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축전에서 얻은 추억거리라고 합니다. 그러한 축전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졸업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행한 일입니다. 젊음의 숨결과 노스승의 파안과 웃음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축전은 한 개인과 학교의 영원한 추억이 되지 않을까요.” (공과대학 3학년 이재성 학생, “서울대 축제 살아났다”, 「조선일보」, 1982.5.26.)
[1980년대_공동체 문화의 응축]
1979년 10·26사태로 유신 체제가 종식되고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당시 ‘민중’이 핵심적인 가치로 부각되면서,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민속’과 결합하여 독특한 ‘운동권 문화’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운동권 문화와 결합한 대학 문화는 학교 안에서의 자유로운 집회, 시위 그리고 축제를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축제와 집회에서는 민속적인 노래와 마당극, 풍물굿 등의 행사를 통해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를 하나로 통일시켜 분위기를 고무시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1980년에는 4·19혁명 20주년을 기념하여 “암흑을 밝히고 일어선 사월의 횃불을 되새기며”라는 주제로 ‘4·19 기념제’를 진행했다. 축제를 대신하여 개최된 4·19 기념제는 기존의 ‘대학축전’과 같은 형식적인 행사가 아닌 보다 알찬 행사로 진행되었다.
1982년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관악 캠퍼스에서 진행된 서울대학교 학예제는 학도호국단과 서클 양측이 학예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추진하였으며, 학교측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개최되었다. 82년도 학예제는 학술제, 민속제, 예술제, 오락 행사로 나누어 진행되었는데, 이전과 달리 쌍쌍파티, 카니발과 같은 소비 향락적인 행사는 사그라지고 전통과 민중이 중심이 되는 행사가 늘어났다. 해당 학예제는 개교 39주년 기념 대학축전 이후 처음으로 전체 단과대학이 참여한 명실상부 ‘대동제’(다 함께 크게 어울려 화합한다)의 성격을 갖춘 뜻깊은 축제였다. 개막제에서는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고사가 진행되어 학생들이 평소 가슴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쏟아냈다. 마지막 날 대운동장에서 열린 민속제에는 3,0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축제의 절정을 이루었다. 고사부터 민속제까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도 나타났지만, 학생들의 절제 있는 행동과 적극적인 참여로 큰 사고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학예제에 참여한 5,000여 명의 재학생들과 교수 및 직원들은 모처럼 일체감을 맛본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며, 이 학예제가 장차 서울대의 전통과 특징을 대변해줄 본격적인 대학축전의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1982년 5월 학예제 관련 소감]
“실로 몇 년만에 성대히 이루어진 이번 학예제가 학생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고, 같이 호흡한다는 의식을 發現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우선 지적될 수 있을 것 같읍니다. …(중략)… 행사를 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잡음이 있었지만, 학교에서도 활성화 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학생들도 대단한 자제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행사가 무사히 마무리 지어질 수 있었읍니다. 분명히 이번 행사는 뜻 있는 행사였고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 했다고 볼 수 있겠어요.”
(“記者放談-學藝祭를 보고나서”, 「대학신문」, 1982.5.31.)
“이번, 학예제는 76년 개교 30주년 기념 축전이후 오랜만에 전대학인의 단합과 참여를 보여준 뜻있는 행사였다. 진정한 대학문화가 몇몇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상황 때문에 왜곡되게 인식될 수 밖에 없었던 대학문화가 참 모습을 되찾는 하나의 계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생 스스로의 자율능력을 내외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다. 또 그 동안 쌓였던 패배감과 무관심, 우울, 답답한 심정을 마음껏 토로할 수 있었으며, 또 공동체의식 형성작업의 시도로 볼 수 있는 행사이기도 했다. …(중략)… 5월의 이 행사가 대학문화의 성격 규정과 형성 방향, 그리고 대학축제의 의미부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본다.”
(“[默言의 喊聲]속에 학예제 막내려”, 「대학신문」, 1982.5.31.)
“대학인의 능동적인 참여 없이는 진정한 학문이나 대학문화의 창조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시대적 대학문화의 창조가 중단되면 그 반작용으로 무사안일주의적이고 오도된 대중문화가 대학사회까지 범람하여 대학 본래의 사명인 역사 창조, 민족의식, 비판적 지성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우리 대학인은 이제 스스로가 무력감에서 벗어나 문화의 담당자로서 주체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로 「함께」 올바른 대학문화 창조에 동참해야 할 때입니다.”
(학생처장 조용섭 교수, ”서울대 축제 살아났다“, 「조선일보」, 1982.5.26.)
이후 서울대학교에서는 학예제, 대학축전 등의 다양한 축제와 행사들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고 의식을 공유하며 비판적인 지성의 열기를 발산하는 대동제가 열렸다. 학내 사태로 인한 공권력의 투입, 총학생회 구류·연금, 예산 절감 등 여러 가지 어려움과 비판들이 있었지만 1985년 “오월제(五月祭)”와 “삼민제(三民祭)”, 1986년 “함성제”, 1987년 “통일함성제”, 1988년 “자주관악제”, 1989년 “새벽출정” 등 매년 새로운 주제와 성격들을 가지고 서울대만의 하나된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는 축제를 개최하였다.
