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 옥스포드 라운드테이블 (2003.7.7)
등록일: 2009. 7. 2. 조회수: 15097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
(2003년 7월 7일 Oxford Round Table에서 발표한 내용에 대한 한글 번역임)
대학과 사회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현대사회의 여러 도전들에 맞서는 뛰어난 지적능력과 학문적 성찰 능력을 학생들에게 배양시켜주는 것이다. 대학교 총장으로서 나는 그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상의 교육을 제공해주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는 대학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교육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내내 소유하는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것은 가슴과 정신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수되는 영원한 횃불과도 같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바로 대학의 존재 이유와, 미래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대학의 사명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대학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지적 자산을 산출할 책임을 갖고 있으며, 훌륭한 국가운영과 경제적 안정, 그리고 사회복지를 위한 적절한 방법을 모색할 책임도 갖고 있다. 대학은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도전들에 부응하기 위해 언제나 변화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고 또 혁신적이어야만 한다. 나는 사회에 대한 대학의 역할과 책임을 등한히 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과 사회는 생산적인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공생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은 학생들에게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을 교육시켜야만 한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책임감을 기르며, 사물을 올바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의 목표는 성공적인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지난 40년 동안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첨단과학과 기술의 확산을 가져왔다. 선진국가들과의 지식격차가 컸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서 한국대학의 역할은 해외에서 축적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었고, 정부의 역할은 교육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대학졸업생들은 그러한 지식을 이용해 국가를 초고속으로 발전시켰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한 나라에서 지난 40년 동안 연 8%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한국이 지식전수와 교육받은 인력을 길러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들과의 지식격차가 급격히 좁아지자 최근 한국대학들은 지식의 전수 뿐 아니라, 지식의 창출까지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대학의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력과 새로운 아이디어와 테크놀로지를 창출할 독창성을 계발하기보다는 기존의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갈수록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경제적 번영이 이니시어티브와 혁신과 유연성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혁명의 성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처한 중요한 국면에 대한 절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한국 대학의 일반적 문제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대학의 수준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의 수준은 점차 하락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많은 대학들이 생겨났지만, 학문적인 수준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부는 급증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학의 숫자는 늘려왔지만, 가장 중요한 교육의 질은 향상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들은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학문적 탁월성에는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1997-1998년 금융위기 때, IMF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그 결과 투명성이 상당히 제고되었다. 투명성의 제고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에 입각해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을 어느 정도 진작시키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한국경제와는 달리, 한국의 대학들은 그 기간 동안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감행하지 못했다. 시기를 놓침으로써, 그리고 학계가 자기만족 속에 안주함으로써, 한국의 대학개혁은 점차 거추장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며, 복잡한 작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교육부문에서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한 구조조정이 시행되어야만 한다. 한국에서의 대학 구조조정은, 능력 있는 대학만이 국가교육 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능력 있는 대학이 곧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의 부실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첫째, 한국의 대학들은 그동안 산업에서처럼 다른 대학을 모방하는 소위 ‘나도주의’에 빠져, 교육의 질과는 관계없는 양적 팽창에 전념해왔다. 다시 말해, 다른 대학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해야 손해를 안 본다는 잘못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왔다. 다음은 그러한 ‘나도주의’의 세 가지 대표적 유형이다.
(1) 정부가 국가 정책으로 고급 기술인력의 양성을 천명함에 따라, 한 대학이 공대 학생정원을 늘리자,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다같이 공대 정원을 늘렸다.
(2) 지방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취지에서 어느 지방에 대학을 설립, 육성하면, 필요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지방들이 다 똑같은 것을 요구했다.
(3) 한 대학이 대학원 중심대학을 한다고 하니까, 다른 대학들도 모두 대학원을 확대해 결과적으로 국내 대학원 학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둘째, 대학도 경제처럼 규모의 경제--좀 더 넓게는 범위의 경제--에 의존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지면 기업에서 단위 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학은 그러한 논리에 의하여, ‘대학을 키우고 학생수가 많아지면 원가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학원생들의 수는 20년 전과 비교해 두 배에서 네 배까지 증가했고, 교육은 ‘너무 커져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 버렸다. 한국의 대학생들을 모두 합하면 전 인구의 4.07%에 이르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규모이다.
