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자치언론은 학내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여 학생들이 스스로 신문이나 잡지 등을 발간하는 독립적인 자치 단위로 학생회나 특정 단과대학에 귀속되지 않은 언론을 말한다. 특히 1980~90년대 대학 자치언론은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기록하고 담론을 형성하며 학생운동의 중요한 매개체로도 기능했다.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는 교지 『관악』이, 서울대학교 연건캠퍼스에는 교지 『연건』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1992년 창간된 『연건』은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교지를 통해 학내의 진보적 담론을 이끌고, 학우들 간의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또한 의료계의 이슈를 다루며 학생들이 앞으로 가져야 할 정체성과 책임감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이들은 ‘연건인의 가슴을 달린다’는 모토로 해부학 용어 ‘AORTA(대동맥)’을 동아리 이름으로 삼고 교지 편집위원회를 발족했다.
창간 당시 『연건』은 공식 교지가 아니라 무크지1)였다. 때문에 주변에서는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어떤 교지가 만들어질까?’하는 기대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도 교지 편집위원회는 흔들림 없이 연건인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학교 안팎의 문제를 다루는 담론의 장을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창간호를 준비했다. 기획, 자료 조사, 원고 작성, 취재, 설문 조사 등 모든 과정을 철저히 준비했다. 공식 교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기사 작성 중에도 후원금과 광고비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교지 편집위원회가 많은 시간에 걸친 노력과 애정을 쏟아부은 덕에 200여 페이지의 이야기가 담긴 『연건』이 처음 세상에 나왔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생명과 인간을 다루기 위해 연건 함춘 동산에서 청춘을 사르고 있는 연건 학우들. 그들과 함께 연건의 삶의 문화를 이루기 위해 이제 『연건』 창간호가 나왔습니다. (…중략…) 이 어설픈 한 권의 책을 만들어 보이는 저희들의 마음은 해산을 앞둔 산모의 마음마냥 두렵기만 합니다. 그렇지만 저희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뿌듯한 자부심은 있으니, 그것은 미미한 채로나마 연건의 문화공간을 넓히고, 학우들의 다양한 생각과 마음을 담아내는 틀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불 밝혀진 연건의 창들을 보며 그 뜻을 헤아리는 학우들과 연건의 미래를 생각하는 학우들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연건』의 첫 장을 엽니다._창간호를 내면서(『연건』 창간호)”
『연건』 창간호, 1992.
『연건』 창간호에는 ▲책머리에 ▲축하의 말 ▲창간 특집 ‘연건, 연건인’ ▲화보 ‘연건을 움직이는 사람들’ ▲기초교실 탐방 ▲보건의료 ‘하월곡동 진료 활동을 마치고’ ▲선배를 찾아서 ‘작은 것에 대한 큰사랑, 의사 시인 서홍관 씨를 찾아’ ▲시대와 길 ‘죽어 넋되는 들꽃 故 고미애 약사’ ▲정치 ‘14대 총선에 대한 각 정치단체의 평가’ ▲시평 ▲여성 ▲문화 ▲시 ▲생활과학 ‘컴퓨터 바이러스 퇴치법’ ▲기타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겼다. 특히 창간 특집 기사 ‘연건인의 현주소를 찾아서’는 의대생 122명을 대상으로 생활, 정치, 문화, 의료 분야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설문을 진행했으며, 그 결과를 분석하고 자세하게 기사화하여 학우들 간의 생각과 관점을 나눌 수 있도록 했다. 『연건』을 통해 소통의 장을 만들겠다는 교지 편집위원회의 포부가 반영된 특집 기사라고 볼 수 있다.
[멈추지 않는 대동맥, 교지 『연건』 편집위원회]
『연건』을 발간하는 교지 편집위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입회원에 지원하고 ‘청출어람’이라고 불리는 약 4주간의 프로그램과 수료 시험인 ‘람말고사’를 치렀다. 청출어람 프로그램에서는 교지 편집위원회의 역사를 배우고 동아리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교지 편집위원회의 역할과 활동을 배울 수 있었다. 여러 신문의 기사를 읽고 함께 품평회를 해보기도 하고, 기사 작성을 위해 맞춤법 교육 등 교지 출간에 도움이 되는 활동도 했다. 청출어람 과정이 모두 끝나면 4주간의 활동을 확인하는 람말고사를 진행했다. 람말고사까지 마무리되면 정식으로 교지 편집위원이 되었다.
