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긴급 대국민 담화를 통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곧이어 계엄사령부가 포고령 제1호를 발령했다. 포고령 제1호에는 정당의 활동, 결사, 집회, 시위 등 정치 활동을 전면 금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 계엄법에 따라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고 처단할 수 있다는 강경한 조치가 담겨있었다. 포고령과 함께 서울 도심에는 무장군인, 군용 헬기, 탱크가 등장해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인 국회를 봉쇄하여 의원들의 국회 진입을 막아섰다. 계엄령 선포 직후 국회로 한달음에 달려와 온몸으로 계엄군을 방어한 시민들 덕에 국회의원들은 바로 본 회의를 열어 190명 재석하에 만장일치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12월 4일 새벽 4시 30분경, 대통령실은 비상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비상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전국 각지에는 정부의 독단적인 사태에 대한 분노와 긴장감이 남았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고 대학가와 여러 단체에서는 연이어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은 독재 체제 속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치열한 저항을 벌였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대한민국 헌정 역사상 독재정권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중 박정희 정권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최장기간 동안 독재 권력을 행사한 정권이었다. 이러한 장기 집권은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헌법 개정과 정치적 억압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은 제한되었고 감시당했으며, 언론 통제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다. 이에 맞서 학생들과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며 민주화의 불씨를 지폈다.
[장기 집권의 서막과 10월 유신]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선거에서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당선되었다. 재선 이후 헌법의 대통령 중임 제한 규정에 따라 계속해서 집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중임 제한을 2회에서 3회로 완화시키는 3선 개헌을 시도했다.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세력이 연합하여 개헌 반대 투쟁을 벌였고,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등 전국 20여 개의 학원가에서 개헌 반대 시위가 여러 차례 열렸다. 격렬한 개헌 반대 투쟁이 연일 지속되는 가운데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30분경 야당 의원들이 밤샘 농성 중이었던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3별관에서 여당계 의원 122명만 참석한 가운데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3선 개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김대중 후보와의 경쟁 끝에 3선에 성공했으나 선거운동 과정을 생각했을 때 힘겨운 승리였다. 같은 해 5월 25일 실시된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112석, 야당인 신민당이 89석을 차지함에 따라 공화당은 개헌이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또다시 헌법 개정을 통해 권력 연장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집권 유지를 위한 새로운 방식으로 ‘10월 유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장기 집권의 걸림돌이 되는 학생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1971년 10월 15일,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원 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 명령’을 발표했다. 그에 따라 서울대를 비롯한 7개 대학교에 군 병력을 주둔시켰고 8개 대학교에 휴업령이 내려졌다. 또한 전국 23개 대학교의 약 177명 학생이 제적되거나 강제 입영 당했고, 미등록 간행물은 발행이 중단됐으며 많은 서클과 학회가 강제로 해산됐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약 59명의 학생이 제적되었고 『의단』, 『전야』, 『자유의 종』, 『터』, 『화산』, 『새벽』, 『횃불』, 『향토 개척』 등 영향력 있는 간행물들이 폐간당했다. ‘문우회’, ‘후진사회연구회’, ‘사회법학회’, ‘낙산사회과학연구회’, ‘사회과학연구회’를 비롯한 여러 비중 있는 학회들이 해체되었으며, 해산을 모면하고 살아남은 서클 및 학회들은 활동에서 큰 제약을 받았다. 서클과 학회가 불법화되고 움직임이 제한되면서 학생 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의 활동이 어려워졌다. 사실상 학생 운동의 공개적인 활동이 제약을 받음에 따라 민주화 운동이 크게 위축됐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대의원회,
1971.9.22.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론협의회,
1971.9.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자유의 종 동인회,
1971.6.28. (1~3. 임선웅 기증)
대학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 서울대학교 학원자유수호 투쟁준비위원회, 1971.11. (임선웅 기증)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선 이후 일시적으로 학생 운동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10월부터 급반전된 태도를 취했다. 15일에는 위수령을 내려 군대를 동원해 학생 운동을 탄압했으며, 학생들을 제적시키고 강제로 군에 입대시켰다. 이와 같은 정부의 행동에 학생들은 반발했다.
