩 기력좋은 날이 반짝 있는 법이다”라고 썼습니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그러면 무엇인가. 기업의 해외탈출 러시에서 보듯, 노사정의 낡은 시스템과 고비용, 저효율 구조 때문에 역동적인 성장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이런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이 과연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는가. 새 정부가 경기대책이 아닌 경제처방을 무엇 하나 변변히 실행한 것이 있느냐 말이다. 경기와 경제를 혼동해 낭패를 본 케이스가 일본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지만, 일본경제가 10여 년간 내내 제로성장을 겪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99년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3.5%였고 2000년에는 2.8%에 달했다. 일본의 실패는 이런 일시적 경기반등을 경제회생으로 착각한 점이다. 돈을 쏟아 붓고 금리를 낮춰 일시 성장률이 올라가자 그것으로 위기에서 탈출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 결과 개혁을 소홀히 하고 그것이 누적되어 초창기 침체를 자초했던 것이다. 어느 나라건 정부 당국자란 좋은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습성이 있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경제위기론이 무성했던 지난 4, 5월까지 청와대며 재경부 사람들은 올해 5% 성장이 가능하다고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전, 어두운 보도가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언론 탓을 한 일도 있다. DJ 정부도 그랬다. 지난해 6%대의 고성장을 경제실적으로 내세웠으나 실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처방대신 카드 빚과 부동산 거품을 마구 늘려 달성한 경기 불때기였을 뿐이다. 그 당시 주역들이 지금도 주요 정책라인에 포진해 있다. 거품경제를 만든 DJ 정권 말기의 어떤 차관은 지금 장관이고, 또 그 직전의 어떤 차관도 지금 장관이다. 또 다른 차관보 역시 현재 중요한 자리에서 카드 빚과 거품 만들기에 관여하는 주역이다. 경기가 좀 살아나면 이들은 또 다시 낙관론을 쏟아내며 실적을 홍보하겠지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정부 당국자들은 경기로 경제를 위장하려는 버릇이 있고 나중에 결코 책임지는 법이 없다. 한국경제가 중병에 걸린 지금은 경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경제를 지긋이 지켜볼 때다.”
이런 글을 제가 지난 주중에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만 하나 읽어보시면 끝나고, 강의할 필요도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기자가 쓴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용어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학자들이 쓰는 용어를 빌어서 먼저 경제를 보는 눈은 어떤 것인가를 소개하고, 그 눈에 입각해서 한국경제의 상황을 소개를 드린 다음에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중단기적 처방과 중장기적 처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실하게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강의 제목이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경제학자들은 전망을 잘 하지 못합니다. 마치 관상대와 비슷하지요. 지난날에 비가 왔다든지 눈이 왔다든지, 날이 맑았다라고 관상대에서 말은 잘 하지만, 앞으로 날씨가 어떨지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자들도 지난날의 얘기는 아주 잘 하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로, “예측은 틀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연의 제목을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이라기보다는 그냥 ‘한국경제 잘 나가고 있는가’ 라든지 ‘내가 본 한국경제’ 라는 등의 제목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경제를 보는 시각은 대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시 경기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 구조적 시각입니다. 거시 경기적 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를 하나의 커다란 숲으로 보고, 그 숲을 멀리서 망원경을 가지고 보듯이 경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미시 구조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 하나하나라든지 또는 나무와 나무간의 관계를 현미경을 가지고 보듯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읽어드린 신문기사에서 경기와 구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경제학자들은 각각 거시와 미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거시 경기적 시각은 무엇이고, 미시 구조적 시각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거시 경기적으로 경제를 볼 때는, 그 경제의 성장률, 고용, 물가수준, 이자율, 국제수지, 주가지수, 외환보유고, 환율,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이 경제를 거시 경기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경제를 구성하고 있는 기업의 수익률이라든지 기업의 국제경쟁력, 기업 활동의 투명성 같은 것을 보는 것은 미시 구조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지난 약 40년 동안 한국경제가 걸어온 길을 회고해 보면, 거의 예외 없이 거시 경기적으로는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거시 경기적으로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미시 구조적으로 보자면, 잘 안 보였지만 항상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밖으로 표출이 되면 그것을 위기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기업부실 문제라든지, 70년대 말의 중동건설 실패라든지, 80년대 중반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모두 어려울 때라든지, 90년대 후반에 겪은 외환위기라든지, 그런 것들은 미시 구조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경제체질이, 약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위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그냥 잘 견뎌왔고, 또 위기와 위기 사이에서는 경기부양책으로 경제가 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해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들어가서 거시지표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 또 미시적으로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장률로 보자면 지난 40년 동안 한국경제는 연평균 8% 성장을 해왔습니다. 실질치로 8%이니까 합하면 320%입니다. 산술 합으로 320%를 40년 동안에 이룩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150년 동안에 성장한 것을 산술 합으로 해도 320%가 못 되었습니다. 유럽의 프랑스건 독일이건 미국이건 이런 나라들이 150년 동안에 겨우 합해서 320% 정도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아마도 1960-90년대의 한국의 경제성장 기록은 앞으로 세계사에서 크게 기록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성장의 부작용도 많이 있었습니다. 환경이 파괴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균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빈부격차도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차도 있고, 도농간의 차라든지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불균형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절대적인 숫자로 보아서는 세계사적으로 남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8%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경제의 규모가 작았을 때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GDP이건 GNP이건 연 5백조 원 이상 되고 달러로도 5천억 내지 6천억 달러 정도 되는 나라가 8% 성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과거의 성장 신화를 잊어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2만 달러 구호를 내세우는 것은, 그것이 달성되면 마다할 것은 없지만, 그것을 달성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그것만큼 또한 불행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만 달러다 1만 달러다 하는 것은, 다르게 보면 계수 장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1달러 당 환율이 1,200원이어서 만 달러 전후에서 변동하지만, 1997년 겨울에 외환위기를 맞기 이전의 환율이었던 800원이라면 우리는 지금 1인당 국민소득 1만 5천 달러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1985년에 일본의 환율이 1달러 당 250엔에서 122엔으로 되면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 날로 미국의 1인당 소득을 달러 표시로 추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1인당 몇 달러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숫자는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현재 우리는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자꾸 경기부양을 가지고 여러 가지 논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용에 관해서 보겠습니다. 최근 1, 2년을 제외하면, 그 이전 시기에는 고용 측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를 제외하면, 실업률이 연 3, 4%인 경제라면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경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단지, 고용이 정규 고용이 아니라 임시 고용도 많다는 점이나 고용구조가 대기업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고, 중소기업은 인력채용도 힘들고 구직도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고용도 괜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가도 역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960, 70년대까지 물가상승률은 20~30%였습니다.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5공화국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만, 적어도 물가에 관한 한 1980대와 90년대에 모두 한 자리 숫자로 막을 수 있었고, 제 생각에 이것 역시 좋은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油價가 안정되는 등의 여러 가지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적어도 한 자리 숫자의 인플레이션율을 계속 유지했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제 물가에 관한 걱정은 덜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개방되게 되면 한 지역의 물가상승은 바로 수입을 유발하기 때문에,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으로 정의되는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 경제이론으로 보자면, 요새 오히려 걱정하고 있는 디플레이션보다는, 완만하기만 하다면 인플레이션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자율도 단군 이래 최초로 10% 이내로 떨어지더니 요즘에는 5% 이하로 떨어지고, 주가지수도 한때 200-300까지 갔지만, 지금은 7-800선에 있지 않습니까? 외환보유고도 1,300억이 넘어서서 오히려 처치하기에 곤란한 수준에 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무척 높다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7-8% 이자를 주고 꿔온 돈을 한국은행의 지하금고에 둘 수는 없는 것이기에 결국 예치를 해야 합니다. 예치를 하면 뉴욕에 있는 시티뱅크나 체이스 맨하탄 은행에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은행들에서는 이자를 아무리 많이 줘도 2, 3% 밖에 주지 않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우선 외환을 모으자는 의미에서 많이 빌려왔지만, 결국 우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1,30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외환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국제수지까지 포함해서, 거시적 측면에서 본 한국경제는 괜찮다고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1, 2년 전까지 성적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시 구조적으로 보겠습니다. 즉 기업의 수익률이라든가 국제경쟁력 같은 것들을 보면, 그 모습의 초라함에 상당히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진 통계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총자산수익률(return on asset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조업에서의 총자산수익률이라는 것은, 자산에 비해서 수익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한국은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총자산수익률이 너무 하락했고,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너무 낮은 상황입니다. 즉, 어떻게 정의하든가에 한국의 기업수익률이 역사적으로도 떨어져 왔고, 해외비교를 해도 낮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1960년대는 8.5, 70년대는 4.3, 80년대는 2.6, 90년대 와서 1.4로 하락했습니다. 90년대의 총자산수익률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일본이 역시 낮아서 3.4, 독일은 10.2, 타이완이 5.6, 미국이 6.7입니다. 즉, 거시 경기적으로는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경제가, 미시 구조적으로 보면 하나의 지표로서, 경제의 실물부문에서 제조업의 총자산수익률이 계속 떨어져왔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무척 낮기 때문에 걱정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의 금융부문을 보면, 먼저 금융부문의 부실채권이 역사적으로 아주 많습니다. 제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금융기관의 부실채권에 대해서 공부를 해왔는데, 지금은 우리은행인 한빛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 한일은행의 부실채권이 1987년에 각각 40%, 20%였습니다. 부실채권의 정의는 자세히 설명을 안 드리겠지만, 미국식으로 엄격하게 정의할 때 각각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1988년에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증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부실채권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한일은행은 10%, 상업은행은 20%, 외국계 은행은 4-5%였습니다. 90년대 들어서서 많이 떨어졌지만, 은행이 아직도 3-4%대이고, 상호저축은행이라든가 투신사와 같은 제 2 금융권은 아직도 20% 전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금융기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부실채권비중이 1, 2%만 되면 금융감독 당국에서 해당 금융기관에게 경고신호를 보내는데, 우리나라는 모두 높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신호를 보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거시 경기적으로는 좋은데 미시 구조적으로는 나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따지자면, 거시 경기적 상황이 체온이고, 미시 구조적 상황이 체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체질은 나쁜데 체온이 좋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지난 3, 40년 동안 우리가 운영해온 경제는, 체질을 키우는 데는 신경을 별로 못 쓰고, 아까 기자가 얘기한 바와 같이 자꾸 경기 불때기 노릇만 해서 경기는 계속 되어왔고, 그것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 97년 후반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후 잠깐 동안 98년, 99년 초까지만 해도, 이제는 거시 경기가 아니라 미시 구조다라는 생각에서 구조조정을 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IMF의 차입금을 다 갚더니, 이제 체질개선이 다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경기 불때기를 또 계속해서 오늘날 한국경제에 다시 어려움을 가져왔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2-3년 전에 신용카드를 고등학생에게까지 발급해주고, 특소세를 면제해주고, 아파트 분양권의 전매를 허용하는 등의 무리한 정책을 통해서 경기를 살려놓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기가 살아남으로 해서, 드디어 작년과 올해 그리고 내년까지 경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면 좋겠지만, 미시구조를 고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실패하게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체질은 약하지만, 약한 체질의 경제에 그 때 그 때마다 경기부양이라는 링거주사를 주어서 생기를 유지시켜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한국이 거시는 괜찮은데 경제의 체질은 괜찮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경제에 축적된 문제점이라는 것은, 과거 한국경제의 체질이 허약하게 된 원인, 또는 미시 구조적으로 허약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총량위주의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것은 정부에 의한 인위적인 자원배분과 경쟁제한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부는 유망산업을 선정해서 기업별로 사업영역을 구분해 주었고, 은행을 산업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해서 산업별ㆍ기업별로 자금지원규모를 결정ㆍ집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기업들을 경쟁과 자금동원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성장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경제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서구 여러 나라들이 100, 200년에 걸쳐서 이룩한 성장을 불과 30여년 만에 이루어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이런 압축성장과정은 경제제도의 왜곡ㆍ심화과정이었습니다. 경제를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으로 나누어 보았을 때, 우선 실물부문에서의 중복, 과잉투자가 경제의 효율성과 신축성을 떨어뜨리고 거품경제를 야기 시켰으며, 금융부문에서는 대출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결과 부실대출을 양산했습니다.