셋째, 한국의 인구가 4천 7백만인데, 그 중 매해 100,000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한국 의 주요 3대 대학이자 소위 SKY 대학이라 불리는 서울대, 고대, 연대에 등록한다. 이는 곧 학연 사회인 한국에서 서울대, 고대, 연대 출신들만으로 사회 요직의 상당 부분이 채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위 SKY대학 출신이 아닌 이들의 눈에는 3개 대학 출신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영향력의 불균형은 궁극적으로 한국사회를 다원화와 통합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대학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고, 국가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한국 대학들은 다음 네 가지 변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1) 효과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다양화와 사회통합
(2) 우수한 교수요원과 행정요원들의 확보
(3) 장기적 사회발전을 위한 국가 교육정책의 조정
(4) 학문적 수준 제고를 위한 대학 규모의 축소
서울대의 실상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와 세계경제는 대학들로 하여금 현재의 지식 전수만으로는 세계일류대학이 되기 어렵고, 생산적인 노동력을 산출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최근 수년동안 한국에서는 한국의 대학들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학문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사회 각 부문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현대사회는 정보를 모으는 구조를 시스템화함으로써 방대한 지식을 산출해낼 수 있다.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수명이 불과 몇 달, 혹은 몇 년 밖에 가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놀랄만한 변화와 기술혁명 때문에 한국의 대학들은 혁신적이고 효과적이어야만 하며, 유연하고 확대된 비전을 가져야만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대학들은 현대 정보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만큼 유연하지도 혁신적이지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곧 우리 대학들이 아직 ‘지식창출’에 대해 효과적으로 가르칠 시설도 없고, 구조적인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대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식창출 추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작업을 시작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곧 대학들이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 변화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이나 혁신적인 정책 메커니즘을 못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지식의 결핍은 결국 1997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금융위기로 나타났다. 그러한 금융위기로부터 한국 사회는 대학이 변화에 대처하는 교육을 시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는 소중한 교훈을 배웠다.
서울대학을 예로 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암기하거나 빈칸을 채우는 데에는 아주 능숙하다. 그들은 듣고 배운 것을 응용하라는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배우는데 그칠 뿐, 실제로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논문을 쓰게될 때, 서울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독창적으로 활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많은 서울대생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빈칸 밖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결핍은 한국사회의 생산성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다.
서울대학교는 지난 10년 동안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해왔고, 정부도 BK21 사업을 통해 적극적인 지원을 해왔다. 그러한 지원을 통해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서울대가 SCI에 등재된 논문의 수로는 2002년 세계 34위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실로 획기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연구 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한국의 연구여건에서 볼 때에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양적인 증가에 그치고 있을 뿐, 질적인 도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서울공대의 경우를 보면, 발표 논문의 수에서는 MIT나 스탠포드나 미시건 대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논문의 피인용 빈도 수를 보면 서울대학교는 아직도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울대학교의 연구성과를 간단히 폄하할 수만은 없다. 논의를 한국 대학 전체로 확장하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척박한 연구 여건 가운데에서도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우리나라 대학 전체의 연구성과를 합했을 때, 국가별로는 국민총생산의 순위에 상응하는 세계 13위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사회봉사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울대 출신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비서울대 출신 사이에서 서울대의 사회봉사 결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최근의 한 연구용역에 의하면 외부인들은 서울대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 비서울대 출신들은 서울대가 한국사회에 엘리트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서울대 출신들은 사회를 위한 봉사는 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와 특권만 향유하고 있다고 본다.
서울대가 나아갈 방향
총장으로 취임한 후, 나는 서울대학교가 이러한 장애들을 극복하고 세계수준의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왔다. 서울대학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동료교수들과 더불어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는 다음 사항들이 사회 발전과 대학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 서울대학교는 학문 교수방법을 지식전수에서 지식창출로 전환할 것이다. 따라서 교수들은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사고를 배양해주는 강의를 해야한다. 그래서 학생들로 하여금 각기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빈칸 밖에서 사고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머지않아 서울대학교는 학문 프로그램들을 바꾸어 학생들이 기존의 관념들에 도전하고, 낡은 관념들을 개선하며, 새로운 관념들을 창조하도록 할 것이다.
