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미래와 (서울)대학의 비전 (2002.12.26)
등록일: 2009. 7. 2. 조회수: 15669
한국의 미래와 (서울)대학의 비전
나는 지난 해에 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한 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무거운 부담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게 주어진 임무가 단순히 한 대학교를 경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의 미래는 곧 우리 사회의 미래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대학총장의 역할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나를 깊은 성찰 속으로 이끌어 들어갔다. 나는 서울대학교의 비전을 한국사회의 당위적인 미래와 연결시켜서 재조명하게 되었다. 생각의 와중에 정희성 시인의 시 한구절이 떠올랐다.
누가 조국의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서울대를 포함한 대학의 미래는 바로 한국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살아 움직이며 제 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목소리는 그렇다.
사회가 대학에 대해서 갖는 이런 기대를 상식적 혹은 이론적으로 해석해보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대학은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대학이 배출시킨 '사람'과 제도는 한 나라의 장래를 결정짓는다. 이러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정리하면, 한국의 미래는 대학이 사람을 제대로 교육시키는가에 달려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조명해야되는 것이다. 대학이 사람들에게 지식․지혜․자긍심․자기통제력․사명감․타인에 대한 감수성(sensitivity)․비판정신 등을 교육하여, 경륜을 키우고 창의성을 계발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암담하다는 의미도 된다.
이제는 퇴색했지만, 1990년대에 미국경제는 저물가 속에서 고속성장을 누렸다.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그 원인으로, 컴퓨터, 정보기술 등의 큰 공헌을 들고 있다. 그런 성장요인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컴퓨터와 정보기술 등은 인간에 의해 활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1990년대 미국인들이 훌륭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1990년대 미국인이 특별히 더 우수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197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대학개혁이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미국경제는 1960년대 황금시대를 지나, 1970년대에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당시에는, 미국이 일본에 의해 추월 당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주의가 득세하기도 하였었다. 어려운 경제환경에서 미국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력을 스스로 하게 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학의 개혁이다.
1970년대 미국의 유수한 대학들은 스스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미국대학은 70년대 당시에도 이미 선진적이었다. 그렇지만, 대학당국은 기존의 분과학문 중심의 과목편제와 응용기술 중심의 교육이, 새롭게 변하는 기술환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교육방식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학과들 사이의 장벽을 없애고, 각 분과학문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했다. 또한 대학교육의 본질은 기술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사고력을 배양하는데 있음을 강조했다. 따라서, 세분화된 전공중심의 교육보다는 기초학문 전공영역의 범주 속에서 추출된 교육과정을 시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문대학원의 입학조건을 완화했다.
이처럼 미국 대학이 기초과목을 강조하고 분과학문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는데 주력한 근저에는 미래사회의 변화방향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미국대학들은 지식-기술의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학교에서 배운 세분화된 지식이나 특정기술은 사회에 나가면 곧바로 사장되기 쉽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대학이 빠른 시일 내에 실업자가 될 학생들을 양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의 대학들은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자기주도 학습능력’ 그 자체를 배양하는데 주력했다. 그럼으로써 급속도로 변화하는 기술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인력을 노동시장에 배출하였고, 그들은 1990년대의 경제성장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과거 3~40년을 뒤돌아보면, 서울대를 포함한 기존의 대학교육시스템이 선진과학이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하는데는 상당히 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가들과 지식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대학은 교수들이 외국대학에서 습득한 선진학문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역할로 충분하였다.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서 배운 지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전체를 빠른 속도로 성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나라에서 과거 3~40년 동안 연 8%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인 중의 하나는, 한국이 사람을 길러내는 데에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선진국가들과 지식격차가 급격히 줄어든 최근의 상황에서는, 한국의 대학이 지식을 전수‘만’ 할 것이 아니라 창출‘까지’ 해내야 한다. 현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대학들은 아직도 지식창출이 아니라 지식전수 중심대학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미흡함에서 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오늘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한국대학의 현실
대학, 더 넓게 보아 교육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산업이 건전해야 나라가 건전하다. 한국의 대학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지금은 부실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산업이 성장한 과정과 비슷하게,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으나 질적으로 부실한 상태이다. 지난 몇 십년 동안 한국경제는, 중복투자로 인한 과잉시설로 몸살을 앓아왔다. 경제의 실물부문에서는 수익률이 낮고 금융부문에서는 부실채권이 많이 쌓여왔다. 대학도 지난 3~40년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하며, 한국경제와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교육시설부문에 과잉투자가 일어났고 대학생 수는 시설투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대학 역시 내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와 한국 대학간에 차이가 있다면, 구조조정의 이행여부가 될 것이다. 한국경제는 좋건 싫건 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에, 미진하나마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투명성도 많이 제고되고, 수익을 못 올리면 업계를 떠나야 한다는 인식도 널리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구조조정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게된 것이다. 그러나, 교육분야는 구조조정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교육에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대학의 부실팽창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타산업과 마찬가지로 교육산업, 그것의 일부인 대학도 소위 ‘나도주의(me-tooism)’에 젖어 팽창을 계속했다고 보여진다. 대학들은 '나도주의에 따라 다른 대학이 종합대학을 하면 우리대학도 동참해야 손해를 안본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커다란 종합대학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들은 나도주의 때문에 과잉규모로 고생하고 있다. 둘째, 대학도 한국경제처럼 규모의 경제를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좀더 넓게는 범위의 경제에 대해서도 믿음을 갖고 있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지면 기업에서 단위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것인데, 대학 역시 그 논리에 따라 학생 수가 많아지고 대학을 키워야 원가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학은 계속 팽창노선을 걸어왔다. 셋째, 국가 정책목표에 따라, 대학은 사회의 장기적인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적으로 공급측면만을 따라 학생 수를 늘려왔다. 예를 들면, 정부가 고급 노동력이 부족하다며 공대의 학생 수를 늘리자고 하면, 한 대학이 공대 정원을 늘린다. 그리고 다른 대학이 모두 따라 하는 식이다. 지방경제를 육성한다고 해서, 한쪽에서 지방대를 키우니 다른 지방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 중심대학을 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대학원생 수를 늘렸다. 지난 1~20년 동안 대학원 정원은 2~4배 증가하였다. 