우선 실물부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장원리의 기본법칙은 적자생존입니다. 이윤을 내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기업은 뒤쳐지고 효율적으로 이윤을 내는 기업만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가 한국에서는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대기업은 고도성장을 목표로 한 정부의 보호 속에서 몸집 불리기를 계속 해왔고, 그 와중에 한국경제가 효율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재벌들이 공급과잉으로 재고조정에 실패하고, 시설투자에 주력하다가 자금회수가 늦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금융비용이 급증해서 현금흐름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1997년에 대기업의 연쇄도산이 발생하면서 경제위기를 촉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중복과잉투자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비효율을 낳게 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첫째, 한국에서는 내적기준이 아닌 외적기준에 따라서 기업이 평가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제도가 잘 발달된 나라에서는 기업규모보다는 수익성이 기업성패를 좌우합니다. 기업이 작다는 이유로 투자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인프라스트럭쳐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규모와 같은 외적 신호가 금융기관이나 정부와의 협상과정에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수익성과 같은 내적기준의 정확한 산정이 불가능하면 금융기관은 외적 기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규모가 큰 기업은 담보제공능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설혹 사업계획이 실패한다고 해도 국가경제에 대한 파급효과를 우려한 정부로부터 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규모만 크면 망하지 않는다, 즉 ‘Too big, to fail’이라는 원리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서 대마불사의 신화를 창조해왔고, 이것은 아직도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에 따라서 기업은 이윤극대화보다는 규모극대화를 추구해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중복과잉투자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재벌들의 교차소유구조가 중복과잉투자를 심화시킨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A기업이 B기업에 투자하고, B가 다시 A에, 또 B가 C기업에 투자하는 등의 교차투자를 함으로써, 재벌의 오너이 3, 4%의 작은 소유지분으로도 기업의 의사결정권을 모두 행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무도 그것을 견제할 장치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정부나 금융기관도 이른바 도덕적 해이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금융기관이 위험한 투자계획을 가지고 있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서 손실을 보더라도, 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손실을 보전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금융기관은 이른바 downside-risk보다는 upside-gain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것이 비효율적인 투자가 집행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과거 3공이나 유신, 5공, 6공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정부가 정치적 정통성을 결여하거나 일을 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로서, 국민에게 경제적으로 보상해주기 위해서 가시적 성장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성장에 도움만 된다면 기업에게 분별없이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중복, 과잉투자를 가져왔고, 기업의 현금흐름을 나쁘게 하였습니다. 기업의 현금흐름이 나쁘니 채무상환이 안 되고, 은행에는 부실채권이 쌓였습니다. 결국 은행도 기업도 모두 어렵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어떻게 거시 경제적으로 성공했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에 대해서 대개 경제학자들이 내세우는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는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이 용이했고, 노동력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이 단순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87년 이후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었고, 기술을 쉽게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이 단순했기 때문에 쉬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6, 70년대는 유엔이 설정한 개발의 십 년대에 외국의 원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70년대에는 중동건설 붐이라든지 오일 달러의 환류라든지, 80년대의 3저 현상과 같은 것들이 모두 고도성장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어려워지고, 그 클라이맥스가 마침내 1997년에 경제위기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금융부문에서는, 이미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은행이 기업들의 대출신청을 심사를 한 후에 빌려줘야 하는데, 심사를 할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고 심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만한 대출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부실채권의 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미시적 측면과 거시시적 측면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를 맞은 후에 한국경제가 제대로 했는지 여부를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지만, 97년 말의 외환위기 이후에도 거시 경기적으로 보면 경제가 그리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의 잠재성장능력에 비해서 더 많이 성장했고, 물가도 안정되었고, 국제수지도 단군 이래 가장 큰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장은 오래 못 가는 법입니다. 6% 성장은 무리한 경기부양책 때문이었고, 물가는 개방경제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제수지는 수입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거시 경기적인 측면 이외에, 미시적으로 보면 어떠한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실물부문을 살펴보면 1999년 이후에 지속된 정부의 저금리 유지정책 때문에, 상당수의 이른바 망해야 할 한계기업들이 퇴출되지 않고 생존함으로써 시장내 잠재부실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자보상배율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영업이익을 차익금 이자로 나눈 것이 이자보상배율입니다(=영업이익/차입금이자). 1보다 크다면 이자를 낼 정도의 영업이익을 거두는 것이고, 작다면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작아서 영업이익이 금융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제조업체가 1999-2000년 동안에 30%에 달합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기업이 30%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이런 일들을 시장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나가라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미만이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되면 자동퇴출하는 제도를 만들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생존한 기업 중에 3년 이상 1 미만인 상황이 계속된 업체수가 5%입니다. 그러니까, 한국경제의 미시적인 상황을 1999-2001년이라는 어느 시점에서 보면, 30%의 기업들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고 있고, 그런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5%나 된다고 하면, 적어도 아직까지 한국의 실물 기업의 구조조정은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앞날이 그리 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차 말하지만, 98년도부터 좀 고통스럽더라도 어려운 기업들이 비록 그 규모가 크더라도 퇴출되도록 놔두던지, 아니면 기준에 따라 퇴출시키던지, 아니면 두 가지를 모두 시행하든가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기가 힘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를 진작시켜서 경제부처 장관들의 실적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정책들로 인하여 구조조정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금융부문은 조금 전에 미시 구조 설명할 때에 부실채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2003년 3월말 기준으로 국내금융기관이 보유한 부실채권 규모는, 느슨한 한국기준으로도 35조원입니다.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던 은행권의 부실비율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지만, 제 2 금융권의 부실채권 문제가 어렵습니다. 제 2 금융권 중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보험사와 증권사는 상대적으로 건전하지만, 증권투신사, 상호저축은행, 리스사의 부실은 심각합니다. 3월말 기준으로 보험사, 종금사의 부실비율은 각각 3.9, 5.6이어서 은행과 비슷한 수준인데 비해서, 증권투신사, 상호저축은행, 리스사의 부실비율은 각각 36%, 15%, 15%입니다. 이렇게 부실채권이 많으면 정상적인 금융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서, 경제위기 이후 금융회사의 대출행태 변화에 따른 가계부채의 급속한 팽창이 자금흐름의 불균형 현상을 유발하면서, 금융시장 안정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가계부채는 97년에 247조 원에서 2003년 3월에 462조 원으로 되었습니다. 기업부채는 같은 기간 동안에 644조 원에서 699조 원으로 증가하는데 그쳤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계속 된다면, 과거의 금융위기가 기업이 은행부채를 갚지 못해서 외환위기 또는 경제위기가 왔던 것처럼, 앞으로는 가계들이 한편으로는 빚을 못 갚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가 불황에 빠져서 오히려 물가가 하락한다면, 가계부채의 실질치가 커져서 가계는 훨씬 더 소비를 줄여서 경제가 제2의 위기로 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시하는 경제학자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경제를 보는 눈은 거시 경기적, 미시 구조적이라는 두 가지 눈이 있는데, 한국경제는 지난 40년 동안에 거시 경기적 측면에서는 거의 우등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시 구조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시 구조적으로 나쁜데도 불구하고 거시 경기적으로 좋았던 이유는, 경기정책을 많이 썼고 대외경제조건도 좋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 냉전의 해소를 포함해서 국제적 상황이 나빠졌을 뿐만 아니라 자체 노력을 소홀히 한 결과, 과거에도 거의 10년에 한 번씩 조그만 위기가 나타났지만, 드디어 큰 위기가 97년 말에 나타나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98년부터 우리의 체질을 고쳐보자는 논의와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을 모두 갚으면서 또 다시 구조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경기 문제만 생각하다가, 지난 2-3년간 반짝 경기는 경험했지만, 다시 구조문제가 고쳐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은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선 구조조정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조조정에 대해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구조조정이 무엇인지 알고, 구조조정을 행할 추진력이 있는 사람들이 경제를 맡아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 분야에서 개혁주체를 한 번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한국은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미국은 이러하고 다른 외국은 이런다 해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저절로 해결될텐데 자꾸 정부가 개입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시장체제가 만족스럽게 확립되지 않은 경제에서는 아직도 정부가 개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체를 사실은 대통령이 잘 정비하고, 개혁주체들에게 대통령이 상당한 권한을 부여해서 기본적으로는 경제를 시장에 맡기되, 구조조정은 정부가 상당한 작업을 하도록 하는 개혁적 케인즈주의를 우리가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케인즈주의라고 하는 것은 시장이 확립된 경제에서, 거시 경기적 상황이 너무 들끓으면 진정시키고, 너무 냉각되면 부양시키자는 것이 기본적인 케인즈주의입니다. 시장경제가 확립된 곳에서 거시 경기가 나쁠 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케인즈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입장이 시장주의입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확립되지 않은 곳에서는, 거시적 케인즈 정책뿐만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시장 확립을 위한 제도의 개편 등을 하는 미시적 케인즈주의가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실물이건 금융이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은 간단하게 두 마디입니다. 하나는 실물기업이건 금융기업이건 그 활동상황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것입니다.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아무도 투자하려 들지 않고, 경제활동이 경제활동에 끝나지 않고 비경제활동에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적자생존의 원칙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잘 되는 기업은 시장에서 보상을 받고, 잘 안 되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문을 닫고 싶은데 정부가 사회적 충격을 고려해서 못 닫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정부는 문을 닫기 원하지만 문을 닫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재벌 그룹이 기업을 4-5 개 갖고 있고, 그 중에서 한 기업이 만약 3년 이상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이라면 문을 닫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재벌 그룹의 본부에서 그 기업을 키우고 싶은 생각에서 잘 되는 B기업의 이윤을 그리 돌려서 안 망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국가적인 자원배분 측면에서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망하도록 내버려두고, 또 그룹 내의 망해야 기업들은 정부가 문을 닫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투명성이고, 하나는 적자생존의 원칙인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겠습니까. 가장 큰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이 실업입니다. 실업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갖가지 정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것들이 단기ㆍ중기적 정책이라고 한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중ㆍ장기적 정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중장기적으로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입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이 교육을 통해서 더 좋은 인재를 길러내자고 하는 것이고, 외국 사람들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지난 7월 하순에 ‘차세대 성장엔진’에 관한 국제회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기 소르망이라든지 폴 로머라든지 모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이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대학에 있는 사람으로서 ‘참 옳은 말이다, 내 생각과 같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세계가 개방되었기 때문에 자본이 부족해서 경제를 운영하지 못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외국자본이 들어오기 싫어해서 그렇지, 환경만 마련해주면 자본은 무제한적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WTO 체제 하에서도 사람의 이동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는 우리가 푸는 것입니다. 인적자원은 우리가 개발하고 물적 자본은 외국에서 들여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적 자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좋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중ㆍ고교 입시를 부활하자는 것입니다. 고교평준화를 없애자는 것이지요. 중학교는 몰라도, 고교입시는 부활하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서울대학교를 포함하여 대학들, 특히 주요대학은 정원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른 대학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서울대학은 과거의 입시제도로부터 완전히 탈피해서 사람을 다양하게 뽑자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고교 입시를 부활하자는 것은 이미 십 년 전에 쓴 것입니다. 93년 7월 29일에 쓴 것인데, 이 때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전화가 학교와 집으로 50여 통 왔습니다. 전화를 해서,
“당신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
“XX 학교 나왔습니다.”