2. 사회적 책임과 다양화와 연관해서 정의, 고결함, 공중도덕, 책임감, 의무감, 그리고 지도력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개발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 또한 문화적 다양성과 국제사회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3. 단지 시험을 잘 치르는 학생들이 아니라, 창의력 있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학생들을 뽑기 위해 서울대학교의 입시제도 역시 바뀌어져야만 한다. 만일 더 효과적인 입시제도가 정착된다면, 서울대의 학생 구성원들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고 문화적 다양성과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도 증가할 것이다. 학내 구성원들이 다양해지면, 그들과 교수들 사이의 상호교류가 훨씬 더 역동적이 되고 국제적인 학습 분위기도 조성될 것이다. 나는 다양한 지방 출신 학생들을 배려하는 지역균형제를 통해 서울대학교의 문호를 전국 각지에 열어 명실공히 국가대학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역균형제는 국가의 예비 지도자들을 서울에서만 뽑지 않고 각 지방에서도 골고루 뽑아 전국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취지에서 지역균형제는 2005년 입시부터 시행될 것이다.
4. 대학 신입생 수에 대해서는 현재의 팽창주의를 지양하고, 규모축소와 교육내실을 추구할 생각이다. 교육의 질적 향상에 불필요한 조직과, 자원을 고갈시키는 과도한 학생 수는 축소해야만 한다. 예컨대 서울대의 「글쓰기 센터」는 300,000 달러의 적은 예산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4,000명의 신입생들만 교육시키는 데도 태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학에는 지원해야할 다른 사업들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예산을 더 배정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최상의 글쓰기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신입생의 수를 축소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같은 논리가 다른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생과 대학 시설의 ‘이상적인’ 비율을 고려한다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정원축소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5. 연구 분야에서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신임 교수들에게 충분한 재정적 및 제도적 지원을 하려고 한다. 과거에는 신임교수들이 그러한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6.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연구의 수준을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어도 우리에게 비교우위가 있는 한국관련 연구분야에서는 연구결과의 질적 수준이 세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된다. 즉 한국의 경제발전, 한국재벌, 통일, 구조조정, 그리고 외환위기의 파급 등에 대한 연구에서는 서울대가 세계적인 메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7. 첨단분야의 자연과학 연구를 위해 서울대는 생명공학 분야의 혁신적 연구와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생명공학 공동연구원(BioMAX)」을 설립했다. BioMAX는 서울대가 갖고 있는 자원과 역량을 극대화 시켜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창출하고 산업화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BioMAX는 다학제적 연구와, 관련학자들의 공동노력을 지원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생명과학, 생명공학, 생명의학, 생명농학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생명공학과 정보공학과 나노공학 등을 다학제적으로 통합할 종합 시스템을 구축하게될 것이다.
8.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에게 최상의 동기유발과 최고의 교육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복지정책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총장에 취임할 때, 나는 서울대교수들 중 무주택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해결책을 강구하다가, 나는 총장공관을 재개발해서 150개의 교수 아파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거기에다가 현재 60가구인 교수아파트도 재건축해서 120가구의 아파트를 지으면, 모두 270개의 교수아파트가 생겨 교수주택문제가 거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9. 대학예산의 중복되는 부분을 재조정해 서울대 교수들의 낮은 보수 수준도 개선할 것이다.
10. 서울대의 운영체제 개선도 일어나야 한다. 서울대에서는 지금까지 교수와 직원들의 참여나 의견제시가 배제된 하향식 운영이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행정적 결정에 모두가 참여하는 그래서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상향식’으로 운영체제가 바꾸어질 것이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평의원회도 강화해서 총장의 권한을 견제하고 또한 총장의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계획이다. 또한 총장선출제도 역시 관료주의와 정치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선될 것이다.
서울대학교는 국가에 크게 공헌하는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대학들처럼 서울대도 한국사회의 도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이고 유연하며, 효율적이고 적극적이 되어야만 한다. 대학은 과거의 업적이나 낡은 교수법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서울대는 그동안 각 분야에서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통해 국내 최고 대학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것은 곧 서울대가 미래 한국사회를 형성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 서울대학교는 사회적 책무를 반영하는 연구와 교수방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갈 것이다. 그러한 혁신적인 방법 중 하나는 모든 교수가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변화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교수들과 직원들은 서울대학교를 장차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래 한국사회의 형성을 위해 최상의 학문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자 도덕적 책임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요청
사회는 대학이 교육과 연구의 질을 제고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곧 대학이 지식을 산출하고, 고급인력을 갖추어서 지식기반사회의 수요에 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수준의 학문연구와 교육이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1. 비록 교육과 연구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것이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육에 대한 혁신적 노력과 재정적 지원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대학이 그러한 혁신을 스스로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사회의 끊임없는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도움 없이는 대학 혁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교육과 연구에 대한 최근 지원을 보면, 획기적인 수준 향상을 위한 본질적인 혁신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학생 1인당 교육경비, 교수 학생 비율, 학생 1인당 도서관의 장서 수 등을 위해 과감한 교육투자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교육과 연구의 개선을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정책의 기본으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2. 지식창출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새롭게 연구를 시작하는 학문 후속세대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기존 연구자 모두를 위한 지원체제를 수립해야만 한다. 새로운 지식창출을 위해서는 연구기간 동안 내내 지속되는 지원체제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연구지원이 일부분야에만 치우쳐 있는데, 연구의 질적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면 전폭적인 지원체제 수립이 필수적이다.