그 결과, 경제의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대학교육서비스 역시 ‘너무 커져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의 학부생과 대학원생 수를 모두 합하면 전 인구의 4.07%에 이른다. 이것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또한, 외국과 비교할 때 특정대학의 학생수 점유율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서울대학교의 재학생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06%이다. 현재 서울대의 등록생은 3만 3천명이며, 학적을 둔 재적생 숫자는 3만 8천명에 달한다. 세계 일류대학중에서 이렇게 큰 대학은 흔하지 않다. 우리나라 전체인구 가운데 서울대 재학생 비율은 일본 동경대의 3배 이상이고, 미국 하버드대의 약 10배, 버클리 대학의 약 7배가 된다.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대학정원을 논의하기 위해서 대학의 정원을 소속국가의 인구대비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인구가 4천 7백만 명인데, 서울대의 올해 신입생 수는 4000여명을 상회하고 있다. 미국 인구가 2억 8천 명인데 비해 하버드 대학은 신입생을 1년에 1천 6백 명 정도 뽑는다. 서울대와 하버드대의 비교뿐만 아니라, 타 주요대학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해 보아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서울대, 연대, 고려대의 학생 수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0.18% 정도 되는데, 미국의 주요 3개 대학(하버드․MIT․버클리)을 합해도 0.02%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서울대․연대․고려대의 학생 수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의 주요대학이 차지하는 것보다 10배가 훨씬 넘을 정도로 과도하게 커졌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특정대학 집중현상은, 다원화 사회에서 사회통합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 2억 8천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에서, 일년에 하버드 대학 출신이 1천 5백명 밖에 안 나오고, 주요 10개 대학의 입학생이 1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5천명이 안된다. 반면에, 우리는 인구가 4천 7백만 명인데 1년에 서울대, 연대, 고대에서만 1만 5천명 정도를 뽑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미국은 사회요직을 하버드졸업생 전원으로 다 채워놓고 나서도 다른 대학출신을 충원할 여지가 많다. 미국은 대학정원의 규모상 다양한 대학출신으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다원화의 기반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적은 한국사회에서 소위 sky대학이라는 서울대․연대․고대는 1년에 1만 5천명을 뽑는다. 특히 학연사회인 우리사회에서는 만오천명이나 되는 3개대학 출신만으로 사회의 요직이 상당부분 채워지게 된다. sky대학 출신자가 아닌 국민들 눈에는 ‘3개대학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심한 소외감에 좌절한다. 인구대비 대학정원의 비율이 크다는 것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다원화 및 통합에서 멀어지게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국민통합을 이루기위해서는 대학이 규모 면에서는 적정수준을 유지하고 팽창을 억제해야 한다. 그 대신에, 대학은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해야 한다. 우수정예의 인재를 내실있게 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두가지는 별개의 주문이 아니다. 현재의 한국대학이 너무 과대하게 팽창해 있는 규모를 축소하지 않고서는, 내실있는 교육을 하기가 힘들다. 대학규모의 축소와 질의 향상은 동전의 양면같은 보완명제이다.
서울대의 실상
이제부터는 대학이 처한 구체적 상황과 한국사회를 위해 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논의의 편의상, 본인이 몸담고 있는 서울대학을 사례로 하여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서울대는 지식전수의 면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지나간 시절의 영화로운 전설일 뿐이다. 1990년대 이후의 서울대는 지식창출을 요청하는 사회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식 전수 시대에서 지식 창출 시대로 가는 사회변화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지만) 서울대학은 지식창출형 인간을 배출하지 못하였고, 한국사회는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새 사람을 수혈받지 못하였다. 즉 한국사회는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이룰 인적 자원이 결핍되었다. 한국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위기관리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1990년대에 한국의 자본수익률은 하락했고 급기야 1997년 말에는 소위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학이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교육시키지 못할 때, 사회는 변화적응능력을 상실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연구측면에서 보면, 최근 10년 동안 서울대가 연구를 매우 강조하고, 정부가 BK21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아주 많은 지원을 하였다. 그러한 지원을 통해서, 적어도 자연과학분야에서는 서울대가 이른바 SCI(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있는 ISI라는 사설회사로서, 세계의 학술지 중에서 3,900개 정도를 골라, 자연과학분야의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사람의 소속이 어디인지 따져 각 나라, 대학의 순위를 매기고 있다)에 등재된 논문의 수가 2001년에세계 40위에 이르고 있다. 2002년에는 적어도 35위 정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40위면 상당히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각국의 대표대학이 나와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학이 경쟁하는데 세계 40위는 상당한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를 제외하면 우리보다 앞선 대학이 없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4개 대학 정도가 우리보다 앞서 있다. 그것은 물론, 일본대학들이 우수한 면도 있지만 3,900개의 학술지에 일본어 저널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기 때문에 일본이 좀 유리하다. 우리나라의 저널은 10개 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성과는, 현재 우리의 연구여건에서 볼 때에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양적인 증가에 그치고 있고, 질적인 도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평가인 것 같다. 먼저, 게재된 논문의 수를 보면 세계적인 수준이다. 서울공대의 경우를 보면, 거의 모든 학과가 1인당 SCI 게재논문 수가 MIT, 스탠포드, 미시건 대학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논문의 피인용 건수로 보면 세계적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양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이것으로 매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학은 척박한 연구 여건 속에서 적어도 양적인 수준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고, 대학 전부를 합했을 때 국민총생산의 순위에 상응하는 세계 13위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대학을 무조건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육이라는 면에서 보면, 서울대의 경우 지식을 전수하는 기능은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학생들이 외국유학을 갔을 때 적어도 1, 2년 동안은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서울대 출신 유학생이 코스웍이수가 아니라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논문을 작성하면서 새로운 사태에 대한 문제해결력이 부족한지라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서울대는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여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인재’를 충분히 길러냈는지 자문해봐야할 대목이다. 나는 이것을 서울대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음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에 대한 봉사측면에서도 반성할 점이 많다. 서울대학 출신들이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자기 직업에서 충실히 일해 왔고, 그럼으로써 사회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서울대를 보는 것과 밖에서 서울대를 보는 것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총장이 된 이후, 밖에서는 서울대를 어떻게 보는지 관하여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 결과를 보면, 밖에서 보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서울대의 이미지에 관한 한 연구는,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만 누리고 있지, 활발한 사회환원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비판들이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밝혀준다. 특히,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한 서울대출신들이, 자신들이 얻은 지식에 입각해서, 한국사회와 경제에 대해 건설적으로 비판하고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기능도 해주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부족하다는 중간보고서가 나왔다.