“대학이 국가와 민족에 대하여 가지는 사명은 지대한 것이며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 대학의 자주성을 대학이 부과된 임무를 창조적으로 수행해나가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요건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오로지 신념으로서 학생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우리 학우들에게 불순·난동분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운 정부당국에 대하여 통분을 금치 못한다. 학생들이야말로 순수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가장 민감하게 알레르기를 반응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10·15사태라는 역사적 오점을 남긴 저들은 학우들의 순수한 사회비판을 불순 내지 용공으로 몰아붙이며 학원에서 추방하여 강제 입영시키었다. (중략) 학우여! 우리에게는 승리도 패배도 있을 수 없다. 단지 모순된 상황에 대한 부단한 투쟁이 있을 따름이다. 학우여! 용기는 젊은이 만이 향유하는 특권이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 _학원자율수호투쟁준비위원회
1971년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위수령 이후 학생 운동과 관련하여 수배 중이던 서울대생 5명 이신범(서울대 『자유의 종』 발행인), 조영래(사법연수원생), 장기표(법과대학생), 심재권(민주수호학생투쟁위원회위원장), 김근태(법과대학생)가 국가 전복 모의, 국가보안법 제1조(반국가단체 구성) 위반, 내란 예비 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고 발표했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이 발생하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는 즉각적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하고 사건의 조작을 폭로했다. 구속된 학생들은 재판 과정에서 모든 혐의를 부정하고 결백함을 강하게 호소했지만 재판부는 내란 음모, 폭발물 사용 음모 등을 적용해 이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학생에게 내란 음모를 적용하고 실형을 선고한 최초의 사건으로 권력 유지를 위해 학생 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조작한 것이었다. 12월 6일에는 가상의 국가 변란 사태를 근거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12월 27일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상황은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공소된 5명 가운데 수배 중인 김근태를 제외한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 심재권 네 사람은 법정에서 공소사실 전부를 완전히 부인했으며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1972년 5월 10일 재판부는 반국가단체 구성 위반만 무죄 판결하고, 형법상 내란 예비 음모, 폭발물 사용 예비 음모 등을 적용해 이신범, 장기표에게 징역 4년, 심재권, 조영래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9월 11일 항소심에서는 장기표, 심재권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이신범에게 징역 2년 조영래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유신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국회를 해산시켰고 정치인들의 정당 활동을 금지시켰다. 10월 26일에는 해산된 국회 대신 만들어진 비상국무회의에 미리 준비해 둔 개헌안의 심의를 요청했다.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6일 단 하루 만에 심의를 끝마쳤고 다음날인 27일에 공고했다. 발표된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간접선거제, 국회 의석 3분의 1을 사실상 대통령이 지명,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 및 사실상 무제한적인 긴급조치권 부여, 국회의 국정감사권 폐지 등 국가의 모든 권력을 대통령 1인에게 집중시킨다는 내용으로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개헌안 공포 이후 정부는 국민들의 찬반투표를 통해 개헌을 단행하기로 했다. 이에 투표가 진행되기 전까지 각종 언론을 통해 유신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했다. 뉴스에서는 “우리 모두 내게 주어진 한 표의 주권을 빠짐없이 행사해서 유신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이바지해야겠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유신 과업 완수하자! 단결하여 이룬 유신 협동으로 번영 찾자! 유신의 영도 아래 복지국가 건설하자!”는 유신 관련 문구를 방송했다. 적극적인 홍보 속에서 11월 21일 국민투표가 진행되었고 91.5%의 찬성표를 얻어 유신헌법이 단행되었다. 유신헌법에 따라 11월 2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법과 그 시행령이 공포되었으며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제1차 회의에서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졌다.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가운데 2,357명(무효 2표)의 찬성표를 얻은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재당선되었고 12월 27일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타오르는 반유신 민주화 학생 운동과 긴급조치]
▶긴급조치 제1호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를 통해 장기 집권과 독재 체제를 확고히 구축했으며, 언론·집회·결사·사상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고 학생 운동을 강력히 탄압했다. 학생 운동에 대한 무자비한 압제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저항은 막을 수 없었다. 1973년 하반기부터 학생들은 비공개 학회를 중심으로 대규모 유신 반대 시위를 진행했다. 그 시작은 1973년 10월 2일에 진행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의 시위였다. 이날 문리대생 250여 명은 4·19 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 학생총회를 열고 ‘자유 민주 체제를 확립하라’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시위를 시작했다. 모여든 학생은 삽시간에 500여 명으로 늘어나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교내를 돌며 구호를 외치다가 교외 진출을 시도하였으나 경찰들이 교문을 막아서자 연좌시위를 벌였다. 10월 4일에는 법과대학생 200여 명이 교내 정의의 종 앞에 모여 유신 반대를 선언한 후 가두시위를 감행했고, 5일에는 상과대학생 300여 명이 교정에 모여 15일까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연좌시위를 진행했다. 10월 2일, 4일, 5일에 일어난 서울대학교 시위와 관련해 경찰은 학생 215명을 연행하여 23명을 구속, 9명을 불구속 입건, 61명을 25일간 구류 조치했다. 학교 당국도 23명을 제적, 18명을 자퇴, 56명을 무기 정학시켰다. 이날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박정희 정권 타도와 민주 정부 수립을 명확히 주장하며 본격화되었다.