3. 이와 같은 연구지원 체제는 기초학문 분야에서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IMF 금융위기 이후, 학생들은 전통적인 학문과정보다는 자격증 획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건강하고 본질적인 지식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기초학문의 지원이 시행되지 않으면, ‘빈칸 밖에서 사고’하는 능력의 습득이나 새로운 지식의 창출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4. 대학은 교육인적자원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발전해나갈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나가려는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재능 있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유치하는 데나,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연구 경쟁에도, 연구 단위의 통제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최근, 정부가 대학의 자율성을 다소간 인정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학의 유연성과 능력을 제한하는 부차적인 규정들이 존재하고 있다. 교육과 연구와 행정에 자율을 허용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다.
(2003년 7월 7일 Oxford Round Table에서 발표한 내용에 대한 한글 번역임)
대학과 사회
대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현대사회의 여러 도전들에 맞서는 뛰어난 지적능력과 학문적 성찰 능력을 학생들에게 배양시켜주는 것이다. 대학교 총장으로서 나는 그러한 목표의 달성을 위해 최상의 교육을 제공해주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는 대학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교육은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내내 소유하는 명예로운 훈장과도 같다. 아무도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그것은 가슴과 정신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수되는 영원한 횃불과도 같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바로 대학의 존재 이유와, 미래사회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대학의 사명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대학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지적 자산을 산출할 책임을 갖고 있으며, 훌륭한 국가운영과 경제적 안정, 그리고 사회복지를 위한 적절한 방법을 모색할 책임도 갖고 있다. 대학은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도전들에 부응하기 위해 언제나 변화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고 또 혁신적이어야만 한다. 나는 사회에 대한 대학의 역할과 책임을 등한히 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한다.
대학과 사회는 생산적인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상호공생의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은 학생들에게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배양시키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을 교육시켜야만 한다. 학생들은 대학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책임감을 기르며, 사물을 올바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학의 목표는 성공적인 국가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지난 40년 동안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첨단과학과 기술의 확산을 가져왔다. 선진국가들과의 지식격차가 컸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서 한국대학의 역할은 해외에서 축적된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었고, 정부의 역할은 교육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대학졸업생들은 그러한 지식을 이용해 국가를 초고속으로 발전시켰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한 나라에서 지난 40년 동안 연 8%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는 한국이 지식전수와 교육받은 인력을 길러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들과의 지식격차가 급격히 좁아지자 최근 한국대학들은 지식의 전수 뿐 아니라, 지식의 창출까지도 해야만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 대학의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창의성과 비판적 사고력과 새로운 아이디어와 테크놀로지를 창출할 독창성을 계발하기보다는 기존의 정보와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갈수록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경제적 번영이 이니시어티브와 혁신과 유연성을 통한 지속적인 기술혁명의 성취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처한 중요한 국면에 대한 절박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한국 대학의 일반적 문제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대학의 수준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의 수준은 점차 하락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많은 대학들이 생겨났지만, 학문적인 수준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정부는 급증하는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대학의 숫자는 늘려왔지만, 가장 중요한 교육의 질은 향상시키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의 대학들은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학문적 탁월성에는 아직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1997-1998년 금융위기 때, IMF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그 결과 투명성이 상당히 제고되었다. 투명성의 제고는 다윈의 ‘적자생존 이론’에 입각해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을 어느 정도 진작시키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한국경제와는 달리, 한국의 대학들은 그 기간 동안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감행하지 못했다. 시기를 놓침으로써, 그리고 학계가 자기만족 속에 안주함으로써, 한국의 대학개혁은 점차 거추장스럽고, 비용이 많이 들며, 복잡한 작업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교육부문에서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한 구조조정이 시행되어야만 한다. 한국에서의 대학 구조조정은, 능력 있는 대학만이 국가교육 기관으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능력 있는 대학이 곧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대학의 부실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첫째, 한국의 대학들은 그동안 산업에서처럼 다른 대학을 모방하는 소위 ‘나도주의’에 빠져, 교육의 질과는 관계없는 양적 팽창에 전념해왔다. 다시 말해, 다른 대학이 하는 대로 따라서 해야 손해를 안 본다는 잘못된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왔다. 다음은 그러한 ‘나도주의’의 세 가지 대표적 유형이다.