서울대의 나아갈 방향
앞으로 서울대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총장이 된 이후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밝히기로 한다. 먼저, 현재의 팽창주의를 지양하고자 한다. 서울대학은 현재 건물이 과밀하고 학생정원이 너무 많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더 이상의 팽창을 막고 내실추구로 전환하고자 한다. 가능하다면 대학원과 학부학생의 수도 적정규모로 줄이는 방향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수월성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대학교가 담당할 수 있는 규모의 학생정원을 책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부터 운영하는 글쓰기센터를 예로 들어보겠다. 대학에서 글쓰기교육은 특별한 훈련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그동안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처음에는 글쓰기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입생이 4천명이 넘었다. 준비단계에서 예산을 추정하였다. 잘 하려면 10억, 보통으로 하려면 5억, 적당히 하려면 2억 6천만원이 든다고 했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전체 신입생을 대상으로 적당히 교육하는 것만은 피하기로 하였다. 우선 첫해에는 소규모로 계획하되 내실있는 운영을 하기로 하였다. 그에 대한 예산으로 2억 6천만 원을 편성했다. 글쓰기훈련을 하는데 2억 6천만 원의 예산은 태부족이다. 다른 교육투자부문과의 균형을 취하기 위하여, 예산을 늘리기도 어렵다. 결국 학생 수를 좀 줄여야 글쓰기 교육을 내실있게 실행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구분야에서는 신임교수에게 종자돈(Seed Money)을 제공하고자 한다. 교수가 자신의 기존분야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재정적, 제도적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신임교수의 경우, 그러한 지원을 외부에서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미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 제도를 더 보완하기로 했다. 30억 원 정도를 책정하여, 모든 신임교수들을 대상으로 이과분야에서는 2천만원을, 문과분야에는 1천 3백만 원을 지원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것은, 종자돈을 준다는 것이 좋은 연구결과가 나오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분야와 달리,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사실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구의 질적 수준이 세계적 수준으로 아주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재 여건에서 서울대가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비교우위가 있는 한국관련 연구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제성장, 외환위기, 기업구조조정, 재벌 등 한국경제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는 서울대가 세계적인 메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외국의 경제학자들도 한국경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부는 직접 한국경제에 대한 연구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제도적 측면 등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고, 또 한국에 대해 더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외국학자들보다 우수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법률 등 한국 사회를 둘러싼 여러 가지 주제에서 만큼은, 서울대가 세계적인 메카가 되도록 지원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한국학 연구에도 상당한 연구비를 지원하려고 한다.
통일연구를 위해서도 상당한 연구비를 배정하였다. 이제, 세계적으로 분단국가는 남‧북한만이 존재하고 있다. 통일이 실제로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문제는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간의 이해관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또 통일 그 자체만을 생각해보더라도, 경제와 문화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나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충분히 연구하고, 그에 대한 방안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문‧사회분야에서는 한국학 연구와 통일연구에 강조를 두고 있지만, 해결해야 할 보다 전반적인 과제로서 도서관 자료확충 문제가 있다. 더불어 이과의 기자재 확충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부이고,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험기자재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이런 문제들은, 한편으로는 문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초분야에 대한 것이다. 앞서 SCI에서 세계 40위권 내에 든다는 것은 주로 자연과학의 응용분야이다. 응용분야는, 어떤 면에서는, 제가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아도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 되는 곳은 발목을 잡지말고 놔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잘 안 되는 곳에 신경을 써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응용분야일지라도 첨단분야의 연구는 보다 적극적으로 진흥해야 한다. 대학의 연구도 시대적 조류와 함께 나아가야된다는 것이 나의 기본철학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울대는 생명공학공동연구원(BioMAX)을 설립했다. 첨단BT를 선도하고자 한 것이다. BioMAX는 서울대가 보유한 자원과 역량을 극대화시켜서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공동노력과 모험적(Adventurous) 연구개발정신으로 세계 최우수(eXcellent)의 연구결과를 창출, 산업화하려는 것이다. 더불어 차세대 BT분야의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정부와 업계의 자원을 동원하고 있다. 서울대의 생명공학 관련 연구인력을 네트워크하고, 세계 정상급 연구인력을 확충하여, 생명공학과 관련된 학제적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다. 그래서 Bioscience, Bioengineering, Biomedicine, Bioagriculture 등 융합된 학제간 통합시스템을 구축하고 IT, NT의 접목을 통한 최첨단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서울대학이 기존의 지식전수를 넘어서 학생들 스스로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고 학습하며 연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교육을 시도할 것이다. 즉 자기주도적 학습과 창의성의 기반 위에서 지식창출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강의와 교육을 해 나갈 것이다. 학생들이 미비하고 있는 기본적 기능을 갖추는데도 주력할 것이다. 올해에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훈련을 시행하고, 내년부터는 말하기 훈련․한자훈련․영어훈련까지 교육중점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가 학생들에게 위에서 나열한 인지적 영역에 치중한 교육을 시도한다면, 막스 베버가 말한 비지성적 전문가들만 양성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서울대는 지성, 덕성, 감성을 고루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프랑스의 교육개혁을 이끌었던 콩도르세는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교수의 자유’․‘학습의 자유’가 모두 중요”하고, “그 권리는 인권과 마찬가지로 옹호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울대 학생들도 비판적 지성을 갖춘 인재, 공동체적 덕성을 갖춘 인재로 만들고 싶다. 그러한 인재상을 다른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내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서울대학생들을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으로 길러내고자 한다.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던 지난 10월 15일에 이웃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학생들을 선정하여 제 1회 관악봉사상을 시상하였다. 음악대학 교수를 학생처장으로 임명하고 학생부처장은 여교수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시도 역시 우리 학생들을 문화적 감수성이나 타인과의 관계적 감수성 등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도적 조처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감성까지 고루 갖춘 인재를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서울대학이 감성과 덕성을 갖춘 균형적 지성인을 교육하고자 한다.’는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발점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대의 입시전형제도를 통해 선발하고자하는 신입생들의 모습은 한국사회의 미래가 요구하는 인재상과 일치해야 된다. 더 나아가 서울대 입시제도가 한국사회에 갖는 가공할 위력을 감안한다면, 입시를 통해 구현하고자하는 교육의 모습 역시 우리나라 교육기관이 지향해야 할 ‘새 시대의 새로운 교육’과도 궤도를 같이 해야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기존의 지식을 잘 습득할 수 있는 인재보다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인재를 요하고 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에 서울대도 창의성과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이 뛰어난 지식창출형 학생들을 선발하는 입시방식을 모색해야 된다. 현재까지 개발된 것들 가운데 ‘단기간 내에 대량의 입시지원학생을 대상으로 그런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는’ 특별한 선발방식은 없다. 대안으로 다양한 방식의 전형도구를 보완적으로 함께 채택한다면, 서울대는 다양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조우하게 되면, 서로의 상이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간접체험을 통하여 다양한 문화에 노출될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창의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이 아닐까?! 이에 저는 서울대가 앞으로 수능만 잘하는 사람․내신만 잘하는 사람․양쪽을 골고루 잘하는 사람․국제올림피아드 입상자를 뽑고, 또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재능을 갖춘 사람을 뽑아서, 서로가 창의성 개발을 유도하게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다.
