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캠퍼스는 1946년 설치 당시 각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몇몇 단과대학은 수 차례 교사 이전을 반복하기도 하였으나, 1975년 관악 캠퍼스로 단과대학이 모이기 전에는 동숭동 캠퍼스, 연건동 캠퍼스, 종암동 캠퍼스, 공릉동 캠퍼스, 용두동 캠퍼스, 을지로 캠퍼스, 수원 캠퍼스 등에서 생활하였다.
[복잡한 공식과 그윽함이 공존하는 공릉동 캠퍼스]
경성대학 이공학부의 자리였던 서울 공릉동 172번지(1963년 행정구역 개편 전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신공덕리)에는 서울대학교 공릉동 캠퍼스가 자리 잡았다. 공릉동 캠퍼스에는 개교부터 자리 잡고 있던 공과대학과 1968년 새롭게 만들어진 교양과정부, 그리고 1973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의 일환으로 연건동에서 이사 온 미술대학이 있었다.
공릉동 캠퍼스의 정문을 지나면 조금 떨어진 곳에 500여 미터나 되는 긴 오솔길이 눈에 띄었다. 오솔길 양옆을 따라 우람한 플라타너스가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하게 서 있었다. 플라타너스 덕분에 오솔길은 학생들에게 시골의 신작로 같은 오붓함과 시원함을 선사해 주었다. 여름에는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푸른 잎이 무성했고, 가을이면 떨어진 낙엽이 길을 장식했다. 이렇게 운치가 가득한 오솔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편에는 1호관과 솔밭이, 왼편에는 운동장, 음악감상실 그리고 기숙사가 위치했다. 그 길의 끝에는 공대 늪, 도서관, 전자계산소가 있었다.
오솔길을 벗어나 4호관 건물 쪽으로 걷다 보면 5백여 평 넓이의 아담한 늪이 위치했다. ‘공대 늪’이라고 불렸던 이 늪은 당시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유일한 늪이었다. 늪 주위에는 갈대와 이름 모를 잡초가 무성히 나있어 잔잔한 수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 모습이 가히 초호(樵湖)로 불릴 만했다. 늪의 가장자리를 따라 색이 바랜 벤치들이 놓여있었다. 학생들은 이따금 이 벤치에 머물며 낭만과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종합화의 계획에 따라 연건동 캠퍼스에 있던 미술대학이 1973년 공릉동 캠퍼스 교양과정부 교사로 이전했다. 미술대학이 사용하던 교양과정부 건물에는 넓고 긴 계단이 있었다. 계단의 양 옆에는 하얀 조각상들이 놓여있는 잔디밭과 화단이 있었다. 마치 덕수궁 미술관이 생각나는 이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교양과정부 건물 3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릉동 캠퍼스 속 공과대학, 미술대학, 교양과정부가 1980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오붓했던 공릉동 캠퍼스는 사라지고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역사적 운치가 흐르는 용두동 캠퍼스]
본래 사범대학은 경성사범학교와 경성여자사범학교를 통합하여 만들어졌다. 발족 당시 사범대학은 서울 중구 을지로 5가 40번지에 위치한 경성사범학교 캠퍼스를 사용했으나, 한국전쟁 이후 미군 공병단이 을지로 캠퍼스를 징발함에 따라 용두동 138-61번지의 옛 경성여자사범학교 캠퍼스로 이전했다. 이때 공과대학도 미군이 공릉동 캠퍼스에 주둔하게 되면서 공릉동 캠퍼스로 돌아가지 못하고 용두동 캠퍼스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내 임시교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공과대학은 다시 공릉동 캠퍼스로 이전하여 용두동 캠퍼스에는 사범대학만이 위치했다. 1968년 12월에는 사범대학 가정교육과가 가정대학으로 신설되면서 사범대학과 가정대학이 함께 용두동 캠퍼스에 위치하게 되었다.
용두동 캠퍼스의 정문에 들어서서 한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4·19 기념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동상에는 ‘젊은 학도, 봉화를 들었으니 사랑하는 겨레여, 4·19의 외침을 길이 새기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동상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하여 정의의 횃불을 밝히고 승화한 사범대 학생 손중근(국어교육 57), 유재식(체육교육 57)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사범대학 합동연구실 뒤편에는 학생들이 휴식처로 애용하던 동산이 하나 있었다. 동산 한가운데에는 ‘청량대(淸凉臺)’라는 비석이 서 있었다. 이 비석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흔히 청량대라고 불렀다. 이후 ‘청량’은 사범대학의 대명사 구실을 하게 되어 사범대학의 축제와 교지 등에도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
청량대에는 역사적 운치를 더해주는 선농단(先農檀) 유적이 있었다. 선농단은 왕이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면서 선농제를 지내던 곳이며, 동시에 왕이 직접 밭을 갈고 농사를 지음으로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소중히 하도록 권하는 곳이기도 했다. 사대인들의 청량함이 서린 용두동 캠퍼스는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청량대와 선농단이 그 자리를 지키며 이곳이 용두동 캠퍼스였음을 기억하게 한다.
[음악으로 물든 을지로 캠퍼스]
서울 중구 을지로 6가에는 사립서울약학대학이 위치했다. 1950년 9월 30일 사립서울약학대학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편입되면서 이곳은 서울대학교 을지로 캠퍼스가 되었다. 이후 1959년 약학대학과 음악대학이 교사를 바꾸어, 약학대학은 연건동 캠퍼스로 음악대학은 을지로 캠퍼스로 이사하였다. 을지로에 새롭게 자리하게 된 음악대학은 관악으로 이전할 때까지 을지로 캠퍼스를 지켰다.