『형성』 제6권 제1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1973.11.30. (임선웅 기증)
『형성』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발간한 간행물이다. 권두언에서 『형성』 편집위원회는 1973년 10월 2일 진행된 시위를 언급하며 참다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자유를 조작하는 모든 집단을 결코 방임하지 않고, 이러한 집단과 선전구호에 가차없이 싸우며 자유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격과 존엄성이 지켜질 수 있는 생활의 바탕과 문화의 집적에서만 충실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나긴 어둠의 연속이다.
10月2日이 맞는 우리 모두의 욕구! 이제 우리는 歷史(역사)의 단순한 증언자로부터 그 소용돌이에 던져진 歷史(역사)의 主體(주체)가 되고 있다. 이 大地(대지)의 아들로 歷史(역사)의 創造者(창조자)가 될 것인가? 방황하며 도피하는 異邦人(이방인)으로 끝날 것인가? (중략)”_1973.11.30. 『형성』 편집위원회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11월에 더욱 확산되었다. 11월 5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했고, 7일 공과대학, 상과대학,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언론 자유 보장’, ‘구속학생 석방’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8일에는 교양과정부와 가정대학 학생들이 ‘처벌 학생 완전 구제’ 및 ‘구속 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이외에도 11월 중순 농과대학, 약학대학, 치과대학이 동맹휴학과 성토대회를 전개했으며 12월에는 법과대학생들이 성토대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이 지속적으로 발발하자 각 단과대학은 11월 27일부터 12월 1일에 걸쳐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서울대학교를 넘어 다른 대학교까지 번져나가 학생 운동의 열기는 이제 학교를 넘어 사회로 확산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반유신 민주화의 열기를 꺼트리기 위해 1974년 1월 8일 개헌 서명운동을 전면 금지하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내놓았다. 긴급조치 제1호는 유신 반대 세력을 철저히 억누르기 위한 것으로 학생들은 긴급조치 제1호에 강하게 저항했다. 군검찰은 학생들에게 긴급조치 제1호를 걸어 구속하고 기소하여 징역형을 선고받도록 했다. 그럼에도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의 불길은 멈추지 않고 한결 더 높아져 갔다.
▶긴급조치 제4호
1973년 11월 말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이철(사회학과 69학번), 유인태(사회학과 68학번), 서중석(사학과 67학번) 등은 법과대학, 상과대학 학생들과 함께 전국적인 학생 운동 조직을 결성하려고 했다. 이들은 각 대학교별로 예비 시위를 벌인 뒤 1974년 4월 일제히 시위를 감행할 계획을 세웠다. 최대한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시위를 하기로 했지만, 유인물 아래 이름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이라는 이름을 달기로 하고 일부 유인물에 이를 명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향을 주시하던 박정희 정권은 3월 28일부터 서중석 등 주모자급 학생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주도 학생들은 체포되거나 잠적하였고 학교에는 200여 명의 사복형사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위 당일인 4월 3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 500여 명이 집회를 열고 교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차단당했고, 문리과대학에서는 100여 명의 학생들이 4·19탑 앞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살포했다. 다른 대학교에서도 학생 시위가 벌어졌지만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해산됐다. 전국적으로 학생 시위를 조직해 유신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던 민청학련 중심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좌절됐다.
학생들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잠재울 기회를 엿보던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최대한 이용했다. 이미 상황이 끝난 4월 3일 오후 10시 민청학련과 관련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민청학련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규정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제4호는 민청학련이 인민 혁명을 일으키려했던 반국가적인 지하조직으로 이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대해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학생의 무단결석이나 시험 거부도 불온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되면 긴급조치 제4호에 근거하여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순수한 반유신 민주화 시위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폭력혁명으로 누명을 쓰게 되었다. 정부는 수배된 민청학련 지도부에 대해 일 인당 3백만 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학생들은 민청학련 사건과 긴급조치 제4호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반대 운동을 이어 나갔다.
▶긴급조치 제9호
1975년 관악캠퍼스에서의 첫 학기 시작과 함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3월 14일 자연 계열 학생 300여 명의 집회를 시작으로 반유신 민주화와 학원 민주화를 주장하는 집회가 일어났다. 3월 24일에는 관악캠퍼스 아크로폴리스에 학생 천여 명이 모여 학원 민주화를 위한 자유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서울대학교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의 발족을 선언했다. 4월 3일, 2천여 명의 학생들은 아크로폴리스에 다시 모여 ‘구속 학생 석방’과 ‘석방 학생 복교’ 등을 요구하며 신림 사거리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서울대학교의 각 단과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975년 4월 11일 농과대학에서 학생 300여 명이 유신체제를 규탄하는 시국 성토대회를 열었다. 김상진(축산학과 68학번)은 이 대회의 세 번째 연사로 11시 30분경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과 양심 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선언문을 모두 읽고 난 후 김상진은 품 안에서 20cm 길이의 과도를 꺼내어 할복했다.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다음날 사망했다.