“그럼 그렇지 너희 학교 부활하려고 그러는구나” 라는 식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저의 생각은 같습니다. 주요 부문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육은 자기 개발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차원에서 볼 때, 교육은 창의적 인간을 길러내며, 또한 창의적 인간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제고시키므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육투자, 즉 인적자본의 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적으로는 몰라도 공적 교육투자가 GNP 대비나 국가예산 대비 등 어느 모로 보나 보잘 것 없습니다.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저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교는 지금 학생 수가 6,800명입니다. 학부학생 수가 4,400명, 대학원생수가 1,400명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1년 예산이 10억 달러입니다. 원화로 하면 1조가 넘습니다. 반면 저희 서울대학교는 재적 학생 수가 38,000명이고, 등록 학생 수가 33,000명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주는 예산은 2,500억원, 즉 2억 달러 정도가 됩니다. 6,800 명인 학교가 10억 달러를 쓰는데, 3만 3천 명인 학교가 2억 달러를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는 기성회비를 걷어서 1억 달러 정도가 됩니다. 그 밖에 외부 연구비 등을 모두 합하여도 5억 달러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학교가 10억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학교는 6배인데 예산은 절반이니 1인당 예산은 10분의 1밖에 안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돈을 써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이 교육자에게 맡겨져 있지 않고 정부 관리의 손 안에 있는데 있습니다. 관리가 경제를 좌지우지 하면 경제가 잘 안 되듯이, 교육도 관리가 지휘하면 어렵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말씀 드렸지만, 그것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시장에 맡기되 어려우면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정부가 거의 도맡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가장 심각한 교육문제는 수재와 범용한 학생이 똑같이 취급받는데 있습니다. 교육은 수월성을 추구해야 함에도 한국교육은 쉽게만 가르치려 하고 평준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제 중학교 입시가 없어진 지 아시죠? 어느 대통령 아드님이 중학교 들어갈 때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그 아드님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고교 입시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의 교육정책이 그런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80년대 초반에는 어느 대통령 아들이 군대갈 때쯤 되서 6개월짜리 석사장교 제도가 생기더니, 그 다음 대통령 아들이 석사장교를 마치자마자 그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중고교 평준화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당시 장관하던 이들이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하던 정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때 물론 이유는 다 있었습니다. 30여 년 전, 평준화는 자라나는 새싹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키자는 명목으로 먼저 중학교 입시를 없애고, 3년 후 고등학교 입시까지 없앤 후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입시지옥은 과거보다 훨씬 긴 터널로 변했고, 그 강도 또한 훨씬 높아졌습니다. 대학졸업장이 능력과 인격을 재는 척도가 되고, 모든 부모가 법관이나 의사인 자녀를 두길 원하는 사회구조에서 입시지옥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표준적인 어린이가 대학, 특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면, 유치원부터 14년 동안 입시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들은 빈부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능력도 따질 것 없이, 태권도, 수영, 붓글씨, 미술, 피아노, 속셈, 영어 등을 마구잡이로 배우지 않습니까? 때로는 부모의 권유로, 때로는 친구를 따라 목적의식 없이 학원에 갑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꼭 배우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과목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서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새는 뭐까지 가르치려고 하냐하면 경제까지 가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경제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중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고등학생들에게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경제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더 가르치면 다른 것은 전혀 생각 안 하고, 돈벌이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여러분 박정희 대통령 때를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얼마나 경제 마인드가 투철한가 하면, 정신교육을 시킨다고 하고서는 그 정신교육을 제 2의 경제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제 2의 경제라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지금 경제교육을 시킨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만 영어를 잘 하면 됐지 4,800만이 모두 영어를 잘 해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이것은 국가의 큰 자원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이 끝나면, 부모와 거주하는 학군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강제로 배정받아서 10여 과목을 외웁니다. 내신을 의식하며 모든 과목을 다 하자니 어느 것 하나인들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등생과 지진아가 같은 학급에서 배우자니 애로가 많습니다. 우등생 중심으로 하면 열등생이 못 따라오고, 열등생을 중심으로 하면 우등생이 흥미를 잃습니다. 결국 학교는 교육을 포기하고, 학부모는 과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평준화된 학급에서 창의적인 인간을 길러낸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평준화는 수재를 바보로 만들 뿐입니다. 또 하나는 중고교 과정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의 자녀만이 과외를 할 수 있다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유수한 대학의 인기학과 학생 대부분이 부자집 자녀이거나 극성스런 부모를 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습니다. 서울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인데 반해서, 서울대학교에서 서울 출신이 40%입니다. 그리고 40% 학생의 대부분이 서초, 강남, 송파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중ㆍ고등학교 때 과외를 잘 시키지 않으면 대학에 잘 못 들어온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파출부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 파출부는 중‧고등학교 과외는 못 시킨다 하더라도, 중학교 입시가 생겨나서, 매일 번 돈으로 초등학교 6년 동안만은 잘 지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일찍 철이 나서 괜찮은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중학교에서 잘 가르쳐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 된다면 한국의 빈곤층과 부유층, 혹은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간격이라는 것은 영원히 고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0년 전에 저에게 항의가 왔을 때, 중고교 입시부활문제가 효율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은 형평의 문제라고 설명을 했었습니다. 10년 전이라 중고교라고 했지만, 지금은 중학교는 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중고교 입시를 부활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어떤 학생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 입시지옥은 완화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학생들이 한편으로는 비슷한 또래들끼리 경쟁하며 자신을 개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유를 갖고 특별활동을 맘껏 하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면 창의성이 개발될 여지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릴 때 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놀리는 방법은, 대체로 하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심어준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대학에 입시성적이 괜찮은 중ㆍ고등학교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성현들은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훌륭한 교육은 백년 후의 한국을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의 효과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단기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교육투자를 더욱 늘리고 교육을 교육자에게 맡기는 동시에, 교육제도를 빨리 고쳐서 창의성 발휘, 생산성 향상, 국제경쟁력 제고를 기대해 봅시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중고교 입시부활입니다.
두 번째로는 대학을 구조조정하자는 것입니다. 대학도 잘 안 되는 대학은 문을 닫고, 지금 잘 되는 대학도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루하시겠지만 꼭 들어주십시오.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준비한 것입니다.
대학의 미래는 바로 한국의 미래입니다. 대학이 살아 움직이면서 제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학은 사람들에게 지식, 지혜, 자긍심, 자기통제력, 사명감, 타인에 대한 감수성, 비판정신 등을 교육해서 창의성을 개발하고 경륜을 키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과거 3, 40년을 뒤돌아보면, 한국의 대학은 선진과학이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하는데 상당히 효율적이었습니다. 선진 국가들과 지식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대학은 교수들이 외국대학에서 습득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역할로 충분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한 후에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서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전체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나라에서 연 8%의 고도성장을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인 중의 하나는 한국이 사람을 길러내는데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선진 국가들과 기술격차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한국의 대학은 지식을 전수만 할 것이 아니라 창출까지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아직도 지식창출이 아니라 지식전수 중심대학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성장한 양상과 비슷하게 대학도 역시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부족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SCI라는 것이 있습니다. SCI는 Science Citation Index이라는 것인데, 필라델피아에 있는 ISI라는 회사에서 세계의 유명한 학술지 4천 개를 선정한 후에, 그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사람들의 어느 국가와 어느 대학 사람인지를 따져서 랭킹을 매기는 것입니다.
한국은 12등입니다. 경제력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울대학교가 SCI의 34등입니다. 이는 밖에 나가서 크게 자랑할 일입니다. 세계에 대학이 1만 5천여 개 있는데, 그 중에서 34등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네 개 대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는데, 동경대학, 경도대학, 동북대학, 구주대학이 앞서 있는데, 우리보다 유리합니다. 4천 개 학술지 중에서 일본어 학술지는 78개이고, 한국어 학술지가 7개입니다. 제가 한국어 학술지에만 써도 SCI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78개 대 7개는 비교가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럽에서 옥스퍼드와 켐브리지만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브라질 대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멕시코 대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나머지 대학은 모두 미국대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자연과학자들의 논문이 피인용 되는 도수는 34등이 못 됩니다. 서울대학교의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의 교수들 중에서 논문이 피인용 되는 횟수가 1,500회 이상인 사람이 20 명 정도 됩니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약 4,500회 정도 인용되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노벨상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적으로는 몰라도 양적으로 크게 성장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국경제가 성장한 양상과 비슷하게 대학 역시 양적으로는 성장했으나 질적으로는 부실한 상태입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경제는 중복투자로 인하여 몸살을 앓아왔고, 그 결과 실물부문의 수익률이 낮고, 금융부문에 부실채권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97년에 겪은 경제위기입니다.
그런데, 대학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팽창하며 한국경제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교육시설 부문에 과잉투자를 일어났고, 대학생 수는 시설투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대학은 구조조정 측면에서 한국경제보다 한 발 뒤쳐져 있습니다. 한국경제는 좋던 싫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미진하나마 구조조정이 진행되었습니다. 투명성도 어느 정도 제고되었고, 수익을 못 올리면 업계를 떠나야 한다는 인식도 상당히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육분야는 구조조정의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대학의 부실팽창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경제와 마찬가지로 대학도 이른바 나도주의(me-tooism)에 젖어서 팽창을 계속해 왔습니다. 대학들은 나도주의에 따라 한 대학이 종합대학을 하면 다른 대학도 동참을 해야 손해를 안 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대학이 커다란 종합대학이 되었고, 과잉규모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모두 종합대학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과기원인 KAIST도 과거에는 원장이었는데 지금은 총장이 되었고, KDI의 국제정책 대학원도 지금은 총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 대학도 한국 경제처럼 규모의 경제를 과신했습니다. 대학은 이런 논리에 따라서 규모를 키우고 학생 수가 많아지면 원가 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집착해 왔고, 계속 팽창노선을 걸어왔습니다.