“音大(음대) 가든 레슨(Garden lessons)
‥‥ 정겨운 對話(대화)가 오가는 연못가엔 生動(생동)하는 젊음이 가을 속에 무르익는다. 여기, 낙엽이 딩굴고(뒹굴고) 보랏빛 菊花(국화)의 내음이 진하게 번져나가는 가을 하늘엔 네 줄기 하얀 噴水(분수)의 물길이 드높다.” (“音大 가든 레슨”, 대학신문, 1972.10.16.)‥‥
“음대생의 야외 강의실 ‥‥
噴水臺(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잔디밭은 音大(음대) 내의 유일한 空地(공지). 그래서 音大(음대) 야외행사는 거의 이곳에서 열리곤 한다. 말하자면 이곳은 야외 강의실 같은 곳. 때문에 음대생들의 情(정)이 한층 더 가는 곳이다. …(중략)… 한여름 밤 噴水(분수)가 물 줄기를 내뿜을 때는 그야말로 音樂徒(음악도)의 꿈을 키워주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 - 音大 噴水臺.”, 대학신문, 1973.6.4.)
[수목과 배움이 가득한 수원캠퍼스]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에는 개교 이전부터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있던 농과대학이 위치했다. 농과대학은 옛 수원농림전문학교 시절의 터를 이어받아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의 창설과 함께 수원 캠퍼스에서 출범하였다. 1947년,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령에 따라 농과대학 수의학부에서 수의과대학이 분리되어 수원 캠퍼스를 떠나 연건동 캠퍼스에 위치하게 되었다. 1948년에는 농과대학이 농림부로 이관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국립서울대학교로 재이관되었다. 이후 1962년에는 연건동 캠퍼스에 있던 수의과대학이 농과대학 수의과로 다시 개편되면서 수원 캠퍼스로 이전했다.
수원 캠퍼스 정문에 들어서면 1호관(본관) 앞에 향나무가 제일 먼저 학생들을 반겼다. 정문 앞 향나무를 바라보며 옆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상록사라 불리던 기숙사가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던 수원 캠퍼스에서, 상록사는 학생들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상록사 옆 식당은 넓은 캠퍼스의 이곳저곳에서 강의를 듣던 학생들이 점심식사 때가 되면 떼를 지어 모이던 곳이었다. 학교 뒷동네에는 당시 딸기밭으로 유명했던 푸른 지대가 있었다. 봄철이면 푸른 지대의 딸기를 사기 위한 인파가 학교 후문까지 가득 찼다. 딸기뿐만 아니라 좋은 나무도 많았던 푸른 지대는 학생들의 관상수나 조원학 실습장이 되기도 했다.
여학생 기숙사인 녹원사와 운동장 사이에는 커다란 나무숲과 캠퍼스에 인접해 있는 연습림이 있었다. 연습림의 곳곳에는 크고 작은 오솔길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이곳에 모여 산책을 즐기기도 했고, 때로는 적막함 속에서 사색하거나 책을 읽었다. 연습림은 농과대학 학생들을 위한 공간뿐만 아니라 배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야학을 위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연습림에 위치한 ‘서둔야학’은 농업생명과학대학과 수의과대학의 학생들이 수원 서부지역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매년 10~20명의 청소년들이 이곳에 모여 서울대학교 학생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배움의 열기를 키워나갔다. 수원 캠퍼스의 농과대학은 1975년 서울대학교 종합화 계획 당시에도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지 않고 수원에 남아 자리를 지켰다. 이후 2003년이 되어서야 수원을 떠나 관악 캠퍼스로 이전하게 되었다.
종합화 이전에 대학 시절을 보냈던 학번들은 자신이 소속된 단과대학에 따라 저마다 다른 캠퍼스 추억을 가지고 있다. 1975년 캠퍼스 종합화에 따라 관악 캠퍼스로 모이기 전까지 단과대학 캠퍼스는 ‘따로 또 같이’ 서울대학교의 역사에 각양각색의 수를 놓았다.
“이제 마로니에 庭園(정원)이나 向上林(향상림), 淸凉臺(청량대)의 이야기를 되너던(되뇌던) 「過渡世代(과도세대)」들도 대학에의 在學(재학)연령이 끝나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찬란했던 그 시절은 口伝(구전)될 뿐이고 그래서 神話化(신화화)되기도 한다. 世代(세대)는 끝나도 伝說(전설)은 남아 선배들의 首邱初心(수구초심)이 대학의 의미, 대학생의 낭만, 대학문화의 생명력에 끼친 힘은 실로 다대(多大)하다.” (“옛 캠퍼스를 찾아서”, 대학신문, 1982.10.18.)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동창회,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동창회 60년사 : 1948~2008』, 2008.
이경준‧오헌석,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서울대학교 농학교육 :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역사와 서울대학교 발전과정 연구』, 2019.
전봉희‧오헌석,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서울대학교 공학교육 : 미네소타 프로젝트의 역사와 서울대학교 발전과정 연구』, 2019.
“時計塔엔 아련한 전설이. ; 工大生은 音樂會를 좋아한다.” 대학신문, 1963.3.14.
“音大 가든 레슨”, 대학신문, 1972.10.16.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 - 工大 숲길”, 대학신문, 1973.5.7.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 - 공대 늪”, 대학신문, 1973.5.14.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 - 師大 淸凉臺.”, 대학신문, 1973.5.21.
“캠퍼스 移轉을 앞두고 大學街 名所 巡禮 - 音大 噴水臺.”, 대학신문, 1973.6.4.
“工大 두고온 캠퍼스.”, 대학신문, 1980.3.17.
“옛 캠퍼스를 찾아서”, 대학신문, 1982.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