양심선언문,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 김상진, 1975.04.11. (송기호 기증)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 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한 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 끝날 때까지 회개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중략)” _1975.4.11. 서울농대 축산과 4학년 김상진
박정희 정권은 김상진이 사망한 직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시신을 화장하고 모든 추도식과 장례식을 금지했다. 나아가 5월 13일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하여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왜곡·비방과 반대 행위, 학내 집회 및 시위를 전면 금지했다. 크게 분노한 학생들은 긴급조치 제9호에도 불구하고 5월 22일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김상진의 장례식을 강행했다. 학생 4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추도식을 끝낸 후, 5백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기동대에 의해 해산되었고 56명이 구속되었다. 흔히 ‘오둘둘시위’로 일컬어지는 이날은 여러 단과대학이 관악캠퍼스에 집결하여 긴급조치 제9호와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저항한 날이었으며, 서울대가 종합화 하기 이전 각 단과대학별로 흩어져 있었을 때에는 좀처럼 보지 못한 장관이 펼쳐진 날이었다.
吊詞, 1975.5.22. (송기호 기증)
“同志여!
그렇다 동지여! 너의 죽음은 형편없는 슬픔이 아니라 우리에게 화려한 소식이 되었다. 우리 비 기다리던 사람들, 그리워하며 굶주렸던 우리들에게 죽음과 맞바꾼, 生涯로써 말하는 그 피투성이의 말, 부릅뜬 사랑은 이웃들의 깨알같은 꿈을 쓰다듬는 넉넉한 웃음이 되었다. 슬퍼하기에는 형제로서 동지로서 눈물을 흘리고만 앉았기에는, 그대는 삶과 싸움의 너무도 크낙한 용기를 일깨워주고 떠났기에 우리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구나. (중략)
學友여!
(중략) 김상진 동지가 외쳤듯이‥‥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임을, 두고 두고 내려오는 역사의 가르침을 우리는 손에 손을 움켜쥐고 온몸으로 터득해야 하는 것, 물은 결코 강물에 꺽이지 않으며,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언젠가는 모두 함께 일어나 덩실 춤을 추면서 맞이하리니. 아! 김상진 동지여, 믿으라! 다시금 터져나올 그 눈물겨운 함성을, 그 위대한 민중의 승리를 믿으라!”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오둘둘시위 이후 잠시 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곧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더 뜨거워진 횃불을 들고 더욱 조직적으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지속했다. 특히 1978년 6월 26일 광화문 시위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몇 개 대학의 서클들이 연합하여 범대학적 연합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학생들의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으며, 1979년 10월 부마 항쟁1)은 그 정점을 이루는 사건이었다.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박정희는 4번의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1인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헌법 개정을 통해 유신체제를 수립한 박정희 정권은 1963년부터 1979년까지 최장기간 동안 권력을 독재했으며 영구 집권을 꾀하고자 하였다. 특히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이어진 유신체제 기간에는 경찰, 중앙정보부, 군대뿐 아니라 긴급조치라는 무자비하고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해 비민주적 통치권을 행사했다. 정권에 의해 훼손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수많은 투쟁과 반유신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그 선두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억압 속에서도 조직적인 연대와 끈질긴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앞장섰다. 이들의 저항은 대학을 넘어 지역 사회와 국민적 연대로 확산되었고 언론, 종교계, 지식인 집단 등 다른 사회 세력의 민주화 운동을 촉진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유신체제의 종말을 촉발시켰을 뿐 아니라 198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으며, 서울의 봄과 5‧18민주항쟁, 1987년 6‧10민주항쟁의 기반이 되었다.
참고문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2 -유신체제기-』, 돌베개, 2009.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이재오, 『한국학생운동사 : 1945~1979년』, 파라북스, 2011.
“前 서울大生 4명에 實刑 선고”, 「대학신문」, 1972.5.15.
“국무회의 새벽 4시 30분 ‘비상계엄해제안’의결”, 「한겨레」, 2024.12.4.
“[타임라인]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진행 상황”, 「한겨레」, 2024.12.4.
대한뉴스 제904호
- 1)『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발생한 부마항쟁은 독재 체제와 사회경제 모순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유신 민주화 운동이다. 16일 부산대학교에서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되어 17일에는 부산 시민들이 합세했다. 18일에는 마산으로 시위가 확산되어 격렬한 충돌이 발생하자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이 사건은 10‧26 사건을 촉발시켰으며 유신체제의 종말을 가져오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