서울대 입시전형제도로 갖고있는 복안이 또 하나 있다. 지역할당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여름에 기자에게 내 평소 생각을 무심코 발설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역할당제 논의가 사회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사실 지역할당제보다는 ‘지역인재선발제’나 ‘지역배려제’가 좀 더 적절한 표현같다. 이것은 내가 학생시절에 겪었던 몇가지 체험에 바탕해 형성된 아이디어이다. 나는 조순 선생님께서 ‘각 지역에서 몇 명씩 뽑아 학생회의 인적 구성을 다양하게 만든다면, 학생들은 여러 가지 문화를 서로 배울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내용에서 지역배려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기고를 하셨던 김기환 박사의 기고문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읽었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나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미국 유학중에 대부분의 아이비 리그 대학들이 지역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는 더욱 더 지역배려제에 대한 신념을 쌓아 갔다.
최근에 보보스(BOBOS)라는 책을 접하면서, 나는 마침내 지역배려제에 대한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이 책의 1 장에 따르면, 하버드는 코난트(Conant) 총장이 1950년대에 지역배려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학생을 뽑으면서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고 한다. 하버드대는 이제 매사추세츠의 일류대학에 그치지않고, 미국전역의 일류대학이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버드는 전세계를 배려하면서 세계 각국의 사람을 선발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세계의 일류대학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참고로 중국의 청화대나 북경대에서도 철저하게 지역배려제를 시행하고 있다. 서울대 역시 전국방방곡곡에서 미래의 잠재적 경제‧정치 지도자를 뽑아야, 미래사회에서도 명실상부한 전국의 일류대학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본다. (지역배려제를 통하여 서울대는 학생들의 창의성을 개발할 토양을 갖추게 된다고 말씀드린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지역배려제가 지역적인 균형발전과 사회통합에 기여할 것이다. 덧붙여서 지역배려제는 인구의 균형적 분산까지 몰고 올 것이다. 교육 때문에 서울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출신 지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서울대는 2005년부터 지역배려제를 시행할 생각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곧 확정지을 계획이다. 지역배려제에 대하여 처음에는 상당한 비판적이었던 사회의 여론도 차츰 좋아지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다.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잘 되려면,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교수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에 총장선거를 거치면서, 서울대 교수들이, 무주택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해결책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대안의 하나가, 내가 총장공관에 들어가지 않는 대신에, 공관을 재개발해서 교수아파트를 130가구 정도 짓는 것이다. 그 외에 현재 있는 교수아파트 60가구도 재개발해서 130가구를 지을 수 있다. 이렇게, 260가구를 지으면 무주택교수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서울대학의 아주 낮은 보수수준도 개선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학예산의 중복과 낭비를 막아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교수들 봉급을 인상할 계획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교수들의 복지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그들이 교육과 연구 및 사회봉사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교수들의 복지를 기초수준이나마 향상시켜주기 위하여서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도 절실한 상황이다. 많은 사회적 지원을 호소하는 바이다.
서울대의 운영체제를 민주적으로 개선하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에서는 지금까지 하향식 운영이 많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학장회의에 가면 총장과 본부가 내놓은 안건을 그냥 통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건을 상향식으로 제기하도록 제안했다.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평의원회도 강화해서, 총장을 견제하고 또한 총장이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것이다. 총장 선출제도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연구팀이 개선점을 모색하였다. 학내구성원의 의견수렴을 거친 상태다.
서울대가 설립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서울대도, 다른 조직이나 제도처럼 자기개혁과 혁신을 계속해야만 살아남는다. 그래야만 50년, 100년 이후에도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와 국가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서울대 스스로가 어떤 개혁방안이든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모색할 것이다. 서울대 구성원들은 중장기적으로 세계 톱10대학을 추구해나갈 것이다. 세계 톱10 대학진입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총장의 권한도 많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임기 중에 그 기초를 마련할 생각이다.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2002년 12월 26일
서울대학교 총장 정운찬
나는 지난 해에 서울대학교 총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한 기관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무거운 부담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내게 주어진 임무가 단순히 한 대학교를 경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특히 대학의 미래는 곧 우리 사회의 미래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대학총장의 역할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나를 깊은 성찰 속으로 이끌어 들어갔다. 나는 서울대학교의 비전을 한국사회의 당위적인 미래와 연결시켜서 재조명하게 되었다. 생각의 와중에 정희성 시인의 시 한구절이 떠올랐다.
누가 조국의 가는 길을 묻거든
눈을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서울대를 포함한 대학의 미래는 바로 한국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살아 움직이며 제 역할을 다할 때 한국의 미래는 밝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한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목소리는 그렇다.
사회가 대학에 대해서 갖는 이런 기대를 상식적 혹은 이론적으로 해석해보면 어떤 이야기가 될까? 대학은 사람을 키우는 곳이다. 대학이 배출시킨 '사람'과 제도는 한 나라의 장래를 결정짓는다. 이러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정리하면, 한국의 미래는 대학이 사람을 제대로 교육시키는가에 달려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조명해야되는 것이다. 대학이 사람들에게 지식․지혜․자긍심․자기통제력․사명감․타인에 대한 감수성(sensitivity)․비판정신 등을 교육하여, 경륜을 키우고 창의성을 계발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암담하다는 의미도 된다.