교지 편집위원회는 학년별, 학교 일정에 맞추어 활동했다. 1~2학년을 중심으로 취재 및 기사 작성이 이루어졌고, 병원 실습을 시작한 3~4학년은 편집위원이 되어 자문의 역할을 담당했다. 때로는 졸업한 선배들이 원고를 작성해 주기도 했다. 학기 중에는 바쁜 일상에서도 편집회의에 참여해 각자가 취재하고 싶은 기사를 기획하고, 기획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기초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현장에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만나고, 이슈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들으며 현장과 학우들의 목소리를 수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사는 편집위원들과의 토론을 통해 다듬어진 후에야 교지에 게재될 수 있었다. 독자들을 위해 흥미로운 기사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주요한 사건들을 파악하여 기사를 작성하기도 했다.
“다른 학생들이 지친 심신을 쉬는 방학에, 그들은 취재를 다니고 마감에 쫓기며 기사를 쓰고 기획서 작업하느라 여념이 없다. 학기 중 4~5개월 작업하는 양보다 방학 중 작업하는 양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자연히 방학은 거의 반납 신세가 된다. 이런 노고의 결과 한 권의 교지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번 일을 함께하면서 알게 된 점은 생각보다 교지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밖에서 볼 때는 ‘계획하고 취재하고 자료를 모아 글로 쓴다’ 정도의 단순한 작업으로 보였던 것이 실상을 알고 보니 계획 단계에서부터 끊임없이 서로 비판하면서 어느 한 과정도 간단히 넘어가는 부분이 없었고 끊임없는 비판과 수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기획안들이 고쳐지거나 사라지기도 하고, 막판에 기사가 없어지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글만 쓰면 되는게 아니라 백일장, 투고글도 받아야하고 백일장 심사에 애독자 카드 등등 미처 생각 못하던 잡무들도 많았다. 이런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교지를 만든다. _「교지편집위원회에 대한 단상」 고대현 객원 기자(의학2) (『연건』 제22호)”
교지 편집위원회는 바쁜 취재 중에도 교지 대금을 위해 학교 안팎으로 움직여야 했다. 『연건』은 창간호부터 11호까지 학교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해 교지 발간에 필요한 재정을 모두 후원금과 광고비에 의존해야 했다. 12호부터는 학생회비 9,000원 중 900원이 교지 대금으로 책정되었지만, 교지 발간에 필요한 금액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족한 예산은 기업체 광고를 통해 충당해야 했다.
“후원금과 광고비로도 교지 대금이 부족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AORTA의 선배 한 분이 과외하면서 번 돈을 모두 교지 대금으로 내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또 학업과 취재를 병행하는 와중에 교지 대금까지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이런 상황에서 대행사의 제안이 들어왔었는데, 그때 당시 대행사에 대해 잘 몰랐었기 때문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대행사를 통한 광고비 모집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 민원이 들어와서 발칵 뒤집혔던 적이 있습니다. 덕분에 작지만 학교로부터 교지 대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황승식 편집위원)”
교지 『연건』 편집위원회, 1997. (황승식 편집위원 제공)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행정관 앞 잔디밭에서 촬영한 교지 『연건』 편집위원회 단체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박도중(의예 92), 정상훈(의예 91), 이정운(의예 92), 김열(의예 92), 김홍관(의예 92), 한정호(의예 92), 뒷줄 왼쪽부터 황승식(의예 93), 이재상(의예 95), 박희연(간호 96), 엄미화(간호 96), 김선영(의예 95), 허남주(의예 95)
“연건의 살아숨쉬는 튼튼한 대동맥을 찾습니다_신입회원 모집(『연건』 제6호)”
[학우들과 보건의료 현장을 잇는 소통의 다리 『연건』]
교지 편집위원회가 『연건』을 발간할 때 특히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 부분은 보건의료 분야였다. 매호 보건의료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보여주었다. 보건의료 주제를 다룰 때는 독자들에게 논의의 출발점을 제공하고자 많은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관계자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오랜 회의를 거쳐 심층적인 기사를 작성했다. 의약분업, 정권별 의료정책, 산업보건, 의료보험 등과 같은 제도를 다룬 기사에서는 제도 변화의 원인, 내용, 전문가들의 견해를 제시했다. 체계적이고 세밀한 기사를 통해 학생들은 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 보건의료 현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등을 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동맹 휴업, 간호 운동, 보라매병원 사건과 같은 보건의료계 문제에 대해서 보다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3호에 실린 ‘간호 운동’과 12호에 실린 ‘보라매병원 사건(1997.12.4.)2)’ 기사에서는 『연건』이 보건의료 이슈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간호 운동 기사는 간호대 학생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간호사들이 직면한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간호대학생회와 토의를 통해 ‘참간호’를 주제로 선정했다. 교지 편집위원들은 ‘참간호’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와 고찰을 얻기 위해 여러 활동 주체들을 만나 논의를 거쳐 공동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기사에는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간호노동자와 전문직으로서의 간호사라는 두 시선에서 본 ‘참간호’의 정체성과 전망을 다루었다. ‘대한간호협회’와 ‘간호사회 건설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탐방하여 각 조직의 현황과 전망을 취재하였고, 간호대 학우들 6명이 모여 현실 속에서 느끼고 있는 간호의 문제와 개인적인 견해를 나눈 좌담회 내용을 포함하였다. 이처럼 교지 편집위원들은 간호 기사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간호사의 정체성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하여 간호 운동에 대한 담론을 이어가고자 했다.