(1) 정부가 국가 정책으로 고급 기술인력의 양성을 천명함에 따라, 한 대학이 공대 학생정원을 늘리자, 전국의 모든 대학들이 다같이 공대 정원을 늘렸다.
(2) 지방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취지에서 어느 지방에 대학을 설립, 육성하면, 필요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지방들이 다 똑같은 것을 요구했다.
(3) 한 대학이 대학원 중심대학을 한다고 하니까, 다른 대학들도 모두 대학원을 확대해 결과적으로 국내 대학원 학생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둘째, 대학도 경제처럼 규모의 경제--좀 더 넓게는 범위의 경제--에 의존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지면 기업에서 단위 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대학은 그러한 논리에 의하여, ‘대학을 키우고 학생수가 많아지면 원가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학원생들의 수는 20년 전과 비교해 두 배에서 네 배까지 증가했고, 교육은 ‘너무 커져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 버렸다. 한국의 대학생들을 모두 합하면 전 인구의 4.07%에 이르는데, 이는 세계 최고의 규모이다.
셋째, 한국의 인구가 4천 7백만인데, 그 중 매해 100,000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한국 의 주요 3대 대학이자 소위 SKY 대학이라 불리는 서울대, 고대, 연대에 등록한다. 이는 곧 학연 사회인 한국에서 서울대, 고대, 연대 출신들만으로 사회 요직의 상당 부분이 채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소위 SKY대학 출신이 아닌 이들의 눈에는 3개 대학 출신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영향력의 불균형은 궁극적으로 한국사회를 다원화와 통합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대학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고, 국가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한국 대학들은 다음 네 가지 변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1) 효과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다양화와 사회통합
(2) 우수한 교수요원과 행정요원들의 확보
(3) 장기적 사회발전을 위한 국가 교육정책의 조정
(4) 학문적 수준 제고를 위한 대학 규모의 축소
서울대의 실상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와 세계경제는 대학들로 하여금 현재의 지식 전수만으로는 세계일류대학이 되기 어렵고, 생산적인 노동력을 산출하기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최근 수년동안 한국에서는 한국의 대학들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학문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만들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 사회 각 부문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현대사회는 정보를 모으는 구조를 시스템화함으로써 방대한 지식을 산출해낼 수 있다.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새로운 지식의 수명이 불과 몇 달, 혹은 몇 년 밖에 가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놀랄만한 변화와 기술혁명 때문에 한국의 대학들은 혁신적이고 효과적이어야만 하며, 유연하고 확대된 비전을 가져야만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대학들은 현대 정보사회의 요구에 부응할 만큼 유연하지도 혁신적이지도 못한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곧 우리 대학들이 아직 ‘지식창출’에 대해 효과적으로 가르칠 시설도 없고, 구조적인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대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식창출 추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작업을 시작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곧 대학들이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 변화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이나 혁신적인 정책 메커니즘을 못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지식의 결핍은 결국 1997년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금융위기로 나타났다. 그러한 금융위기로부터 한국 사회는 대학이 변화에 대처하는 교육을 시키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하는 소중한 교훈을 배웠다.
서울대학을 예로 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암기하거나 빈칸을 채우는 데에는 아주 능숙하다. 그들은 듣고 배운 것을 응용하라는 교육을 받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배우는데 그칠 뿐, 실제로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논문을 쓰게될 때, 서울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독창적으로 활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많은 서울대생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빈칸 밖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결핍은 한국사회의 생산성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된다.