이제는 퇴색했지만, 1990년대에 미국경제는 저물가 속에서 고속성장을 누렸다. 이른바, 신경제(New Economy)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그 원인으로, 컴퓨터, 정보기술 등의 큰 공헌을 들고 있다. 그런 성장요인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컴퓨터와 정보기술 등은 인간에 의해 활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1990년대 미국인들이 훌륭했다는 점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1990년대 미국인이 특별히 더 우수한 능력을 갖게 된 것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197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대학개혁이 그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미국경제는 1960년대 황금시대를 지나, 1970년대에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당시에는, 미국이 일본에 의해 추월 당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주의가 득세하기도 하였었다. 어려운 경제환경에서 미국은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노력을 스스로 하게 되었고, 사회 전반에 걸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학의 개혁이다.
1970년대 미국의 유수한 대학들은 스스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미국대학은 70년대 당시에도 이미 선진적이었다. 그렇지만, 대학당국은 기존의 분과학문 중심의 과목편제와 응용기술 중심의 교육이, 새롭게 변하는 기술환경에는 적합하지 않은 교육방식이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학과들 사이의 장벽을 없애고, 각 분과학문간의 거리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했다. 또한 대학교육의 본질은 기술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창조할 수 있는 사고력을 배양하는데 있음을 강조했다. 따라서, 세분화된 전공중심의 교육보다는 기초학문 전공영역의 범주 속에서 추출된 교육과정을 시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문대학원의 입학조건을 완화했다.
이처럼 미국 대학이 기초과목을 강조하고 분과학문 사이의 장벽을 제거하는데 주력한 근저에는 미래사회의 변화방향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즉, 미국대학들은 지식-기술의 변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는 환경에서, 학교에서 배운 세분화된 지식이나 특정기술은 사회에 나가면 곧바로 사장되기 쉽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대학이 빠른 시일 내에 실업자가 될 학생들을 양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미국의 대학들은 스스로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자기주도 학습능력’ 그 자체를 배양하는데 주력했다. 그럼으로써 급속도로 변화하는 기술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인력을 노동시장에 배출하였고, 그들은 1990년대의 경제성장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과거 3~40년을 뒤돌아보면, 서울대를 포함한 기존의 대학교육시스템이 선진과학이나 기술을 전수하고 확산하는데는 상당히 효율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가들과 지식격차가 크게 벌어져 있던 경제개발 초기단계에, 대학은 교수들이 외국대학에서 습득한 선진학문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역할로 충분하였다. 학생들은 졸업 후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서 배운 지식을 확산시켰고, 경제전체를 빠른 속도로 성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본과 자원이 모두 부족했던 나라에서 과거 3~40년 동안 연 8%의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던 주요인 중의 하나는, 한국이 사람을 길러내는 데에 비교적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선진국가들과 지식격차가 급격히 줄어든 최근의 상황에서는, 한국의 대학이 지식을 전수‘만’ 할 것이 아니라 창출‘까지’ 해내야 한다. 현실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대학들은 아직도 지식창출이 아니라 지식전수 중심대학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런 미흡함에서 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오늘 “한국의 미래와 대학의 비전”이라는 주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한국대학의 현실
대학, 더 넓게 보아 교육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산업이 건전해야 나라가 건전하다. 한국의 대학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지금은 부실한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산업이 성장한 과정과 비슷하게, 양적으로는 성장하였으나 질적으로 부실한 상태이다. 지난 몇 십년 동안 한국경제는, 중복투자로 인한 과잉시설로 몸살을 앓아왔다. 경제의 실물부문에서는 수익률이 낮고 금융부문에서는 부실채권이 많이 쌓여왔다. 대학도 지난 3~40년 동안 지속적으로 팽창하며, 한국경제와 유사한 길을 걸어왔다. 교육시설부문에 과잉투자가 일어났고 대학생 수는 시설투자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대학 역시 내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와 한국 대학간에 차이가 있다면, 구조조정의 이행여부가 될 것이다. 한국경제는 좋건 싫건 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에, 미진하나마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투명성도 많이 제고되고, 수익을 못 올리면 업계를 떠나야 한다는 인식도 널리 확산되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구조조정이 어느정도 이루어지게된 것이다. 그러나, 교육분야는 구조조정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교육에도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대학의 부실팽창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타산업과 마찬가지로 교육산업, 그것의 일부인 대학도 소위 ‘나도주의(me-tooism)’에 젖어 팽창을 계속했다고 보여진다. 대학들은 '나도주의에 따라 다른 대학이 종합대학을 하면 우리대학도 동참해야 손해를 안본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한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커다란 종합대학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대부분의 대학들은 나도주의 때문에 과잉규모로 고생하고 있다. 둘째, 대학도 한국경제처럼 규모의 경제를 너무 과신했던 것 같다. 좀더 넓게는 범위의 경제에 대해서도 믿음을 갖고 있다. 규모의 경제는 규모가 커지면 기업에서 단위당 생산비가 줄어든다는 것인데, 대학 역시 그 논리에 따라 학생 수가 많아지고 대학을 키워야 원가절감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에 따라 대학은 계속 팽창노선을 걸어왔다. 셋째, 국가 정책목표에 따라, 대학은 사회의 장기적인 수요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적으로 공급측면만을 따라 학생 수를 늘려왔다. 예를 들면, 정부가 고급 노동력이 부족하다며 공대의 학생 수를 늘리자고 하면, 한 대학이 공대 정원을 늘린다. 그리고 다른 대학이 모두 따라 하는 식이다. 지방경제를 육성한다고 해서, 한쪽에서 지방대를 키우니 다른 지방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대학원 중심대학을 한다고 하니까 너도나도 대학원생 수를 늘렸다. 지난 1~20년 동안 대학원 정원은 2~4배 증가하였다. 그 결과, 경제의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대학교육서비스 역시 ‘너무 커져서 좋은 제품이 나오기 힘든 산업’이 되어버렸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의 학부생과 대학원생 수를 모두 합하면 전 인구의 4.07%에 이른다. 이것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또한, 외국과 비교할 때 특정대학의 학생수 점유율이 과도하게 집중되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서울대학교의 재학생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0.06%이다. 현재 서울대의 등록생은 3만 3천명이며, 학적을 둔 재적생 숫자는 3만 8천명에 달한다. 세계 일류대학중에서 이렇게 큰 대학은 흔하지 않다. 우리나라 전체인구 가운데 서울대 재학생 비율은 일본 동경대의 3배 이상이고, 미국 하버드대의 약 10배, 버클리 대학의 약 7배가 된다.
