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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대생의 ‘5·18 광주’ 기억하기

2020.07.23.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여”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5·18 광주’는 부당한 권력에 목숨을 걸고 맞섰던,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손꼽히고 있다. 서울대 학생들은 그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그 현장에 부재했다는 죄의식을 안고 ‘5·18 광주’에서 민중들이 보여주었던 항쟁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다. 당시 학생들은 ‘5·18 광주’ 현장을 찍은 비디오를 돌려보거나 하며 광주항쟁에서의 저항과 희생을 기억함으로써 독재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의지를 불태웠다. 1980년대 서울대 학생들에게 ‘5·18 광주’는 잔인하고 부당한 국가 폭력의 상징이었고 고통받는 약자들을 방관하고 있다는 죄의식의 원천이었으며, 인간해방으로 이르는 길을 보여준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다.
‘5·18 광주’ 이후 학살의 흔적을 지우며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모는 군부 정권에 대항해 서울대 학생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기억 투쟁을 전개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으로 진압된 1980년 5월 27일 이후부터 산발적으로 학외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은 이어졌지만 본격적인 기억 투쟁은 1981년부터였다. 1981년 개학 이후 1학기 동안 3월 19일, 4월 14일, 5월 13일, 5월 27·28·29일에 학내 시위가 있었다.
1981년 3월 19일 서울대 학생들은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투쟁구호를 외치고 교내시위를 벌였다. 학생 2명이 횃불을 든 채 선언문을 발표하고 유인물을 뿌리자 1,000여 명의 학생이 모여들어 시위하면서 스크럼을 짜고 교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날의 시위 결과 대학생 61명이 연행되었고, 그 가운데 7명이 구속되었으며 학교에서는 7명을 제적 처분했다.

반파쇼 민주투쟁 선언, 송기호 교수 기증, 1981.3.19.

반파쇼 민주투쟁 선언
송기호 교수 기증, 1981.3.19.
1981년 3월 19일 ‘민주 학우 일동’이란 명의로 학내 시위에서 뿌려진 유인물이다. “피의 5월 민주항쟁을 총칼로 짓이긴 전 파쇼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투쟁을 “2,000여 5월 광주시민의 넋이 옹호하고 있다.”고 하며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횃불은 다시 타오르리, 송기호 교수 기증, 1981.4.14.

횃불은 다시 타오르리
송기호 교수 기증, 1981.4.14.
1981년 4월 14일 집회에서 뿌려진 ‘서울대민주학우’ 명의의 유인물이다. 광주항쟁 1주년을 맞이하여 광주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투쟁정신을 잇고자 하는 의지를 밝혔다. “학우여! 어찌 잊겠는가. 그 날의 피맺힌 절규를! 5월 항쟁의 영령이 우리를 민주화 투쟁의 대열로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학우여, 피 끓는 민주학우여! 이 고난의 역사의 아픔을 함께 나누자.”

광주항쟁의 진상, 임선웅 전 직원 기증, 1981
광주항쟁의 진상, 임선웅 전 직원 기증, 1981

1981년 어느 집회에서 뿌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이다. 광주항쟁 직전, 광주의 학생 시위, 5월 18일 시위의 발단과 공수부대의 만행, 시민과 학생의 무장경위,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 도청 철수 이후의 광주 상황, 계엄군에 의한 도청과 시가지 장악, 폭도란 과연 누구였는가, 광주항쟁의 왜곡과 은폐, 행동 지침 등의 부제목 아래 시간 순서에 따라 기재되어 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은 전남도청에서 최후로 항거하던 시민군을 계엄군이 완전히 무력 진압한 때이고, 서울대 학생들은 이를 기려 1981년 같은 날에 추모 집회를 열었다. 학생들의 감정은 격앙되어 있었지만 시위는 침묵시위였다. 광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집회였던 까닭이다. 격앙된 감정과 침묵이라는 긴장된 당시 분위기에 대해 현장에 있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황인데 경찰이 그렇다고 최루탄을 쏘지는 않았어요. 학생들이 침묵시위 하고 있으니까. 시위는 시위인데 우리가 뭔가 시끄럽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거든요. 단지 모였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그 학생들 사이사이에는 사복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이미 현장에 들어와 있었어요. [중략] 학생들 무리가 이동하면 또 사복 경찰들 무리도 이리 왔다 저리 왔다 하는 장면이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무료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습니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사람들인데 정작 할 말은 못하는 그런 상황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수백, 수천 명이 있었지만 조용하다 보니 시위도 할 수도 없었죠. 시위라는 건 누구한테 알리는 것인데 알리는 것도 아니고 뭣도 아닌 상태였어요. 그러면서 어쨌든 모였으니까 모인 우리 학생들끼리 말 없는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죠.”
(김철원, 『그들의 광주』, 한울, 2017)