서울대학교는 지난 10년 동안 연구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해왔고, 정부도 BK21 사업을 통해 적극적인 지원을 해왔다. 그러한 지원을 통해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서울대가 SCI에 등재된 논문의 수로는 2002년 세계 34위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실로 획기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연구 성과는 만족스럽지 못한 한국의 연구여건에서 볼 때에 매우 괄목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양적인 증가에 그치고 있을 뿐, 질적인 도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서울공대의 경우를 보면, 발표 논문의 수에서는 MIT나 스탠포드나 미시건 대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논문의 피인용 빈도 수를 보면 서울대학교는 아직도 세계적인 수준의 대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울대학교의 연구성과를 간단히 폄하할 수만은 없다. 논의를 한국 대학 전체로 확장하더라도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대학들은 척박한 연구 여건 가운데에서도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 우리나라 대학 전체의 연구성과를 합했을 때, 국가별로는 국민총생산의 순위에 상응하는 세계 13위에 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의 사회봉사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국가 발전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서울대 출신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비서울대 출신 사이에서 서울대의 사회봉사 결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최근의 한 연구용역에 의하면 외부인들은 서울대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 비서울대 출신들은 서울대가 한국사회에 엘리트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서울대 출신들은 사회를 위한 봉사는 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와 특권만 향유하고 있다고 본다.
서울대가 나아갈 방향
총장으로 취임한 후, 나는 서울대학교가 이러한 장애들을 극복하고 세계수준의 대학으로 발돋움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왔다. 서울대학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동료교수들과 더불어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는 다음 사항들이 사회 발전과 대학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 서울대학교는 학문 교수방법을 지식전수에서 지식창출로 전환할 것이다. 따라서 교수들은 학생들의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사고를 배양해주는 강의를 해야한다. 그래서 학생들로 하여금 각기 다른 상황에서, 주어진 빈칸 밖에서 사고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도와주어야만 한다. 머지않아 서울대학교는 학문 프로그램들을 바꾸어 학생들이 기존의 관념들에 도전하고, 낡은 관념들을 개선하며, 새로운 관념들을 창조하도록 할 것이다.
2. 사회적 책임과 다양화와 연관해서 정의, 고결함, 공중도덕, 책임감, 의무감, 그리고 지도력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급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의식을 가진 지도자들을 양성하고,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요소들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교과과정을 개발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 또한 문화적 다양성과 국제사회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3. 단지 시험을 잘 치르는 학생들이 아니라, 창의력 있고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학생들을 뽑기 위해 서울대학교의 입시제도 역시 바뀌어져야만 한다. 만일 더 효과적인 입시제도가 정착된다면, 서울대의 학생 구성원들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고 문화적 다양성과 새로운 아이디어 창출도 증가할 것이다. 학내 구성원들이 다양해지면, 그들과 교수들 사이의 상호교류가 훨씬 더 역동적이 되고 국제적인 학습 분위기도 조성될 것이다. 나는 다양한 지방 출신 학생들을 배려하는 지역균형제를 통해 서울대학교의 문호를 전국 각지에 열어 명실공히 국가대학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지역균형제는 국가의 예비 지도자들을 서울에서만 뽑지 않고 각 지방에서도 골고루 뽑아 전국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취지에서 지역균형제는 2005년 입시부터 시행될 것이다.
4. 대학 신입생 수에 대해서는 현재의 팽창주의를 지양하고, 규모축소와 교육내실을 추구할 생각이다. 교육의 질적 향상에 불필요한 조직과, 자원을 고갈시키는 과도한 학생 수는 축소해야만 한다. 예컨대 서울대의 「글쓰기 센터」는 300,000 달러의 적은 예산으로 운용되기 때문에 4,000명의 신입생들만 교육시키는 데도 태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학에는 지원해야할 다른 사업들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예산을 더 배정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최상의 글쓰기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는 신입생의 수를 축소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같은 논리가 다른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학생과 대학 시설의 ‘이상적인’ 비율을 고려한다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정원축소가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5. 연구 분야에서는, 새로운 분야의 연구를 할 수 있는 신임 교수들에게 충분한 재정적 및 제도적 지원을 하려고 한다. 과거에는 신임교수들이 그러한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6.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우에는 연구의 수준을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는 해도, 적어도 우리에게 비교우위가 있는 한국관련 연구분야에서는 연구결과의 질적 수준이 세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된다. 즉 한국의 경제발전, 한국재벌, 통일, 구조조정, 그리고 외환위기의 파급 등에 대한 연구에서는 서울대가 세계적인 메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7. 첨단분야의 자연과학 연구를 위해 서울대는 생명공학 분야의 혁신적 연구와 차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생명공학 공동연구원(BioMAX)」을 설립했다. BioMAX는 서울대가 갖고 있는 자원과 역량을 극대화 시켜서 탁월한 연구업적을 창출하고 산업화하기 위한 것이다. 더욱이, BioMAX는 다학제적 연구와, 관련학자들의 공동노력을 지원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생명과학, 생명공학, 생명의학, 생명농학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만들기 위해 생명공학과 정보공학과 나노공학 등을 다학제적으로 통합할 종합 시스템을 구축하게될 것이다.