셋째, 국가정책 목표에 따라 대학은 사회의 장기적인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적으로만 공급 측면을 따라서 학생 수를 늘려왔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고급 노동력이 부족해서 공대학생 수를 늘리고자 해서 한 대학이 정원을 늘리면, 다른 대학도 모두 공대육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가 대학원 중심대학을 한다고 하니, 다른 대학도 대학원 중심 대학을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 때에 영호남에서 지방대학을 육성한다고 하니 다른 지역에서도 모두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4년제 대학이 200개이고, 전문대학이 160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서울대학에서 대학원 중심대학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외교학과 교수이던 분이 문교부 장관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기획실장이 찾아가서 서울대를 도와달라고 했더니, 서울대가 다른 모습으로 지원해 달라고 하라고 해서 만든 아이디어입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지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다른 대학도 대학원 중심대학을 해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 우리나라의 대학원 학생 수가 인구 1천 명당 6.1명이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미국은 3.9명, 일본은 1.7명입니다. 대학도 지금 학생 수가 전체 인구 대비 4.08%입니다. 세계 1위입니다. 대학이 매우 커졌는데, 우선 대학원을 줄여야 합니다. 신문에 가끔 나오지만, 서울대의 정원이 너무 늘어나다 보니 정원도 못 채우고 있습니다. 서울대가 정원을 못 채우니, 지방대학은 물론이지만 다른 대학도 못 채웁니다. 정원을 못 채우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의 세무서장이라든지 도 경찰국장이라든지 하는 분들이 모두 대학원에 들어갑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다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지자에 대한 지방대학의 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서울대가 너무 커져서 지방 대학이 죽고, 지방 대학이 죽으니까 서울대학교 대학원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위해서도 지방대학을 위해서도 대학원을 줄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지난 1년 동안에 총장하면서 줄인 인원이 겨우 300명입니다.
지금 서울대의 대학원생 수가 1만 천명인데, 세상에서 이렇게 큰 대학원은 없습니다. 숫자로 비슷한 대학이 하버드대와 동경대, 콜럼비아대, 예일대학인데, 그 대학들은 1만 1천 명 중에서 3천 명 정도만 일반대학 대학원생이고, 나머지 대학원생들은 모두 법과대학, 상과대학, 신학대학 대학원생들입니다. 하버드에 일반학위를 취득하는 대학원생 수는 3,500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1만 1천 명이 모두 일반학위를 취득하고 있습니다. 전문대학원이라고 알려진 환경, 보건, 행정대학원 학생들조차도 전문대학원 학위를 받았다가는 열등으로 보일까봐서 모두 일반학위를 취득하고 있습니다. 일반학위를 취득하는 다른 큰 대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큽니다. 그래서 줄이려고 교수를 설득했습니다만 300 명밖에 줄이지 못 했습니다.
제가 앞으로 3년 동안 반 정도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각 교수들에게 일정 시점에서 대학원생을 2-3명만 받도록 하고, 그에 대해서는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지급하고, 그 이상의 대학원생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연구비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뽑도록 하는 식으로 해서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학생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대는 지금 계속 줄여서 4천명을 뽑는데, 연대와 고대는 만 명 뽑습니다. 결국 세 대학에서 1년 동안 약 만 오천여 명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한편 하바드 대학의 경우에 1년에 1,500명 뽑습니다. 그리고 예일대가 1,300명, 프린스턴 대학이 1,200명, 콜럼비아 대학이 1,200명을 뽑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미국에서 가장 좋고 크다는 사립대학에서 배출되는 학생 수가 10개 대학에서 1만 명이 잘 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3개 대학에서 15,000명이 나오지요. 미국은 인구가 2억 8천이고, 우리는 인구가 4천 7백만입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만 오천 명을 이른바 산의 요새에 보낸다면, 이른바 SKY로 불리는 대학 출신의 사람들로 모두 채우게 되기 때문에 사회통합이 매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상황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무현의 대통령의 학벌철폐운동이라든지 대학서열 철폐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것은 사회 형평성에서 뿐만 아니라 효율성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1년에 4천명을 뽑아서 절대로 교육을 잘 시킬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작년에 서울대 학생들이 너무 기초가 부족한 것 같아서 ‘글쓰기 훈련센터’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만들다보니 예산을 3억 밖에 투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입생들이 많이 듣는 12개 학과목에 대해서만 한 학기에 두 번 정도 글을 써오라고 하고, 전문가들이 첨삭과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4천 명이다 보니 엄두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서 학생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는 외국에서 3, 400년 동안 대학을 운영해 온 사람들이 만든 제도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를 통해서 서울대의 질을 높이고, 그것이 결국은 지식전수 단계에서 지식창출의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학생 수를 줄이고 교육을 더 잘해야 하겠는데, 어떤 학생을 가르칠 것이냐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 똑같은 학생을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전국의 행정구역이 232개인데, 서울대에 학생을 하나도 못 넣는 행정구역이 72개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몇 군데만 말씀드리자면, 전남 강진, 충남 보령, 경남 산청, 서울의 성동구가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고 그렇습니다. 사실 서울에서야 상관없겠지만, 전국의 72개 지구에서 못 들어온다는 것은, 20년 후에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전부 일부 지역 출신들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20년 후에 한국의 지도자들이 지역적으로 골고루 퍼지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똑같은 학생들만 모아놓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모아놓으면 다양한 간접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좀 다른 생각을 할 기회가 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창의성이 개발되고, 그것이 바로 지식전수단계에서 창출단계로 가는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 중의 하나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다양하게 뽑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지역균형제’입니다. 처음에 지역할당제라고 했더니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특히 학내에서는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뽑는다고 비판이 많았지만, 지금은 학내에서도 지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지를 얻게 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수학능력시험이 학력의 기준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까지 내신으로만 뽑다가, 갑자기 수능으로만 2-30%를 뽑는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학력저하라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즉, 만약에 과거에 수능이 아니라 내신기준으로 뽑았다면 내신이 기준이 되지 않았겠느냐?라고 해서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뽑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각 지역에서 적어도 5명은 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서 배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고, 법적으로 위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남지역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소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내신으로 뽑자고 생각했습니다. 내신으로 뽑으면, 지방에서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전과목에서 1등 하는 것이, 강남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1등하는 것보다 쉽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사전적으로 내신으로만 뽑지만, 사후적으로는 골고루 들어올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중이 4,000명 중에 800명 정도만 내신으로 뽑자는 것입니다.
그 외에 거의 수능만으로도 뽑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잘 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수능 중심으로도 뽑고, 내신으로도 뽑고,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한 사람도 쉽게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처지를 고려해서 국내 올림피아드는 무시했습니다. 또한 지원서 낼 때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 쓰는데 100만 원짜리 과외를 한다고 해서 그것도 무시하기로 하고, 추천서 받아오라고 했더니 그것도 한 장에 100만원이라고 해서 모두 없앴습니다.
그래서 수능만으로나 내신만으로, 올림피아드로 뽑기로 한 것입니다. 그 외에 다양한 기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기준에서 사람을 뽑아 놓으면, 그들이 다양한 인적 관계를 구성해서 창의성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실물부문에서의 구조조정, 금융구조부문에서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은 단ㆍ중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시정책은 아주 단기적인 것이고, 구조조정은 단ㆍ중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중ㆍ장기적으로는 결국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지금까지 해 온 방식으로는 곤란하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와는 간접적으로만 관련되는 것이지만, 고교입시를 부활했으면 좋겠고, 직접적으로는 우리 학생 수를 대폭 줄이고, 연ㆍ고대에도 줄이라고 해야합니다. 대신에 교육부나 정부에서 5-10년 정도는 재정지원을 해줘야 할 것입니다. 갑자기 연ㆍ고대에서 등록금수입이 줄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희 학교도 다양성 있게 학생을 뽑으려고 하는데, 다른 대학교에도 권장을 할 생각입니다. 방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외대에서도 저희와 같이 하려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경북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북대를 포함한 지방 국립대학에서 제가 아주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울대학에서 싹쓸이 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원 외에서 뽑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정원 내에서 뽑기 때문에, 지역균형 선발제 때문에 못 들어온 학생이 다른 대학으로 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중ㆍ장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잘 되면 앞으로의 한국경제는 그렇게 어둡다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시청이나 광화문 앞에 나가 보십시오. 한국사람들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런던이나 베를린의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반짝거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경제 하려는 의지가 투철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절대 망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단기간에 구조조정이 안 되어서 다시 어려움을 겪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지만, 제가 말씀드린 방향으로 노력을 한다면 장래가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미도 없는 말을 오랫동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3년간 교수를 했고, 서울에서 25년간 교수를 해서, 총 28년 동안 교수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강의를 하기 전에 긴장을 했던 때가 과거에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여러분들이 대한민국의 최고의 브레인 집단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오면서 조그만 생각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제가 15, 6년 전에 영국의 London School of Economics라는 곳에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시내에 있는 캠퍼스 때문인지 저에게 단독 연구실을 안 주고 다른 사람과 같이 쓰라고 해서 썼는데 상당히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의 경제학과의 주임교수에게, 미국대학들은 다 시설이 좋아서 방문교수에게 방 하나씩 주는데, 왜 영국은 그것을 못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They have facilities, we have the mind”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미국사람들은 facility가 있지만, 우리는 정신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American university have the mind, too(미국 대학들도 정신을 가지고 있다)라고 했지요. 그러자 앨 포드라는 그 교수가, “Well, then we have better mind”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법원에 계시는 여러분들이 맑고 밝은 정신을 갖고 계실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만, 계속 견지하셔서 우리나라 최고의 브레인집단으로 계속 남아있기를 기원합니다.
사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기에 와서 강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 강의록을 이리 바꿔보고 저리 바꾸어 보았지만 최종 강의록을 만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게다가 지난 주말에, 상당히 정부에 비판적인 신문의 한 일선 기자가 한국경제에 관해 쓴 글을 읽고 상당한 공감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루하실지 모르겠지만, 먼저 그것을 읽어 드리는 것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여기에 구체적인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만 이름은 생략하고,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장에서, 기업현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불황과 악전고투하는 당신은 부쩍 잦아진 정부 당국자들의 경기회복 발언에 반색할지 모르겠다. 경제정책운영을 책임진 부총리며 한국은행 총재 등이 올 하반기 중 회복세로 반전해 내년에는 5%대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말을 경청은 하되 너무 깊게 믿지 않는 편이 좋다. 관리들 낙관론을 믿고 크게 투자하거나 사업을 왕창 벌였다간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 정부 말대로 머지않아 경기하강세에 바닥이 찍힐 가능성은 있으나 우리 경제의 경쟁력이며 생산성이 나아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한국경제 감상법의 포인트는 경기와 경제를 구분하는 것이다. 경기는 단기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순환적 흐름이고, 경제란 10년, 20년 지속가능한 잠재성장 능력을 뜻한다. 경기에 현혹돼 경제를 읽지 못한다면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격이다. 확실히 경기는 점차 바닥에 다가서는 느낌을 준다. 재정투입이다 금리인하다 하면서 불을 땠던 경기부양의 약발도 나타날 것이고, 운 좋으면 미국발 훈풍도 불어올 조짐이다. 얼마 있으면 정부 당국자들이 개선된 지표들을 흔들며, 정부 잘 한 덕에 경제가 살아난 듯 떠들어댈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경기회복과 한국경제의 위기탈출은 별개 문제다. 설사 소비가 좀 잘 살아나고 투자며 수출이 일시 풀린다고 해서 경제가 지속가능한 성장궤도에 진입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중병에 걸린 환자도 가끔씩 기력좋은 날이 반짝 있는 법이다”라고 썼습니다.