[1990년대_다변화 되어가는]
1990년대 대학생들은 이전 세대와 다른 경험을 한 세대였다. 이들은 대학 진학 이전부터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학생운동의 위축과 같은 사회적 변화를 겪으며, 상대적으로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경험을 쌓아왔다. 이전 세대에 비해 더 자유분방하며 정치 문제에 관심을 적게 가지고 개인주의적인 특성을 지녔다. 또한 이들은 청소년 시기를 3저 호황, 폭넓은 외국 대중문화의 유입과 함께 보낸 세대로 이전 세대보다 훨씬 소비 중심적이었고 다양한 외국 문화를 경험한 세대였다. 이에 따라 1990년대에 와서는 학생들을 축제에 끌어모으는 것이 어려웠고 축제를 통해 다양한 학생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결과로 1990년대 축제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문화로서의 ‘대동제’의 의미가 점차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축제에서는 공동체 의식을 의도적으로 강조한 축제가 진행되었다. 1991년 가을 축제에서는 ‘너의 손을 잡을 때’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고 공동체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장’을 만들고자 했으며 1992년 봄 축제에서는 ‘새벽열음’이라는 이름으로 ‘관악공동체의 새벽을 열자’는 주제로 진행했다. 그러나 일부 프로그램은 참여 학생이 없어 취소되는 등 다함께 어울려 화합한다는 대동제의 의미가 퇴색되어갔다. 이에 따라 1993년 축제 ‘가슴 속 자신감으로’부터는 기존 대동제의 대표행사였던 ‘해방가요제’, ‘통일 10종경기’ 등 단체 행사가 사라지고 개인이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행사들이 등장했다. 1994년에는 축제 기간 중 ‘녹두문화제’를 개최하여 축제의 공간을 학교 밖으로 넓혔다. 또한 총학생회 중심의 축제에서 탈피하여 각 단과대학이나 학과별로 특성에 맞는 여러 가지 행사를 기획하여 ‘신세대’ 학생들의 관심과 참여를 유도하고자 했다.
[2000년대_개성적이고 다채로운]
1990년대 다변화 되어가는 축제 행사와 학생의 참여 속에서 2000년대 축제의 고려 대상이자 과제는 ‘의미’, ‘재미’, ‘개성’이었다. 3가지 형태를 모두 잡기 위해 2000년대 축제는 다양한 시도에 따라 변화되었다. 2000년 축제에서는 이전 축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파격적인 행사들을 선보였다. 대중적 지명도를 가진 연예인들이 축제 무대에 등장했고, ‘스타크래프트대회’나 ‘당구대회’, ‘펌프대회’와 같은 행사들이 열렸다. 다양하고 파격적인 행사들은 많은 학생의 참여를 유도했다는 성과와 재미있고 신선했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재미만을 추구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2001년 축제에서는 ‘의미’와 ‘재미’를 함께 잡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봄 축제는 ‘뒤로 나는 슈퍼맨’, 가을 축제는 ‘도로시, 오즈의 마법사를 의심하다’라는 이름으로 슈퍼맨이나 도로시처럼 친숙한 아이콘을 사용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으면서 동시에 나름의 진보적인 지향을 놓지 않았다. 2003년부터는 연예인 공연보다는 학내 동아리와 소모임 공연에 좀더 중점을 두었으며, 총학생회와 동아리·서클이 함께 축제를 기획하는 변화된 모습이 나타났다. 총학생회 중심의 일방적인 진행에서 탈피하여 기획과 집행 자체를 동아리·서클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축제로 변화된 것이다. 또한 외국인 학생들이 자국의 음식을 소개하는 행사 등을 통해 소외됐던 유학생들에게도 참여 동기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각 축제의 개성을 두드러지게 만들었으며 학생들의 참여에 새로운 동기를 불어넣었다.
변화하는 방식, 변하지 않는 의미 “지성과 낭만의 장 대학 축제”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대학 축제의 구성과 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지만,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연대하며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공유한다는 축제의 의미만큼은 변화하지 않았다. 각각의 축제마다 고유한 어려움과 이슈들이 있었지만, 학생들은 자신들만의 문화와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문제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며 더욱 풍요로운 축제를 만들어 나갔다. 앞으로 다가올 축제들도 다채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겠지만, 축제가 지닌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지성과 낭만, 젊음과 열기를 발산하는 축제의 무대는 계속될 것이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서울대 축제 살아났다”, 「조선일보」, 1982.5.26.
“대학축제 전통놀이 푸짐”, 「동아일보」, 1982.5.29.
“記者放談-學藝祭를 보고나서”, 「대학신문」, 1982.5.31.
“[默言의 喊聲]속에 학예제 막내려”, 「대학신문」, 1982.5.31.
“5월 진군제 개막식 길놀이”, 「대학신문」, 1987.5.18.
서울대저널, http://www.snujn.com/news/59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