8.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에게 최상의 동기유발과 최고의 교육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복지정책이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총장에 취임할 때, 나는 서울대교수들 중 무주택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해결책을 강구하다가, 나는 총장공관을 재개발해서 150개의 교수 아파트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거기에다가 현재 60가구인 교수아파트도 재건축해서 120가구의 아파트를 지으면, 모두 270개의 교수아파트가 생겨 교수주택문제가 거의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9. 대학예산의 중복되는 부분을 재조정해 서울대 교수들의 낮은 보수 수준도 개선할 것이다.
10. 서울대의 운영체제 개선도 일어나야 한다. 서울대에서는 지금까지 교수와 직원들의 참여나 의견제시가 배제된 하향식 운영이 시행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행정적 결정에 모두가 참여하는 그래서 밑에서 위로 올라오는 ‘상향식’으로 운영체제가 바꾸어질 것이다. 그동안 유명무실했던 평의원회도 강화해서 총장의 권한을 견제하고 또한 총장의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계획이다. 또한 총장선출제도 역시 관료주의와 정치화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선될 것이다.
서울대학교는 국가에 크게 공헌하는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하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세계의 다른 대학들처럼 서울대도 한국사회의 도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이고 유연하며, 효율적이고 적극적이 되어야만 한다. 대학은 과거의 업적이나 낡은 교수법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서울대는 그동안 각 분야에서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통해 국내 최고 대학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것은 곧 서울대가 미래 한국사회를 형성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부단히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 서울대학교는 사회적 책무를 반영하는 연구와 교수방법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갈 것이다. 그러한 혁신적인 방법 중 하나는 모든 교수가 이니시어티브를 쥐고 변화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교수들과 직원들은 서울대학교를 장차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미래 한국사회의 형성을 위해 최상의 학문적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명백한 운명이자 도덕적 책임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사회에 대한 요청
사회는 대학이 교육과 연구의 질을 제고시킬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곧 대학이 지식을 산출하고, 고급인력을 갖추어서 지식기반사회의 수요에 응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수준의 학문연구와 교육이 제도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 요구되는 사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았다.
1. 비록 교육과 연구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는 것이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교육에 대한 혁신적 노력과 재정적 지원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는 대학이 그러한 혁신을 스스로 수행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은 사회의 끊임없는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그러한 도움 없이는 대학 혁신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교육과 연구에 대한 최근 지원을 보면, 획기적인 수준 향상을 위한 본질적인 혁신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학생 1인당 교육경비, 교수 학생 비율, 학생 1인당 도서관의 장서 수 등을 위해 과감한 교육투자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교육과 연구의 개선을 위해서는 바로 그러한 것들이 정책의 기본으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2. 지식창출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우리는 새롭게 연구를 시작하는 학문 후속세대나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기존 연구자 모두를 위한 지원체제를 수립해야만 한다. 새로운 지식창출을 위해서는 연구기간 동안 내내 지속되는 지원체제가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연구지원이 일부분야에만 치우쳐 있는데, 연구의 질적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면 전폭적인 지원체제 수립이 필수적이다.
3. 이와 같은 연구지원 체제는 기초학문 분야에서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IMF 금융위기 이후, 학생들은 전통적인 학문과정보다는 자격증 획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건강하고 본질적인 지식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기초학문의 지원이 시행되지 않으면, ‘빈칸 밖에서 사고’하는 능력의 습득이나 새로운 지식의 창출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4. 대학은 교육인적자원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자율적으로 발전해나갈 기회를 가져야만 한다. 더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해외로 나가려는 인력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재능 있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유치하는 데나, 혁신적인 교과과정을 만드는데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연구 경쟁에도, 연구 단위의 통제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최근, 정부가 대학의 자율성을 다소간 인정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대학의 유연성과 능력을 제한하는 부차적인 규정들이 존재하고 있다. 교육과 연구와 행정에 자율을 허용하는 것은 환경의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