“한국경제의 구조적 문제는 그러면 무엇인가. 기업의 해외탈출 러시에서 보듯, 노사정의 낡은 시스템과 고비용, 저효율 구조 때문에 역동적인 성장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지난 몇 개월간 이런 경제의 구조적 문제들이 과연 조금이라도 개선되었는가. 새 정부가 경기대책이 아닌 경제처방을 무엇 하나 변변히 실행한 것이 있느냐 말이다. 경기와 경제를 혼동해 낭패를 본 케이스가 일본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지만, 일본경제가 10여 년간 내내 제로성장을 겪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1999년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3.5%였고 2000년에는 2.8%에 달했다. 일본의 실패는 이런 일시적 경기반등을 경제회생으로 착각한 점이다. 돈을 쏟아 붓고 금리를 낮춰 일시 성장률이 올라가자 그것으로 위기에서 탈출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 결과 개혁을 소홀히 하고 그것이 누적되어 초창기 침체를 자초했던 것이다. 어느 나라건 정부 당국자란 좋은 측면을 부각시키려는 습성이 있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경제위기론이 무성했던 지난 4, 5월까지 청와대며 재경부 사람들은 올해 5% 성장이 가능하다고 엉뚱한 소리를 해댔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전, 어두운 보도가 경제에 악영향을 준다고 언론 탓을 한 일도 있다. DJ 정부도 그랬다. 지난해 6%대의 고성장을 경제실적으로 내세웠으나 실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처방대신 카드 빚과 부동산 거품을 마구 늘려 달성한 경기 불때기였을 뿐이다. 그 당시 주역들이 지금도 주요 정책라인에 포진해 있다. 거품경제를 만든 DJ 정권 말기의 어떤 차관은 지금 장관이고, 또 그 직전의 어떤 차관도 지금 장관이다. 또 다른 차관보 역시 현재 중요한 자리에서 카드 빚과 거품 만들기에 관여하는 주역이다. 경기가 좀 살아나면 이들은 또 다시 낙관론을 쏟아내며 실적을 홍보하겠지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정부 당국자들은 경기로 경제를 위장하려는 버릇이 있고 나중에 결코 책임지는 법이 없다. 한국경제가 중병에 걸린 지금은 경기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경제를 지긋이 지켜볼 때다.”
이런 글을 제가 지난 주중에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만 하나 읽어보시면 끝나고, 강의할 필요도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기자가 쓴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의 용어와는 조금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경제학자들이 쓰는 용어를 빌어서 먼저 경제를 보는 눈은 어떤 것인가를 소개하고, 그 눈에 입각해서 한국경제의 상황을 소개를 드린 다음에 한국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중단기적 처방과 중장기적 처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여러분들이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서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실하게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강의 제목이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경제학자들은 전망을 잘 하지 못합니다. 마치 관상대와 비슷하지요. 지난날에 비가 왔다든지 눈이 왔다든지, 날이 맑았다라고 관상대에서 말은 잘 하지만, 앞으로 날씨가 어떨지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경제학자들도 지난날의 얘기는 아주 잘 하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로, “예측은 틀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연의 제목을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이라기보다는 그냥 ‘한국경제 잘 나가고 있는가’ 라든지 ‘내가 본 한국경제’ 라는 등의 제목을 붙이고 싶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경제를 보는 시각은 대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거시 경기적 시각이고, 다른 하나는 미시 구조적 시각입니다. 거시 경기적 시각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를 하나의 커다란 숲으로 보고, 그 숲을 멀리서 망원경을 가지고 보듯이 경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미시 구조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숲을 구성하고 있는 나무 하나하나라든지 또는 나무와 나무간의 관계를 현미경을 가지고 보듯이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읽어드린 신문기사에서 경기와 구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경제학자들은 각각 거시와 미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다 구체적으로 거시 경기적 시각은 무엇이고, 미시 구조적 시각은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거시 경기적으로 경제를 볼 때는, 그 경제의 성장률, 고용, 물가수준, 이자율, 국제수지, 주가지수, 외환보유고, 환율,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이 경제를 거시 경기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서, 경제를 구성하고 있는 기업의 수익률이라든지 기업의 국제경쟁력, 기업 활동의 투명성 같은 것을 보는 것은 미시 구조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 지난 약 40년 동안 한국경제가 걸어온 길을 회고해 보면, 거의 예외 없이 거시 경기적으로는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거시 경기적으로는 아주 좋았습니다. 그러나 미시 구조적으로 보자면, 잘 안 보였지만 항상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가 밖으로 표출이 되면 그것을 위기라고 불렀습니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기업부실 문제라든지, 70년대 말의 중동건설 실패라든지, 80년대 중반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모두 어려울 때라든지, 90년대 후반에 겪은 외환위기라든지, 그런 것들은 미시 구조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경제체질이, 약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위기가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그냥 잘 견뎌왔고, 또 위기와 위기 사이에서는 경기부양책으로 경제가 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해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더 자세히 들어가서 거시지표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 또 미시적으로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장률로 보자면 지난 40년 동안 한국경제는 연평균 8% 성장을 해왔습니다. 실질치로 8%이니까 합하면 320%입니다. 산술 합으로 320%를 40년 동안에 이룩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간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150년 동안에 성장한 것을 산술 합으로 해도 320%가 못 되었습니다. 유럽의 프랑스건 독일이건 미국이건 이런 나라들이 150년 동안에 겨우 합해서 320% 정도 성장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아마도 1960-90년대의 한국의 경제성장 기록은 앞으로 세계사에서 크게 기록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성장의 부작용도 많이 있었습니다. 환경이 파괴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균형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빈부격차도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차도 있고, 도농간의 차라든지 여러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불균형이 나타났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절대적인 숫자로 보아서는 세계사적으로 남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8% 성장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경제의 규모가 작았을 때는 크게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GDP이건 GNP이건 연 5백조 원 이상 되고 달러로도 5천억 내지 6천억 달러 정도 되는 나라가 8% 성장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과거의 성장 신화를 잊어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2만 달러 구호를 내세우는 것은, 그것이 달성되면 마다할 것은 없지만, 그것을 달성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난다면 그것만큼 또한 불행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만 달러다 1만 달러다 하는 것은, 다르게 보면 계수 장난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금 1달러 당 환율이 1,200원이어서 만 달러 전후에서 변동하지만, 1997년 겨울에 외환위기를 맞기 이전의 환율이었던 800원이라면 우리는 지금 1인당 국민소득 1만 5천 달러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기억하시겠지만, 1985년에 일본의 환율이 1달러 당 250엔에서 122엔으로 되면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그 날로 미국의 1인당 소득을 달러 표시로 추월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1인당 몇 달러라는 것이 의미가 없는 숫자는 아니지만,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현재 우리는 구조조정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자꾸 경기부양을 가지고 여러 가지 논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둘째, 고용에 관해서 보겠습니다. 최근 1, 2년을 제외하면, 그 이전 시기에는 고용 측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를 제외하면, 실업률이 연 3, 4%인 경제라면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경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단지, 고용이 정규 고용이 아니라 임시 고용도 많다는 점이나 고용구조가 대기업 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문제가 있고, 중소기업은 인력채용도 힘들고 구직도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었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고용도 괜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가도 역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1960, 70년대까지 물가상승률은 20~30%였습니다.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5공화국에 대해서 비판을 하지만, 적어도 물가에 관한 한 1980대와 90년대에 모두 한 자리 숫자로 막을 수 있었고, 제 생각에 이것 역시 좋은 성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油價가 안정되는 등의 여러 가지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적어도 한 자리 숫자의 인플레이션율을 계속 유지했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제 물가에 관한 걱정은 덜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경제가 개방되게 되면 한 지역의 물가상승은 바로 수입을 유발하기 때문에, 물가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현상으로 정의되는 인플레이션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 경제이론으로 보자면, 요새 오히려 걱정하고 있는 디플레이션보다는, 완만하기만 하다면 인플레이션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자율도 단군 이래 최초로 10% 이내로 떨어지더니 요즘에는 5% 이하로 떨어지고, 주가지수도 한때 200-300까지 갔지만, 지금은 7-800선에 있지 않습니까? 외환보유고도 1,300억이 넘어서서 오히려 처치하기에 곤란한 수준에 있습니다. 외환보유고가 무척 높다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7-8% 이자를 주고 꿔온 돈을 한국은행의 지하금고에 둘 수는 없는 것이기에 결국 예치를 해야 합니다. 예치를 하면 뉴욕에 있는 시티뱅크나 체이스 맨하탄 은행에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은행들에서는 이자를 아무리 많이 줘도 2, 3% 밖에 주지 않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우선 외환을 모으자는 의미에서 많이 빌려왔지만, 결국 우리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1,300억 달러의 외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외환위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국제수지까지 포함해서, 거시적 측면에서 본 한국경제는 괜찮다고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1, 2년 전까지 성적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시 구조적으로 보겠습니다. 즉 기업의 수익률이라든가 국제경쟁력 같은 것들을 보면, 그 모습의 초라함에 상당히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가진 통계를 가지고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총자산수익률(return on asset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조업에서의 총자산수익률이라는 것은, 자산에 비해서 수익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를 따지는 것입니다. 한국은 60년대부터 최근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총자산수익률이 너무 하락했고,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너무 낮은 상황입니다. 즉, 어떻게 정의하든가에 한국의 기업수익률이 역사적으로도 떨어져 왔고, 해외비교를 해도 낮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1960년대는 8.5, 70년대는 4.3, 80년대는 2.6, 90년대 와서 1.4로 하락했습니다. 90년대의 총자산수익률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일본이 역시 낮아서 3.4, 독일은 10.2, 타이완이 5.6, 미국이 6.7입니다. 즉, 거시 경기적으로는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경제가, 미시 구조적으로 보면 하나의 지표로서, 경제의 실물부문에서 제조업의 총자산수익률이 계속 떨어져왔고, 다른 나라에 비해서 무척 낮기 때문에 걱정된다는 것입니다.
경제의 금융부문을 보면, 먼저 금융부문의 부실채권이 역사적으로 아주 많습니다. 제가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금융기관의 부실채권에 대해서 공부를 해왔는데, 지금은 우리은행인 한빛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 한일은행의 부실채권이 1987년에 각각 40%, 20%였습니다. 부실채권의 정의는 자세히 설명을 안 드리겠지만, 미국식으로 엄격하게 정의할 때 각각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1988년에 주식시장에서 대규모 증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규모가 두 배로 늘어나면서, 부실채권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한일은행은 10%, 상업은행은 20%, 외국계 은행은 4-5%였습니다. 90년대 들어서서 많이 떨어졌지만, 은행이 아직도 3-4%대이고, 상호저축은행이라든가 투신사와 같은 제 2 금융권은 아직도 20% 전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금융기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부실채권비중이 1, 2%만 되면 금융감독 당국에서 해당 금융기관에게 경고신호를 보내는데, 우리나라는 모두 높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신호를 보내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입니다. 거시 경기적으로는 좋은데 미시 구조적으로는 나쁘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으로 따지자면, 거시 경기적 상황이 체온이고, 미시 구조적 상황이 체질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체질은 나쁜데 체온이 좋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지난 3, 40년 동안 우리가 운영해온 경제는, 체질을 키우는 데는 신경을 별로 못 쓰고, 아까 기자가 얘기한 바와 같이 자꾸 경기 불때기 노릇만 해서 경기는 계속 되어왔고, 그것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 97년 후반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후 잠깐 동안 98년, 99년 초까지만 해도, 이제는 거시 경기가 아니라 미시 구조다라는 생각에서 구조조정을 하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IMF의 차입금을 다 갚더니, 이제 체질개선이 다 된 것처럼 생각을 하고, 경기 불때기를 또 계속해서 오늘날 한국경제에 다시 어려움을 가져왔다고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 않습니까? 지난 2-3년 전에 신용카드를 고등학생에게까지 발급해주고, 특소세를 면제해주고, 아파트 분양권의 전매를 허용하는 등의 무리한 정책을 통해서 경기를 살려놓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경기가 살아남으로 해서, 드디어 작년과 올해 그리고 내년까지 경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면 좋겠지만, 미시구조를 고치는 과정에서 그것이 실패하게 되었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체질은 약하지만, 약한 체질의 경제에 그 때 그 때마다 경기부양이라는 링거주사를 주어서 생기를 유지시켜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한국이 거시는 괜찮은데 경제의 체질은 괜찮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한국경제에 축적된 문제점이라는 것은, 과거 한국경제의 체질이 허약하게 된 원인, 또는 미시 구조적으로 허약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총량위주의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것은 정부에 의한 인위적인 자원배분과 경쟁제한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부는 유망산업을 선정해서 기업별로 사업영역을 구분해 주었고, 은행을 산업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해서 산업별ㆍ기업별로 자금지원규모를 결정ㆍ집행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기업들을 경쟁과 자금동원의 압력으로부터 해방시켜서 성장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경제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서구 여러 나라들이 100, 200년에 걸쳐서 이룩한 성장을 불과 30여년 만에 이루어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이런 압축성장과정은 경제제도의 왜곡ㆍ심화과정이었습니다. 경제를 실물부문과 금융부문으로 나누어 보았을 때, 우선 실물부문에서의 중복, 과잉투자가 경제의 효율성과 신축성을 떨어뜨리고 거품경제를 야기 시켰으며, 금융부문에서는 대출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결과 부실대출을 양산했습니다.