당시와 시기가 가장 가까운 증언에서는 “분노, 두려움, 부끄러움이 교차된 눈망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세 번의 육성의 외침과 “퍽”하고 콘크리트에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경제학과 4학년 김태훈이 도서관 6층에서 투신한 것이었다. 유인물도 유서도 마이크도 없었다. 그 자체가 “말없는 분노”였다. 학생들이 분노하고 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붉은 피를 쏟아내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뒹구는, 아직 생명의 숨길이 끊어지지도 않은 형의 몸뚱아리 위”에 쏟아지는 최루탄과 동료의 죽음에도 다가서지 못하는 자기 자신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그 자체가 또 다른 광주항쟁이었던 것이다.

광주의 넋을 기린 항거, 자유언론, 임선웅 전 직원 기증, 1985.5.24.
광주의 넋을 기린 항거, 자유언론, 1985.5.24.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만든 자치 언론인 『자유언론』(1985.5.24.)에 실린 추도문 「광주의 넋을 기린 항거」이다. 총학생회와 복학생협의회가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네 명의 서울대생(김상진·김태훈·황정하·한희철)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추모문집 『산자여 따르라』(거름, 1984)를 요약·소개하였다.

사회대 뒤편에 위치한 김태훈 추모비
사회대 뒤편에 위치한 김태훈 추모비

그 후에도 5월이 되면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넋을 추모하고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 의지를 고취하는 집회가 학내에 상주하는 경찰들의 저지망을 뚫고 개최되었다. 1982년 이후에는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데 미국이 한 역할에 대한 의문과 그에 대한 항의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미국은 광주 시민 학살에 책임이 있다, 송기호 교수 기증, 1982.4.26.

미국은 광주 시민 학살에 책임이 있다
송기호 교수 기증, 1982.4.26.
1982년 4월 26일 집회에서 뿌려진 유인물.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미국이 한 역할을 고발함으로써 같은 해 3월 벌어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옹호하며 “미국이 우리의 진정한 친구일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소자보, 1985

소자보, 1985
1985년 4월 17일 각 대학교의 학생운동 세력은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을 결성하고, 산하에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위원회(삼민투)를 두었다. 5월 23일 서울대를 비롯한 삼민투 소속 서울지역 5개 대학 소속 학생 73명이 미국문화원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광주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 행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미국은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 등이었다. 농성 나흘째 학생들은 자진해서 해산했고, 연행된 73명 중 25명 구속, 43명 구류, 5명 훈방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정부는 미문화원 사건 관련 학생 징계에 미온적이라는 이유로 서울대학교 총장을 경질했다.