사회통합의 차원에서 대학정원을 논의하기 위해서 대학의 정원을 소속국가의 인구대비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인구가 4천 7백만 명인데, 서울대의 올해 신입생 수는 4000여명을 상회하고 있다. 미국 인구가 2억 8천 명인데 비해 하버드 대학은 신입생을 1년에 1천 6백 명 정도 뽑는다. 서울대와 하버드대의 비교뿐만 아니라, 타 주요대학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비교해 보아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서울대, 연대, 고려대의 학생 수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0.18% 정도 되는데, 미국의 주요 3개 대학(하버드․MIT․버클리)을 합해도 0.02%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서울대․연대․고려대의 학생 수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의 주요대학이 차지하는 것보다 10배가 훨씬 넘을 정도로 과도하게 커졌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특정대학 집중현상은, 다원화 사회에서 사회통합의 어려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 2억 8천 명의 인구를 가진 나라에서, 일년에 하버드 대학 출신이 1천 5백명 밖에 안 나오고, 주요 10개 대학의 입학생이 1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5천명이 안된다. 반면에, 우리는 인구가 4천 7백만 명인데 1년에 서울대, 연대, 고대에서만 1만 5천명 정도를 뽑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미국은 사회요직을 하버드졸업생 전원으로 다 채워놓고 나서도 다른 대학출신을 충원할 여지가 많다. 미국은 대학정원의 규모상 다양한 대학출신으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는 다원화의 기반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규모가 적은 한국사회에서 소위 sky대학이라는 서울대․연대․고대는 1년에 1만 5천명을 뽑는다. 특히 학연사회인 우리사회에서는 만오천명이나 되는 3개대학 출신만으로 사회의 요직이 상당부분 채워지게 된다. sky대학 출신자가 아닌 국민들 눈에는 ‘3개대학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심한 소외감에 좌절한다. 인구대비 대학정원의 비율이 크다는 것이 결국은 우리 사회를 다원화 및 통합에서 멀어지게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국민통합을 이루기위해서는 대학이 규모 면에서는 적정수준을 유지하고 팽창을 억제해야 한다. 그 대신에, 대학은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해야 한다. 우수정예의 인재를 내실있게 양성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두가지는 별개의 주문이 아니다. 현재의 한국대학이 너무 과대하게 팽창해 있는 규모를 축소하지 않고서는, 내실있는 교육을 하기가 힘들다. 대학규모의 축소와 질의 향상은 동전의 양면같은 보완명제이다.
서울대의 실상
이제부터는 대학이 처한 구체적 상황과 한국사회를 위해 대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기로 하겠다. 논의의 편의상, 본인이 몸담고 있는 서울대학을 사례로 하여 논지를 전개하고자 한다.
서울대는 지식전수의 면에서는 상당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지나간 시절의 영화로운 전설일 뿐이다. 1990년대 이후의 서울대는 지식창출을 요청하는 사회적 요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지식 전수 시대에서 지식 창출 시대로 가는 사회변화에 제대로 편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지만) 서울대학은 지식창출형 인간을 배출하지 못하였고, 한국사회는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새 사람을 수혈받지 못하였다. 즉 한국사회는 ‘모방을 통한 양적 팽창’에서 ‘창조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이룰 인적 자원이 결핍되었다. 한국사회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위기관리능력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1990년대에 한국의 자본수익률은 하락했고 급기야 1997년 말에는 소위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대학이 변화에 대처하는 능력을 교육시키지 못할 때, 사회는 변화적응능력을 상실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연구측면에서 보면, 최근 10년 동안 서울대가 연구를 매우 강조하고, 정부가 BK21프로그램 등을 통해서 아주 많은 지원을 하였다. 그러한 지원을 통해서, 적어도 자연과학분야에서는 서울대가 이른바 SCI(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있는 ISI라는 사설회사로서, 세계의 학술지 중에서 3,900개 정도를 골라, 자연과학분야의 학술지에 논문을 실은 사람의 소속이 어디인지 따져 각 나라, 대학의 순위를 매기고 있다)에 등재된 논문의 수가 2001년에세계 40위에 이르고 있다. 2002년에는 적어도 35위 정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계적으로 40위면 상당히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각국의 대표대학이 나와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대학이 경쟁하는데 세계 40위는 상당한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영국의 옥스퍼드, 캠브리지를 제외하면 우리보다 앞선 대학이 없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4개 대학 정도가 우리보다 앞서 있다. 그것은 물론, 일본대학들이 우수한 면도 있지만 3,900개의 학술지에 일본어 저널도 상당히 많이 포함되기 때문에 일본이 좀 유리하다. 우리나라의 저널은 10개 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성과는, 현재 우리의 연구여건에서 볼 때에 매우 괄목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양적인 증가에 그치고 있고, 질적인 도약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평가인 것 같다. 먼저, 게재된 논문의 수를 보면 세계적인 수준이다. 서울공대의 경우를 보면, 거의 모든 학과가 1인당 SCI 게재논문 수가 MIT, 스탠포드, 미시건 대학에 뒤지지 않는다. 물론 논문의 피인용 건수로 보면 세계적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양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이것으로 매도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대학은 척박한 연구 여건 속에서 적어도 양적인 수준에서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고, 대학 전부를 합했을 때 국민총생산의 순위에 상응하는 세계 13위에 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하면, 대학을 무조건 비판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교육이라는 면에서 보면, 서울대의 경우 지식을 전수하는 기능은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학생들이 외국유학을 갔을 때 적어도 1, 2년 동안은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이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서울대 출신 유학생이 코스웍이수가 아니라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논문을 작성하면서 새로운 사태에 대한 문제해결력이 부족한지라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서울대는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그것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여 창조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인재’를 충분히 길러냈는지 자문해봐야할 대목이다. 나는 이것을 서울대의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음으로 받아들인다.