보라매병원 사건은 세 단계에 걸쳐 보도했다. 1단계에서는 보라매병원 사건의 전말을 일지 형식으로 정리했다. 2단계에서는 보라매병원 사건에 대한 의대학생들의 의견을 조사하고 이를 법대학생들의 의견과 비교했다. 3단계에서는 의사학 교실의 구영모 선생님으로부터 보라매병원 사건이 가지는 의미와 무엇을 배울지에 대한 의견을 받아 정리했다. 의학도서관과 법학도서관을 직접 찾아가서 각각 100명의 학생에게 설문을 실시하여 예비 의료인과 예비 법조인으로서 학생들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심도 있게 비교·분석하였다. 인식의 차이를 정확하게 조사하기 위해 보건대학원 박사과정생과 사법연수원생 및 법학과 재학생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토론하여 설문지를 작성했다. 이러한 조직적인 접근 방식은 『연건』이 독자들에게 보건의료 분야의 쟁점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하고 사회적 맥락에서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음을 보여준다.
“「특집」 ‘보라매 병원 사건’” 『연건』 제12호, 1998.
“이번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의료 임상현실에는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일들의 해결을 ‘관행’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남은 일은 이 글을 쓰고 읽는 우리 모두의 몫일 것입니다.”
『연건』 제12호에는 ‘보라매 병원 사건’을 다룬 특집 기사 외에도 ‘복잡계의학 연구회’를 소개하는 의학 기사, IMF와 노동자에 대한 기획 기사 등 주요한 이슈를 다루는 기사들이 실렸다. 또한 교육 분야의 ‘PBL’, 소개 분야의 ‘지역사회 진료소 활동’ 등 제11호에 이은 후속 기사들도 게재되었다.
보건의료 분야의 현안을 다룬 분석적 기사와 더불어, 여러 코너를 통해 보건의료 현장의 경험을 사실적으로 전달했다. 다양한 코너 중 독자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진글 「킹덤일기」와 「보라매 복지 병동, 짧은 이야기들」이었다. 「킹덤일기」는 의과대학생과 간호대학생들의 임상 실습기로, 병원을 하나의 왕국(킹덤)으로 설정하여 그곳에서 일어났던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사진과 함께 생생하게 보도했다. 특히 「킹덤일기」는 한 명의 교지 편집위원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실습에 참여했던 여러 학생들이 작성한 수기 형식의 구성이었다. 글의 형태도 어투도 제각각이지만, 각자의 글에서 현장의 생동감, 긴장감,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큰 공감과 호응을 얻었다. 또 다른 코너인 「보라매 복지 병동, 짧은 이야기들」은 보라매병원 33병동, 이른바 행려 병동에서 실습 후 마주한 병동의 모습을 사진과 함께 기록한 글이다. 자신의 경험담을 담았던 「킹덤일기」와 달리 행려 병동 환자들 이야기를 풀어내어 또 다른 현장감을 전했다.
『연건』은 학내외의 다양한 의료 관련 기사들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학우들이 의료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의료 현장에 대한 폭넓은 시각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다른 교지에서 볼 수 없는 『연건』만의 고유한 색깔이다.