우선 실물부문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장원리의 기본법칙은 적자생존입니다. 이윤을 내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기업은 뒤쳐지고 효율적으로 이윤을 내는 기업만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이런 단순한 논리가 한국에서는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지난 30여 년간 대기업은 고도성장을 목표로 한 정부의 보호 속에서 몸집 불리기를 계속 해왔고, 그 와중에 한국경제가 효율성을 상실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습니다. 그 결과 재벌들이 공급과잉으로 재고조정에 실패하고, 시설투자에 주력하다가 자금회수가 늦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금융비용이 급증해서 현금흐름이 악화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1997년에 대기업의 연쇄도산이 발생하면서 경제위기를 촉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중복과잉투자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비효율을 낳게 되는 원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첫째, 한국에서는 내적기준이 아닌 외적기준에 따라서 기업이 평가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시장제도가 잘 발달된 나라에서는 기업규모보다는 수익성이 기업성패를 좌우합니다. 기업이 작다는 이유로 투자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장의 인프라스트럭쳐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나라에서는 규모와 같은 외적 신호가 금융기관이나 정부와의 협상과정에서 중요한 열쇠입니다. 수익성과 같은 내적기준의 정확한 산정이 불가능하면 금융기관은 외적 기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규모가 큰 기업은 담보제공능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설혹 사업계획이 실패한다고 해도 국가경제에 대한 파급효과를 우려한 정부로부터 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규모만 크면 망하지 않는다, 즉 ‘Too big, to fail’이라는 원리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서 대마불사의 신화를 창조해왔고, 이것은 아직도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관행에 따라서 기업은 이윤극대화보다는 규모극대화를 추구해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중복과잉투자를 가져왔습니다.
두 번째로, 재벌들의 교차소유구조가 중복과잉투자를 심화시킨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A기업이 B기업에 투자하고, B가 다시 A에, 또 B가 C기업에 투자하는 등의 교차투자를 함으로써, 재벌의 오너이 3, 4%의 작은 소유지분으로도 기업의 의사결정권을 모두 행사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무도 그것을 견제할 장치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정부나 금융기관도 이른바 도덕적 해이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금융기관이 위험한 투자계획을 가지고 있는 기업에 자금을 지원해서 손실을 보더라도, 정부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손실을 보전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금융기관은 이른바 downside-risk보다는 upside-gain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것이 비효율적인 투자가 집행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과거 3공이나 유신, 5공, 6공뿐만 아니라, 최근까지도 정부가 정치적 정통성을 결여하거나 일을 잘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일종의 대가로서, 국민에게 경제적으로 보상해주기 위해서 가시적 성장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성장에 도움만 된다면 기업에게 분별없이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중복, 과잉투자를 가져왔고, 기업의 현금흐름을 나쁘게 하였습니다. 기업의 현금흐름이 나쁘니 채무상환이 안 되고, 은행에는 부실채권이 쌓였습니다. 결국 은행도 기업도 모두 어렵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어떻게 거시 경제적으로 성공했느냐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에 대해서 대개 경제학자들이 내세우는 대개 이런 것들입니다.
60년대 이후 80년대까지는 외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이 용이했고, 노동력도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이 단순했기 때문에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87년 이후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었고, 기술을 쉽게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이 단순했기 때문에 쉬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6, 70년대는 유엔이 설정한 개발의 십 년대에 외국의 원조를 많이 받았습니다. 또한 70년대에는 중동건설 붐이라든지 오일 달러의 환류라든지, 80년대의 3저 현상과 같은 것들이 모두 고도성장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것들이 어려워지고, 그 클라이맥스가 마침내 1997년에 경제위기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금융부문에서는, 이미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은행이 기업들의 대출신청을 심사를 한 후에 빌려줘야 하는데, 심사를 할 필요성을 별로 못 느끼고 심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만한 대출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부실채권의 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미시적 측면과 거시시적 측면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를 맞은 후에 한국경제가 제대로 했는지 여부를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살펴볼 수 있지만, 97년 말의 외환위기 이후에도 거시 경기적으로 보면 경제가 그리 나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경제의 잠재성장능력에 비해서 더 많이 성장했고, 물가도 안정되었고, 국제수지도 단군 이래 가장 큰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장은 오래 못 가는 법입니다. 6% 성장은 무리한 경기부양책 때문이었고, 물가는 개방경제이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제수지는 수입이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거시 경기적인 측면 이외에, 미시적으로 보면 어떠한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실물부문을 살펴보면 1999년 이후에 지속된 정부의 저금리 유지정책 때문에, 상당수의 이른바 망해야 할 한계기업들이 퇴출되지 않고 생존함으로써 시장내 잠재부실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자보상배율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영업이익을 차익금 이자로 나눈 것이 이자보상배율입니다(=영업이익/차입금이자). 1보다 크다면 이자를 낼 정도의 영업이익을 거두는 것이고, 작다면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작아서 영업이익이 금융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는 제조업체가 1999-2000년 동안에 30%에 달합니다.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기업이 30%인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이런 일들을 시장에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나가라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미만이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되면 자동퇴출하는 제도를 만들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생존한 기업 중에 3년 이상 1 미만인 상황이 계속된 업체수가 5%입니다. 그러니까, 한국경제의 미시적인 상황을 1999-2001년이라는 어느 시점에서 보면, 30%의 기업들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고 있고, 그런 상황이 3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5%나 된다고 하면, 적어도 아직까지 한국의 실물 기업의 구조조정은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앞날이 그리 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차 말하지만, 98년도부터 좀 고통스럽더라도 어려운 기업들이 비록 그 규모가 크더라도 퇴출되도록 놔두던지, 아니면 기준에 따라 퇴출시키던지, 아니면 두 가지를 모두 시행하든가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기가 힘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를 진작시켜서 경제부처 장관들의 실적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정책들로 인하여 구조조정이 제대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금융부문은 조금 전에 미시 구조 설명할 때에 부실채권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에 좀 더 부연하자면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2003년 3월말 기준으로 국내금융기관이 보유한 부실채권 규모는, 느슨한 한국기준으로도 35조원입니다. 대규모 공적자금이 투입되었던 은행권의 부실비율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지만, 제 2 금융권의 부실채권 문제가 어렵습니다. 제 2 금융권 중에서 IMF 구제금융 이후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보험사와 증권사는 상대적으로 건전하지만, 증권투신사, 상호저축은행, 리스사의 부실은 심각합니다. 3월말 기준으로 보험사, 종금사의 부실비율은 각각 3.9, 5.6이어서 은행과 비슷한 수준인데 비해서, 증권투신사, 상호저축은행, 리스사의 부실비율은 각각 36%, 15%, 15%입니다. 이렇게 부실채권이 많으면 정상적인 금융운영이 어렵기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덧붙여서, 경제위기 이후 금융회사의 대출행태 변화에 따른 가계부채의 급속한 팽창이 자금흐름의 불균형 현상을 유발하면서, 금융시장 안정성을 위협하는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가계부채는 97년에 247조 원에서 2003년 3월에 462조 원으로 되었습니다. 기업부채는 같은 기간 동안에 644조 원에서 699조 원으로 증가하는데 그쳤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계속 된다면, 과거의 금융위기가 기업이 은행부채를 갚지 못해서 외환위기 또는 경제위기가 왔던 것처럼, 앞으로는 가계들이 한편으로는 빚을 못 갚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가 불황에 빠져서 오히려 물가가 하락한다면, 가계부채의 실질치가 커져서 가계는 훨씬 더 소비를 줄여서 경제가 제2의 위기로 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시하는 경제학자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경제를 보는 눈은 거시 경기적, 미시 구조적이라는 두 가지 눈이 있는데, 한국경제는 지난 40년 동안에 거시 경기적 측면에서는 거의 우등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시 구조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시 구조적으로 나쁜데도 불구하고 거시 경기적으로 좋았던 이유는, 경기정책을 많이 썼고 대외경제조건도 좋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 냉전의 해소를 포함해서 국제적 상황이 나빠졌을 뿐만 아니라 자체 노력을 소홀히 한 결과, 과거에도 거의 10년에 한 번씩 조그만 위기가 나타났지만, 드디어 큰 위기가 97년 말에 나타나서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98년부터 우리의 체질을 고쳐보자는 논의와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IMF 구제금융을 모두 갚으면서 또 다시 구조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경기 문제만 생각하다가, 지난 2-3년간 반짝 경기는 경험했지만, 다시 구조문제가 고쳐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은가라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우선 구조조정은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조조정에 대해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구조조정이 무엇인지 알고, 구조조정을 행할 추진력이 있는 사람들이 경제를 맡아야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 분야에서 개혁주체를 한 번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한국은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미국은 이러하고 다른 외국은 이런다 해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저절로 해결될텐데 자꾸 정부가 개입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이 시장체제가 만족스럽게 확립되지 않은 경제에서는 아직도 정부가 개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체를 사실은 대통령이 잘 정비하고, 개혁주체들에게 대통령이 상당한 권한을 부여해서 기본적으로는 경제를 시장에 맡기되, 구조조정은 정부가 상당한 작업을 하도록 하는 개혁적 케인즈주의를 우리가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케인즈주의라고 하는 것은 시장이 확립된 경제에서, 거시 경기적 상황이 너무 들끓으면 진정시키고, 너무 냉각되면 부양시키자는 것이 기본적인 케인즈주의입니다. 시장경제가 확립된 곳에서 거시 경기가 나쁠 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케인즈주의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입장이 시장주의입니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확립되지 않은 곳에서는, 거시적 케인즈 정책뿐만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시장 확립을 위한 제도의 개편 등을 하는 미시적 케인즈주의가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에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실물이건 금융이건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은 간단하게 두 마디입니다. 하나는 실물기업이건 금융기업이건 그 활동상황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것입니다.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아무도 투자하려 들지 않고, 경제활동이 경제활동에 끝나지 않고 비경제활동에까지 연결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적자생존의 원칙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잘 되는 기업은 시장에서 보상을 받고, 잘 안 되는 기업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문을 닫고 싶은데 정부가 사회적 충격을 고려해서 못 닫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정부는 문을 닫기 원하지만 문을 닫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재벌 그룹이 기업을 4-5 개 갖고 있고, 그 중에서 한 기업이 만약 3년 이상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이라면 문을 닫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재벌 그룹의 본부에서 그 기업을 키우고 싶은 생각에서 잘 되는 B기업의 이윤을 그리 돌려서 안 망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국가적인 자원배분 측면에서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망하도록 내버려두고, 또 그룹 내의 망해야 기업들은 정부가 문을 닫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투명성이고, 하나는 적자생존의 원칙인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겠습니까. 가장 큰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이 실업입니다. 실업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갖가지 정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것들이 단기ㆍ중기적 정책이라고 한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중ㆍ장기적 정책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중장기적으로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에서 컨센서스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육입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이 교육을 통해서 더 좋은 인재를 길러내자고 하는 것이고, 외국 사람들도 똑같은 얘기를 합니다. 지난 7월 하순에 ‘차세대 성장엔진’에 관한 국제회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기 소르망이라든지 폴 로머라든지 모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이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대학에 있는 사람으로서 ‘참 옳은 말이다, 내 생각과 같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세계가 개방되었기 때문에 자본이 부족해서 경제를 운영하지 못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외국자본이 들어오기 싫어해서 그렇지, 환경만 마련해주면 자본은 무제한적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WTO 체제 하에서도 사람의 이동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는 우리가 푸는 것입니다. 인적자원은 우리가 개발하고 물적 자본은 외국에서 들여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적 자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좋은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크게 세 가지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는, 중ㆍ고교 입시를 부활하자는 것입니다. 고교평준화를 없애자는 것이지요. 중학교는 몰라도, 고교입시는 부활하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서울대학교를 포함하여 대학들, 특히 주요대학은 정원을 줄이자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른 대학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서울대학은 과거의 입시제도로부터 완전히 탈피해서 사람을 다양하게 뽑자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있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중고교 입시를 부활하자는 것은 이미 십 년 전에 쓴 것입니다. 93년 7월 29일에 쓴 것인데, 이 때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전화가 학교와 집으로 50여 통 왔습니다. 전화를 해서,
“당신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
“XX 학교 나왔습니다.”