사회에 대한 봉사측면에서도 반성할 점이 많다. 서울대학 출신들이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자기 직업에서 충실히 일해 왔고, 그럼으로써 사회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서울대를 보는 것과 밖에서 서울대를 보는 것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총장이 된 이후, 밖에서는 서울대를 어떻게 보는지 관하여 연구용역을 맡겼다. 그 결과를 보면, 밖에서 보는 것은 상당히 부정적인 것이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서울대의 이미지에 관한 한 연구는, 서울대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만 누리고 있지, 활발한 사회환원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비판들이 사회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밝혀준다. 특히,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한 서울대출신들이, 자신들이 얻은 지식에 입각해서, 한국사회와 경제에 대해 건설적으로 비판하고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기능도 해주어야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부족하다는 중간보고서가 나왔다.
서울대의 나아갈 방향
앞으로 서울대는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 총장이 된 이후로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 밝히기로 한다. 먼저, 현재의 팽창주의를 지양하고자 한다. 서울대학은 현재 건물이 과밀하고 학생정원이 너무 많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더 이상의 팽창을 막고 내실추구로 전환하고자 한다. 가능하다면 대학원과 학부학생의 수도 적정규모로 줄이는 방향으로 가려고 생각하고 있다. 수월성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대학교가 담당할 수 있는 규모의 학생정원을 책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부터 운영하는 글쓰기센터를 예로 들어보겠다. 대학에서 글쓰기교육은 특별한 훈련이 아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을 그동안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처음에는 글쓰기센터를 운영하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입생이 4천명이 넘었다. 준비단계에서 예산을 추정하였다. 잘 하려면 10억, 보통으로 하려면 5억, 적당히 하려면 2억 6천만원이 든다고 했다. 예산이 부족하다고, 전체 신입생을 대상으로 적당히 교육하는 것만은 피하기로 하였다. 우선 첫해에는 소규모로 계획하되 내실있는 운영을 하기로 하였다. 그에 대한 예산으로 2억 6천만 원을 편성했다. 글쓰기훈련을 하는데 2억 6천만 원의 예산은 태부족이다. 다른 교육투자부문과의 균형을 취하기 위하여, 예산을 늘리기도 어렵다. 결국 학생 수를 좀 줄여야 글쓰기 교육을 내실있게 실행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연구분야에서는 신임교수에게 종자돈(Seed Money)을 제공하고자 한다. 교수가 자신의 기존분야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거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재정적, 제도적 뒷받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신임교수의 경우, 그러한 지원을 외부에서 확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미 부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 제도를 더 보완하기로 했다. 30억 원 정도를 책정하여, 모든 신임교수들을 대상으로 이과분야에서는 2천만원을, 문과분야에는 1천 3백만 원을 지원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것은, 종자돈을 준다는 것이 좋은 연구결과가 나오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분야와 달리,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는 사실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구의 질적 수준이 세계적 수준으로 아주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현재 여건에서 서울대가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비교우위가 있는 한국관련 연구는 세계 최고의 수준을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한국의 경제성장, 외환위기, 기업구조조정, 재벌 등 한국경제에 관한 연구에 대해서는 서울대가 세계적인 메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외국의 경제학자들도 한국경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일부는 직접 한국경제에 대한 연구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제도적 측면 등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고, 또 한국에 대해 더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경제학자들이 외국학자들보다 우수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법률 등 한국 사회를 둘러싼 여러 가지 주제에서 만큼은, 서울대가 세계적인 메카가 되도록 지원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한국학 연구에도 상당한 연구비를 지원하려고 한다.
통일연구를 위해서도 상당한 연구비를 배정하였다. 이제, 세계적으로 분단국가는 남‧북한만이 존재하고 있다. 통일이 실제로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문제는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여러 국가들간의 이해관계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이다. 또 통일 그 자체만을 생각해보더라도, 경제와 문화뿐만 아니라 제도적으로나 사회적 측면에서 많은 문제들이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충분히 연구하고, 그에 대한 방안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문‧사회분야에서는 한국학 연구와 통일연구에 강조를 두고 있지만, 해결해야 할 보다 전반적인 과제로서 도서관 자료확충 문제가 있다. 더불어 이과의 기자재 확충도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부이고,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험기자재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이런 문제들은, 한편으로는 문과, 다른 한편으로는 기초분야에 대한 것이다. 앞서 SCI에서 세계 40위권 내에 든다는 것은 주로 자연과학의 응용분야이다. 응용분야는, 어떤 면에서는, 제가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아도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 되는 곳은 발목을 잡지말고 놔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잘 안 되는 곳에 신경을 써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응용분야일지라도 첨단분야의 연구는 보다 적극적으로 진흥해야 한다. 대학의 연구도 시대적 조류와 함께 나아가야된다는 것이 나의 기본철학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울대는 생명공학공동연구원(BioMAX)을 설립했다. 첨단BT를 선도하고자 한 것이다. BioMAX는 서울대가 보유한 자원과 역량을 극대화시켜서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공동노력과 모험적(Adventurous) 연구개발정신으로 세계 최우수(eXcellent)의 연구결과를 창출, 산업화하려는 것이다. 더불어 차세대 BT분야의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정부와 업계의 자원을 동원하고 있다. 서울대의 생명공학 관련 연구인력을 네트워크하고, 세계 정상급 연구인력을 확충하여, 생명공학과 관련된 학제적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할 것이다. 그래서 Bioscience, Bioengineering, Biomedicine, Bioagriculture 등 융합된 학제간 통합시스템을 구축하고 IT, NT의 접목을 통한 최첨단 연구를 수행할 것이다.