『연건』은 고유의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정치, 사회, 생활, 문화·예술 등의 다양한 읽을거리를 선보였다. 정치사회 부분에서는 ‘변화하는 학생운동(2호)’, ‘TV 속의 숨은 그림-‘방송 민주화’의 필요성(6호)’, ‘연건 운동의 방향성(7호)’, ‘YS정권의 노동정책(9호)’, ‘서울대학교 구조조정(13호)’, ‘이라크 전쟁과 우리들의 자세(22호)’ 등 정치·사회 문제를 비롯한 학교 내 주요 사건들을 특집·기획·쟁점 기사로 선정하여 취재했다. 때때로 이슈들에 대한 학우들 간의 대담, 토론, 인터뷰 등을 기사화하여 학우들의 생각을 『연건』을 통해 공유할 수 있도록 했다. 생활 및 문화·예술과 관련해서는 ‘왜소해진 우리의 인간찾기-연극(3호)’, ‘세상을 바꾼 사진들-퓰리처상 사진대전을 보고(13호)’, ‘섬진강 기행(24호)’처럼 직접 관람하거나 다녀온 여행에 대한 감상문을 공유했다. 감상문 외에도 ‘운동권의 록 음악 끌어안기, 그 동상이몽(9호)’, ‘드러나는 몸, 늘어나는 담론(10호)’ ‘한국, 표현의 자유 지수는?(11호)’, ‘영화로 듣는 망자의 노래(16호)’처럼 하나의 소재를 다른 분야와 결합하여 발상의 전환을 주거나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상기시켜 학우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논의 거리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연건』을 더욱 유익하게 읽을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변화를 모색했다. 구성적 측면에서는 7호부터 ‘컴퓨터’ 코너를 신설해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등 다양한 컴퓨터 관련 정보를 전달했다. 학우들이 요청해 왔던 학생 연구 논문을 소개하는 ‘학생 리포트’ 코너는 10호부터 신설했다. 11호부터 독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기 위해 ‘애독서 편지’를 만들고, 수거함을 통해 의견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7호 이후 사라졌던 연건캠퍼스 내 다양한 동아리들을 소개하는 ‘동아리 탐방기’ 코너는 16호부터 부활시켰다. 18호부터는 ‘연건 백일장’ 코너를 마련해,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와 일탈’, ‘소중한 것’, ‘삶과 죽음’, ‘첫사랑’ 등 여러 주제를 정하여 글을 모으고 심사를 거쳐 교지에 당선작을 게재했다. 그 밖에도 학생들이 『연건』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도록 낱말 퀴즈, 만화, 화보 등 다채로운 코너를 준비했다. 13호부터는 『연건』 발간에 사용되는 자금에 대한 결산 명세를 공개하며 투명성을 높였다. 25호부터는 내부의 기사 배치와 구성의 형식도 변화시켰다. 이전의 〈기획〉, 〈특집〉, 〈교육〉, 〈쟁점〉, 〈연건이야기〉 등 큰 주제별 카테고리를 과감히 없애고, 하나의 기사를 한 꼭지로 구성했다.
표지 디자인의 경우, 학교의 전경이나 학생들이 캠퍼스를 거니는 사진, ‘샤’를 그래픽으로 형상화한 이미지 등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표지에 여러 변화를 주었다. 제호의 경우 1호부터 12호까지는 충무로 편집실에서 제안해 주는 여러 글씨체를 사용했기 때문에 매호 다른 제호가 인쇄됐으나 13호부터 27호까지는 모던하면서도 세련된 로고 형태의 ‘연건’을 제작하여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는 독자들이 시각적으로도 더욱 흥미롭게 『연건』을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다. 또한, 14호부터는 교지 편집위원회가 직접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인터넷에서도 『연건』을 만날 수 있었다. 새로 발간된 『연건』 뿐만 아니라 과거에 발간된 모든 호수도 공개했다. 또한 AORTA의 잡기장을 올리기도 하고, 게시판을 만들어서 다양한 의견을 남길 수 있는 토론의 장도 마련했다. 홈페이지는 당시 연건 학생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았다.
학우들의 관심과 응원 속에서 점점 단단해졌던 『연건』은 재정적 문제로 인해 28호(2006년)를 마지막으로 출간이 중단되었다. 교지 인쇄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교지 편집위원회는 포기하지 않고 웹진 형태로 교지를 이어 나갔다.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게 된 『연건』은 학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92년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건』은 세상과 연건, 연건 학우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장이 되었다. 『연건』을 통해 캠퍼스 담장 안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면서도 담장 밖의 세상과 보다 자유롭게 어우러졌다. 대학 내 진보적 담론을 이끌어왔던 교지 『연건』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지만, 당시의 사회와 삶, 연건캠퍼스의 이야기는 기록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다.
“교지 「연건」은 관계 맺기를 위한 하나의 틀로 자리잡고 싶습니다. 연건 내에 소통의 여러 공간들이 활기 있게 만들어지지 않으면 교지 「연건」이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연건」지는 소통의 과정일 수도 있고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이라면 차라리 결과라기보다는 과정이어야 하겠습니다. 서로간의 토론과 공유가 없는 주장이나 외침은 독선과 독단이 될 수 있다는 충고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부터의 일방적인 외침이나 주장이어서는 진정한 소통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학우들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냉철한 비판력, 그리고 이를 담아낼 수 있는 편집위의 적극적인 노력이 상승 작용한다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교지는 편집위만의 것이 아닙니다. 교지는 연건의 얼굴이며 그 책임은 의대/간호대 학우 여러분의 몫입니다._발간사(『연건』 제10호)”
참고문헌
교지 『연건』 편집위원회, 『연건』 창간호~제28호, 1992~200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황승식 편집위원(2024.9.20.) 인터뷰.
- 1)『매체』 단행본과 잡지의 특성을 동시에 갖춘 출판물. 편집이나 제책(製冊)의 형태는 잡지와 비슷하나 부정기적이란 점은 단행본과 비슷하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2)의사가 보호자의 요구에 따라 환자를 퇴원시켰다가 환자가 사망한 사건으로 당시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