1980년대 초반 시위와 유인물의 형태로만 알려지고 기억되던 광주 민주화운동은 1984년 대학자율화조치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이야기된다. 소위 유화국면 속에서 총학생회가 재건되고 대학생들의 여러 가지 문화 활동, 즉 자치언론, 문학, 축제, 공연 등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장도 확대되기에 이른다. 그 주된 기억의 장은 오월제라고 불리는 축제였다. 1985년의 오월제는 5월 14일에서 17일까지 나흘간 개최되었는데 전야제와 폐막제를 사이에 두고 다양한 문화행사와 학술행사, 모의재판, 전시회를 망라하여 광주를 기억하는 종합문화제였다. 오월제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 벌어진 ‘산자여 따르라’라는 제목의 대동굿이었다. 여기서는 오월제에 참여한 모든 학생들이 모여 4·19에서 시작하여 6·3사태, 전태일 분신, 유신과 10·26, 80년 5월 항쟁을 거쳐 마지막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을 학생들 스스로 그 주체가 되어 재현하는 놀이이자 굿이었다.

오월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1985.5.14.

오월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1985.5.14.
1985년 오월제 팸플릿 표지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3·1 독립 정신과 4·19혁명의 민족·민주주의 정신을 계승한 민중·민주주의 혁명”으로서 계승되어야 할 정신적 자산이며 “‘5월의 피’는 곧바로 5월제의 내용”이고 “5월의 모든 사실들이 사실 그대로 밝혀”지고 “알려야”하는 장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오월제가 개최되는 각 날짜마다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13일), “무등벌판에 다시 살아”(14일), “가자! 함께 하나가 되어”(15일), “지울 수 없는 핏빛 함성으로”(16일), “산자여 따르라!”(17일)라는 소제목을 붙여 오월제 전체가 광주 민주화운동의 추모와 계승을 목적으로 함을 명확하게 했다.

1984년 이후 다시 발간되기 시작한 자치언론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중요한 장이었다. 총장이 발행인인 『대학신문』과는 별개로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결성한 언론협의회가 1984년에 만든 신문이 『자유언론』이었는데, 이 신문은 4월 말부터 5월 말까지 기성 언론은 물론 『대학신문』에서도 보도하지 않는,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 칼럼, 만화, 시, 시위 소식을 알리는 기사 등을 꾸준히 내보냈다. 또한 언론협의회는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여론조사도 실시하였는데, 현재 그 결과는 남아 있지 않지만, 설문지가 남아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이러한 여론조사 자체도 광주항쟁을 환기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24. 광주사태의 진상 중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무엇입니까?
① 시민들의 시위 진압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는 사실
② 군대 투입에 미국의 암묵적 인정이 있었다는 점
③ 시민과 학생들이 무장을 하였다는 점
④ 광주와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로 전혀 당시 상황을 알 수 없었다는 점
⑤ 정부의 철저한 사실은폐 및 용공 매도
⑥ 당시의 엄청난 피해 상황
⑦ 별로 충격을 받지 못했다
1985년 4월 29일자 『자유언론』에 실린 네 컷 만화
1985년 4월 29일자 『자유언론』에 실린 네 컷 만화

이외에도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탈춤, 노래, 판화, 그림, 시 등을 만들어 광주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넋을 위로하고 인간해방을 지향한 그들의 정신을 잇고자 하였다. 이처럼 광주 민주화운동은 80년대 서울대 학생들의 기억 속에 부활하여 부끄러움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인간답게 삶을 꾸려가도록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며, 또 부당한 사회에 저항하는 분노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기억하기를 통해 생겨난 의지와 정서와 심성이 없었더라면 1987년 6월 항쟁도 없었을 것이며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도 그만큼 늦어졌을 것이다.

1985년 오월제 팸플릿에 수록된 문승현 작사·작곡 <오월의 노래>
1985년 오월제 팸플릿에 수록된 문승현 작사·작곡 <오월의 노래>

참고문헌
김철원, 『그들의 광주』, 한울, 2017.
나간채, 『한국의 오월운동』, 한울, 2012.
오제연, 「1970~8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개와 양상」, 서울대학교 기록관 편, 『도약의 나래를 펴라』, 서울대학교 기록관, 2017.
윤대석, 「80년대 대학생의 5·18 광주 기억하기」, 광주전남작가회의 편, 『오월함성 40주기 2020 오월 문학제』, 2020.6.20.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오월의 봄, 2012.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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