“그럼 그렇지 너희 학교 부활하려고 그러는구나” 라는 식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나 지금이나 저의 생각은 같습니다. 주요 부문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교육은 자기 개발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차원에서 볼 때, 교육은 창의적 인간을 길러내며, 또한 창의적 인간은 생산성 향상을 통해 국제경쟁력을 제고시키므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육투자, 즉 인적자본의 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적으로는 몰라도 공적 교육투자가 GNP 대비나 국가예산 대비 등 어느 모로 보나 보잘 것 없습니다.
보충 설명을 드리자면, 저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대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학교는 지금 학생 수가 6,800명입니다. 학부학생 수가 4,400명, 대학원생수가 1,400명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1년 예산이 10억 달러입니다. 원화로 하면 1조가 넘습니다. 반면 저희 서울대학교는 재적 학생 수가 38,000명이고, 등록 학생 수가 33,000명입니다. 그런데 정부에서 주는 예산은 2,500억원, 즉 2억 달러 정도가 됩니다. 6,800 명인 학교가 10억 달러를 쓰는데, 3만 3천 명인 학교가 2억 달러를 쓰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는 기성회비를 걷어서 1억 달러 정도가 됩니다. 그 밖에 외부 연구비 등을 모두 합하여도 5억 달러가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조그만 학교가 10억 달러를 쓰고 있습니다. 학교는 6배인데 예산은 절반이니 1인당 예산은 10분의 1밖에 안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돈을 써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교육이 교육자에게 맡겨져 있지 않고 정부 관리의 손 안에 있는데 있습니다. 관리가 경제를 좌지우지 하면 경제가 잘 안 되듯이, 교육도 관리가 지휘하면 어렵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말씀 드렸지만, 그것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시장에 맡기되 어려우면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육은 정부가 거의 도맡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가장 심각한 교육문제는 수재와 범용한 학생이 똑같이 취급받는데 있습니다. 교육은 수월성을 추구해야 함에도 한국교육은 쉽게만 가르치려 하고 평준화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제 중학교 입시가 없어진 지 아시죠? 어느 대통령 아드님이 중학교 들어갈 때 중학교 입시가 없어지고, 그 아드님이 고등학교 들어갈 때 고교 입시가 없어졌습니다. 한국의 교육정책이 그런 예가 상당히 많습니다. 80년대 초반에는 어느 대통령 아들이 군대갈 때쯤 되서 6개월짜리 석사장교 제도가 생기더니, 그 다음 대통령 아들이 석사장교를 마치자마자 그 제도가 없어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중고교 평준화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당시 장관하던 이들이 대통령에게 잘 보이려고 하던 정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때 물론 이유는 다 있었습니다. 30여 년 전, 평준화는 자라나는 새싹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키자는 명목으로 먼저 중학교 입시를 없애고, 3년 후 고등학교 입시까지 없앤 후에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입시지옥은 과거보다 훨씬 긴 터널로 변했고, 그 강도 또한 훨씬 높아졌습니다. 대학졸업장이 능력과 인격을 재는 척도가 되고, 모든 부모가 법관이나 의사인 자녀를 두길 원하는 사회구조에서 입시지옥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표준적인 어린이가 대학, 특히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자 하면, 유치원부터 14년 동안 입시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들은 빈부 가릴 것 없이, 그리고 능력도 따질 것 없이, 태권도, 수영, 붓글씨, 미술, 피아노, 속셈, 영어 등을 마구잡이로 배우지 않습니까? 때로는 부모의 권유로, 때로는 친구를 따라 목적의식 없이 학원에 갑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배우는 것이 없습니다. 꼭 배우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과목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서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한 예비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요새는 뭐까지 가르치려고 하냐하면 경제까지 가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에게 경제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중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고등학생들에게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경제의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더 가르치면 다른 것은 전혀 생각 안 하고, 돈벌이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여러분 박정희 대통령 때를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얼마나 경제 마인드가 투철한가 하면, 정신교육을 시킨다고 하고서는 그 정신교육을 제 2의 경제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제 2의 경제라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지금 경제교육을 시킨다고 하는데, 이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만 영어를 잘 하면 됐지 4,800만이 모두 영어를 잘 해서 무엇에 쓰겠습니까. 이것은 국가의 큰 자원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이 끝나면, 부모와 거주하는 학군에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강제로 배정받아서 10여 과목을 외웁니다. 내신을 의식하며 모든 과목을 다 하자니 어느 것 하나인들 잘 하는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등생과 지진아가 같은 학급에서 배우자니 애로가 많습니다. 우등생 중심으로 하면 열등생이 못 따라오고, 열등생을 중심으로 하면 우등생이 흥미를 잃습니다. 결국 학교는 교육을 포기하고, 학부모는 과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는 평준화된 학급에서 창의적인 인간을 길러낸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평준화는 수재를 바보로 만들 뿐입니다. 또 하나는 중고교 과정에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의 자녀만이 과외를 할 수 있다는 문제입니다.
오늘날 유수한 대학의 인기학과 학생 대부분이 부자집 자녀이거나 극성스런 부모를 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습니다. 서울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25%인데 반해서, 서울대학교에서 서울 출신이 40%입니다. 그리고 40% 학생의 대부분이 서초, 강남, 송파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중ㆍ고등학교 때 과외를 잘 시키지 않으면 대학에 잘 못 들어온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파출부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 파출부는 중‧고등학교 과외는 못 시킨다 하더라도, 중학교 입시가 생겨나서, 매일 번 돈으로 초등학교 6년 동안만은 잘 지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일찍 철이 나서 괜찮은 중학교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 중학교에서 잘 가르쳐서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 된다면 한국의 빈곤층과 부유층, 혹은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간격이라는 것은 영원히 고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10년 전에 저에게 항의가 왔을 때, 중고교 입시부활문제가 효율의 문제도 있지만 사실은 형평의 문제라고 설명을 했었습니다. 10년 전이라 중고교라고 했지만, 지금은 중학교는 빼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중고교 입시를 부활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어떤 학생이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때 입시지옥은 완화될 것입니다. 또한 이런 학생들이 한편으로는 비슷한 또래들끼리 경쟁하며 자신을 개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유를 갖고 특별활동을 맘껏 하며 호연지기를 기른다면 창의성이 개발될 여지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릴 때 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놀리는 방법은, 대체로 하면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자신감을 심어준다고 하는 것은, 유명한 대학에 입시성적이 괜찮은 중ㆍ고등학교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성현들은 교육을 백년지대계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훌륭한 교육은 백년 후의 한국을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런데 교육의 효과는 사실은 생각보다 훨씬 단기간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교육투자를 더욱 늘리고 교육을 교육자에게 맡기는 동시에, 교육제도를 빨리 고쳐서 창의성 발휘, 생산성 향상, 국제경쟁력 제고를 기대해 봅시다. 그 가운데 가장 시급한 것은 중고교 입시부활입니다.
두 번째로는 대학을 구조조정하자는 것입니다. 대학도 잘 안 되는 대학은 문을 닫고, 지금 잘 되는 대학도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루하시겠지만 꼭 들어주십시오.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준비한 것입니다.
대학의 미래는 바로 한국의 미래입니다. 대학이 살아 움직이면서 제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학은 사람들에게 지식, 지혜, 자긍심, 자기통제력, 사명감, 타인에 대한 감수성, 비판정신 등을 교육해서 창의성을 개발하고 경륜을 키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학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과거 3, 40년을 뒤돌아보면, 한국의 대학은 선진과학이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하는데 상당히 효율적이었습니다. 선진 국가들과 지식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대학은 교수들이 외국대학에서 습득한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역할로 충분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한 후에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해서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전체를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었습니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나라에서 연 8%의 고도성장을 지속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인 중의 하나는 한국이 사람을 길러내는데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선진 국가들과 기술격차가 급격히 줄어든 상황에서, 한국의 대학은 지식을 전수만 할 것이 아니라 창출까지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아직도 지식창출이 아니라 지식전수 중심대학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경제가 성장한 양상과 비슷하게 대학도 역시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부족한 상태입니다.
예를 들자면, SCI라는 것이 있습니다. SCI는 Science Citation Index이라는 것인데, 필라델피아에 있는 ISI라는 회사에서 세계의 유명한 학술지 4천 개를 선정한 후에, 그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사람들의 어느 국가와 어느 대학 사람인지를 따져서 랭킹을 매기는 것입니다.