교육과 관련해서는 서울대학이 기존의 지식전수를 넘어서 학생들 스스로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고 학습하며 연구하는 능력을 갖추는 교육을 시도할 것이다. 즉 자기주도적 학습과 창의성의 기반 위에서 지식창출력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강의와 교육을 해 나갈 것이다. 학생들이 미비하고 있는 기본적 기능을 갖추는데도 주력할 것이다. 올해에는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훈련을 시행하고, 내년부터는 말하기 훈련․한자훈련․영어훈련까지 교육중점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가 학생들에게 위에서 나열한 인지적 영역에 치중한 교육을 시도한다면, 막스 베버가 말한 비지성적 전문가들만 양성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서울대는 지성, 덕성, 감성을 고루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 것에도 관심을 가질 것이다. 프랑스의 교육개혁을 이끌었던 콩도르세는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교수의 자유’․‘학습의 자유’가 모두 중요”하고, “그 권리는 인권과 마찬가지로 옹호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서울대 학생들도 비판적 지성을 갖춘 인재, 공동체적 덕성을 갖춘 인재로 만들고 싶다. 그러한 인재상을 다른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내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서울대학생들을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으로 길러내고자 한다.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던 지난 10월 15일에 이웃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학생들을 선정하여 제 1회 관악봉사상을 시상하였다. 음악대학 교수를 학생처장으로 임명하고 학생부처장은 여교수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시도 역시 우리 학생들을 문화적 감수성이나 타인과의 관계적 감수성 등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도적 조처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감성까지 고루 갖춘 인재를 만들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적어도 ‘서울대학이 감성과 덕성을 갖춘 균형적 지성인을 교육하고자 한다.’는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시발점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서울대의 입시전형제도를 통해 선발하고자하는 신입생들의 모습은 한국사회의 미래가 요구하는 인재상과 일치해야 된다. 더 나아가 서울대 입시제도가 한국사회에 갖는 가공할 위력을 감안한다면, 입시를 통해 구현하고자하는 교육의 모습 역시 우리나라 교육기관이 지향해야 할 ‘새 시대의 새로운 교육’과도 궤도를 같이 해야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기존의 지식을 잘 습득할 수 있는 인재보다는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인재를 요하고 있음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이에 서울대도 창의성과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이 뛰어난 지식창출형 학생들을 선발하는 입시방식을 모색해야 된다. 현재까지 개발된 것들 가운데 ‘단기간 내에 대량의 입시지원학생을 대상으로 그런 학생들을 효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는’ 특별한 선발방식은 없다. 대안으로 다양한 방식의 전형도구를 보완적으로 함께 채택한다면, 서울대는 다양한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대학에 입학하여 조우하게 되면, 서로의 상이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간접체험을 통하여 다양한 문화에 노출될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창의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이 아닐까?! 이에 저는 서울대가 앞으로 수능만 잘하는 사람․내신만 잘하는 사람․양쪽을 골고루 잘하는 사람․국제올림피아드 입상자를 뽑고, 또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재능을 갖춘 사람을 뽑아서, 서로가 창의성 개발을 유도하게 만들 구상을 가지고 있다.
서울대 입시전형제도로 갖고있는 복안이 또 하나 있다. 지역할당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 여름에 기자에게 내 평소 생각을 무심코 발설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지역할당제 논의가 사회적으로 표면화되었다. 사실 지역할당제보다는 ‘지역인재선발제’나 ‘지역배려제’가 좀 더 적절한 표현같다. 이것은 내가 학생시절에 겪었던 몇가지 체험에 바탕해 형성된 아이디어이다. 나는 조순 선생님께서 ‘각 지역에서 몇 명씩 뽑아 학생회의 인적 구성을 다양하게 만든다면, 학생들은 여러 가지 문화를 서로 배울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신 내용에서 지역배려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당시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기고를 하셨던 김기환 박사의 기고문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읽었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나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미국 유학중에 대부분의 아이비 리그 대학들이 지역배려를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나는 더욱 더 지역배려제에 대한 신념을 쌓아 갔다.
최근에 보보스(BOBOS)라는 책을 접하면서, 나는 마침내 지역배려제에 대한 확신을 굳히게 되었다. 이 책의 1 장에 따르면, 하버드는 코난트(Conant) 총장이 1950년대에 지역배려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학생을 뽑으면서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고 한다. 하버드대는 이제 매사추세츠의 일류대학에 그치지않고, 미국전역의 일류대학이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버드는 전세계를 배려하면서 세계 각국의 사람을 선발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세계의 일류대학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참고로 중국의 청화대나 북경대에서도 철저하게 지역배려제를 시행하고 있다. 서울대 역시 전국방방곡곡에서 미래의 잠재적 경제‧정치 지도자를 뽑아야, 미래사회에서도 명실상부한 전국의 일류대학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고 본다. (지역배려제를 통하여 서울대는 학생들의 창의성을 개발할 토양을 갖추게 된다고 말씀드린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국가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지역배려제가 지역적인 균형발전과 사회통합에 기여할 것이다. 덧붙여서 지역배려제는 인구의 균형적 분산까지 몰고 올 것이다. 교육 때문에 서울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출신 지역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서울대는 2005년부터 지역배려제를 시행할 생각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곧 확정지을 계획이다. 지역배려제에 대하여 처음에는 상당한 비판적이었던 사회의 여론도 차츰 좋아지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다.
앞서 말한 모든 것이 잘 되려면,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교수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여름에 총장선거를 거치면서, 서울대 교수들이, 무주택자가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해결책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대안의 하나가, 내가 총장공관에 들어가지 않는 대신에, 공관을 재개발해서 교수아파트를 130가구 정도 짓는 것이다. 그 외에 현재 있는 교수아파트 60가구도 재개발해서 130가구를 지을 수 있다. 이렇게, 260가구를 지으면 무주택교수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서울대학의 아주 낮은 보수수준도 개선할 계획을 갖고 있다. 대학예산의 중복과 낭비를 막아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교수들 봉급을 인상할 계획이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교수들의 복지가 해결되어야만 비로소 그들이 교육과 연구 및 사회봉사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교수들의 복지를 기초수준이나마 향상시켜주기 위하여서는, 정부나 기업의 지원도 절실한 상황이다. 많은 사회적 지원을 호소하는 바이다.
서울대의 운영체제를 민주적으로 개선하는 작업도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에서는 지금까지 하향식 운영이 많이 있어 왔다. 예를 들어, 학장회의에 가면 총장과 본부가 내놓은 안건을 그냥 통과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건을 상향식으로 제기하도록 제안했다.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평의원회도 강화해서, 총장을 견제하고 또한 총장이 나아갈 방향을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것이다. 총장 선출제도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연구팀이 개선점을 모색하였다. 학내구성원의 의견수렴을 거친 상태다.
서울대가 설립된 지 반세기가 지났다. 서울대도, 다른 조직이나 제도처럼 자기개혁과 혁신을 계속해야만 살아남는다. 그래야만 50년, 100년 이후에도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와 국가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면, 서울대 스스로가 어떤 개혁방안이든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모색할 것이다. 서울대 구성원들은 중장기적으로 세계 톱10대학을 추구해나갈 것이다. 세계 톱10 대학진입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총장의 권한도 많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주어진 임기 중에 그 기초를 마련할 생각이다. 어렵지만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2002년 12월 26일
서울대학교 총장 정운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