한국은 12등입니다. 경제력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서울대학교가 SCI의 34등입니다. 이는 밖에 나가서 크게 자랑할 일입니다. 세계에 대학이 1만 5천여 개 있는데, 그 중에서 34등이면 괜찮지 않습니까?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네 개 대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는데, 동경대학, 경도대학, 동북대학, 구주대학이 앞서 있는데, 우리보다 유리합니다. 4천 개 학술지 중에서 일본어 학술지는 78개이고, 한국어 학술지가 7개입니다. 제가 한국어 학술지에만 써도 SCI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78개 대 7개는 비교가 안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럽에서 옥스퍼드와 켐브리지만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브라질 대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멕시코 대학이 우리보다 앞서 있습니다. 나머지 대학은 모두 미국대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양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자연과학자들의 논문이 피인용 되는 도수는 34등이 못 됩니다. 서울대학교의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의 교수들 중에서 논문이 피인용 되는 횟수가 1,500회 이상인 사람이 20 명 정도 됩니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약 4,500회 정도 인용되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노벨상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질적으로는 몰라도 양적으로 크게 성장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한국경제가 성장한 양상과 비슷하게 대학 역시 양적으로는 성장했으나 질적으로는 부실한 상태입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경제는 중복투자로 인하여 몸살을 앓아왔고, 그 결과 실물부문의 수익률이 낮고, 금융부문에 부실채권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97년에 겪은 경제위기입니다.
그런데, 대학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팽창하며 한국경제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교육시설 부문에 과잉투자를 일어났고, 대학생 수는 시설투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대학은 구조조정 측면에서 한국경제보다 한 발 뒤쳐져 있습니다. 한국경제는 좋던 싫건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미진하나마 구조조정이 진행되었습니다. 투명성도 어느 정도 제고되었고, 수익을 못 올리면 업계를 떠나야 한다는 인식도 상당히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육분야는 구조조정의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에서 대학의 부실팽창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그 원인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경제와 마찬가지로 대학도 이른바 나도주의(me-tooism)에 젖어서 팽창을 계속해 왔습니다. 대학들은 나도주의에 따라 한 대학이 종합대학을 하면 다른 대학도 동참을 해야 손해를 안 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대학이 커다란 종합대학이 되었고, 과잉규모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모두 종합대학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과기원인 KAIST도 과거에는 원장이었는데 지금은 총장이 되었고, KDI의 국제정책 대학원도 지금은 총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둘째, 대학도 한국 경제처럼 규모의 경제를 과신했습니다. 대학은 이런 논리에 따라서 규모를 키우고 학생 수가 많아지면 원가 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집착해 왔고, 계속 팽창노선을 걸어왔습니다.
셋째, 국가정책 목표에 따라 대학은 사회의 장기적인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적으로만 공급 측면을 따라서 학생 수를 늘려왔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고급 노동력이 부족해서 공대학생 수를 늘리고자 해서 한 대학이 정원을 늘리면, 다른 대학도 모두 공대육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대가 대학원 중심대학을 한다고 하니, 다른 대학도 대학원 중심 대학을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정부 때에 영호남에서 지방대학을 육성한다고 하니 다른 지역에서도 모두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4년제 대학이 200개이고, 전문대학이 160개가 되어버렸습니다.
서울대학에서 대학원 중심대학 아이디어가 나온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1980년대 중반에 외교학과 교수이던 분이 문교부 장관으로 가셨습니다. 당시 기획실장이 찾아가서 서울대를 도와달라고 했더니, 서울대가 다른 모습으로 지원해 달라고 하라고 해서 만든 아이디어입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지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다른 대학도 대학원 중심대학을 해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결과, 우리나라의 대학원 학생 수가 인구 1천 명당 6.1명이 되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미국은 3.9명, 일본은 1.7명입니다. 대학도 지금 학생 수가 전체 인구 대비 4.08%입니다. 세계 1위입니다. 대학이 매우 커졌는데, 우선 대학원을 줄여야 합니다. 신문에 가끔 나오지만, 서울대의 정원이 너무 늘어나다 보니 정원도 못 채우고 있습니다. 서울대가 정원을 못 채우니, 지방대학은 물론이지만 다른 대학도 못 채웁니다. 정원을 못 채우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방의 세무서장이라든지 도 경찰국장이라든지 하는 분들이 모두 대학원에 들어갑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은데, 다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소지자에 대한 지방대학의 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서울대가 너무 커져서 지방 대학이 죽고, 지방 대학이 죽으니까 서울대학교 대학원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울대를 위해서도 지방대학을 위해서도 대학원을 줄여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지난 1년 동안에 총장하면서 줄인 인원이 겨우 300명입니다.
지금 서울대의 대학원생 수가 1만 천명인데, 세상에서 이렇게 큰 대학원은 없습니다. 숫자로 비슷한 대학이 하버드대와 동경대, 콜럼비아대, 예일대학인데, 그 대학들은 1만 1천 명 중에서 3천 명 정도만 일반대학 대학원생이고, 나머지 대학원생들은 모두 법과대학, 상과대학, 신학대학 대학원생들입니다. 하버드에 일반학위를 취득하는 대학원생 수는 3,500명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1만 1천 명이 모두 일반학위를 취득하고 있습니다. 전문대학원이라고 알려진 환경, 보건, 행정대학원 학생들조차도 전문대학원 학위를 받았다가는 열등으로 보일까봐서 모두 일반학위를 취득하고 있습니다. 일반학위를 취득하는 다른 큰 대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큽니다. 그래서 줄이려고 교수를 설득했습니다만 300 명밖에 줄이지 못 했습니다.
제가 앞으로 3년 동안 반 정도로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각 교수들에게 일정 시점에서 대학원생을 2-3명만 받도록 하고, 그에 대해서는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지급하고, 그 이상의 대학원생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연구비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뽑도록 하는 식으로 해서 줄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대학생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울대는 지금 계속 줄여서 4천명을 뽑는데, 연대와 고대는 만 명 뽑습니다. 결국 세 대학에서 1년 동안 약 만 오천여 명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한편 하바드 대학의 경우에 1년에 1,500명 뽑습니다. 그리고 예일대가 1,300명, 프린스턴 대학이 1,200명, 콜럼비아 대학이 1,200명을 뽑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미국에서 가장 좋고 크다는 사립대학에서 배출되는 학생 수가 10개 대학에서 1만 명이 잘 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3개 대학에서 15,000명이 나오지요. 미국은 인구가 2억 8천이고, 우리는 인구가 4천 7백만입니다.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만 오천 명을 이른바 산의 요새에 보낸다면, 이른바 SKY로 불리는 대학 출신의 사람들로 모두 채우게 되기 때문에 사회통합이 매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기분이 별로 안 좋은 상황으로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무현의 대통령의 학벌철폐운동이라든지 대학서열 철폐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것은 사회 형평성에서 뿐만 아니라 효율성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1년에 4천명을 뽑아서 절대로 교육을 잘 시킬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작년에 서울대 학생들이 너무 기초가 부족한 것 같아서 ‘글쓰기 훈련센터’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만들다보니 예산을 3억 밖에 투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신입생들이 많이 듣는 12개 학과목에 대해서만 한 학기에 두 번 정도 글을 써오라고 하고, 전문가들이 첨삭과 지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4천 명이다 보니 엄두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효율적인 교육을 위해서 학생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도는 외국에서 3, 400년 동안 대학을 운영해 온 사람들이 만든 제도가 아닙니까? 그래서 이를 통해서 서울대의 질을 높이고, 그것이 결국은 지식전수 단계에서 지식창출의 단계로 옮겨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학생 수를 줄이고 교육을 더 잘해야 하겠는데, 어떤 학생을 가르칠 것이냐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모두 똑같은 학생을 가르쳐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먼저, 전국의 행정구역이 232개인데, 서울대에 학생을 하나도 못 넣는 행정구역이 72개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몇 군데만 말씀드리자면, 전남 강진, 충남 보령, 경남 산청, 서울의 성동구가 있을 때가 있고 없을 때가 있고 그렇습니다. 사실 서울에서야 상관없겠지만, 전국의 72개 지구에서 못 들어온다는 것은, 20년 후에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전부 일부 지역 출신들만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20년 후에 한국의 지도자들이 지역적으로 골고루 퍼지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의 생각은 똑같은 학생들만 모아놓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모아놓으면 다양한 간접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좀 다른 생각을 할 기회가 되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창의성이 개발되고, 그것이 바로 지식전수단계에서 창출단계로 가는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 중의 하나는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들을 다양하게 뽑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지역균형제’입니다. 처음에 지역할당제라고 했더니 비판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특히 학내에서는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뽑는다고 비판이 많았지만, 지금은 학내에서도 지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지를 얻게 된 과정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는 수학능력시험이 학력의 기준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까지 내신으로만 뽑다가, 갑자기 수능으로만 2-30%를 뽑는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학력저하라고 생각될 지도 모른다. 즉, 만약에 과거에 수능이 아니라 내신기준으로 뽑았다면 내신이 기준이 되지 않았겠느냐?라고 해서 학력이 떨어지는 학생을 뽑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각 지역에서 적어도 5명은 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해서 배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고, 법적으로 위헌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남지역으로부터 비판을 받을 소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끝에 내신으로 뽑자고 생각했습니다. 내신으로 뽑으면, 지방에서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전과목에서 1등 하는 것이, 강남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1등하는 것보다 쉽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사전적으로 내신으로만 뽑지만, 사후적으로는 골고루 들어올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비중이 4,000명 중에 800명 정도만 내신으로 뽑자는 것입니다.
그 외에 거의 수능만으로도 뽑습니다. 지금까지는 모두 잘 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수능 중심으로도 뽑고, 내신으로도 뽑고, 국제 올림피아드에서 입상한 사람도 쉽게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처지를 고려해서 국내 올림피아드는 무시했습니다. 또한 지원서 낼 때에 제출하는 자기소개서 쓰는데 100만 원짜리 과외를 한다고 해서 그것도 무시하기로 하고, 추천서 받아오라고 했더니 그것도 한 장에 100만원이라고 해서 모두 없앴습니다.
그래서 수능만으로나 내신만으로, 올림피아드로 뽑기로 한 것입니다. 그 외에 다양한 기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양한 기준에서 사람을 뽑아 놓으면, 그들이 다양한 인적 관계를 구성해서 창의성을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그런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실물부문에서의 구조조정, 금융구조부문에서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은 단ㆍ중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시정책은 아주 단기적인 것이고, 구조조정은 단ㆍ중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중ㆍ장기적으로는 결국 사람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지금까지 해 온 방식으로는 곤란하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저와는 간접적으로만 관련되는 것이지만, 고교입시를 부활했으면 좋겠고, 직접적으로는 우리 학생 수를 대폭 줄이고, 연ㆍ고대에도 줄이라고 해야합니다. 대신에 교육부나 정부에서 5-10년 정도는 재정지원을 해줘야 할 것입니다. 갑자기 연ㆍ고대에서 등록금수입이 줄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희 학교도 다양성 있게 학생을 뽑으려고 하는데, 다른 대학교에도 권장을 할 생각입니다. 방법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외대에서도 저희와 같이 하려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경북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전북대를 포함한 지방 국립대학에서 제가 아주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서울대학에서 싹쓸이 해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원 외에서 뽑으면 문제가 되겠지만, 정원 내에서 뽑기 때문에, 지역균형 선발제 때문에 못 들어온 학생이 다른 대학으로 가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중ㆍ장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잘 되면 앞으로의 한국경제는 그렇게 어둡다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시청이나 광화문 앞에 나가 보십시오. 한국사람들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런던이나 베를린의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반짝거립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경제 하려는 의지가 투철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절대 망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단기간에 구조조정이 안 되어서 다시 어려움을 겪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지만, 제가 말씀드린 방향으로 노력을 한다면 장래가 어둡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미도 없는 말을 오랫동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