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축전은 대학생이라는 지성적인 집단이 평소에 강의실에서 充足시킬 수 없었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며, 오늘날의 건조한 학창생활에 일말의 정서의 향훈이 깃들 수 있는 搖籃이 되어야 하며, 또 평소에 發散할 수 없었던 젊음의 힘을 마음껏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_대학과 축제, 대학신문, 1974.9.30.
[1950년대_축제를 대신하여]
대학 축제는 대학생들이 함께 모여 청춘들이 지닌 고유한 지성과 낭만, 젊음과 열기를 발산하는 무대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로인해 대학 축제는 당대의 대학 문화와 청년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창으로 손색이 없다. 1950년대 전반까지는 전후(戰後)의 어려움으로 대학 축제가 열리기 힘들었다. 서울대학교에서는 축제를 대신하여 자체적으로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가장 규모 있고 중요한 행사는 ‘개교기념식’이었다. 1952년까지는 단과대학별로 기념식을 진행했지만, 서울 환도 이후(1953년)부터는 전 교직원과 학생들이 동승동 서울대학교 종합운동장에 모여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개교 10주년인 1956년에는 기념식뿐만 아니라 각종 웅변대회, 전시회, 학술강연 등 다채롭고 풍성한 행사를 진행하였다.
개교기념식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행사는 ‘서울대학교 종합체육대회’였다. 제1회 대회는 1952년 학도호국단 주최로 부산에서 진행되었고 서울 환도 이후에는 서울운동장, 효창운동장 등에서 진행되었다. 종합체육대회에서는 구기종목 결승 시합, 응원전, 고교대항 육상경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종합체육대회를 통해 단과대학 중심으로 나뉘어있던 서울대생들이 하나로 연합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 밖에도 서울대학교에서는 문화제, 장기놀이 등과 같은 행사가 개최되었다. ‘서울대학교 문화제’는 1957년 6월 26일 제1회를 시작으로 1959년 제3회까지 이어졌다. 문화제에서는 학술강연회와 함께 음악대학의 교향악단과 합창단의 공연, 연극제 등의 행사를 진행했다. ‘장기놀이 대회’(당시에는 장기노리라고 통용됨)는 1957년 11월 16일 제1회 대회를 시작으로 1963년까지 매년 가을에 개최되었다. 장기놀이 대회에서는 독주, 독창, 코미디, 고전 무용, 즉석 페스티벌 등의 행사가 열렸다.
[1960년대_독자적이고 자체적인]
1960년 4·19혁명 이후 대학생들이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중요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학생들의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대학 축제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단과대학별로 학생회가 조직되면서 학생자치 활동이 활성화되었고 이것은 단과대학별 독자적인 축제 개최로 연결되었다. 1960년대는 단과대학별 축제의 무대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 서구 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가면무도회, 캄보밴드, 트위스트, 쌍쌍파티, 카니발 등과 같은 서구의 영향을 받은 행사들이 축제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단과대학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행사, 서구적인 행사와 더불어 자신들만의 특색을 가진 행사를 구성하여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축제를 만들어 나갔다.
▲ 문리과대학_학림제
문리과대학은 1962년부터 1970년까지 8회에 걸쳐 ‘學林祭’(학림제)를 개최하였다. 학림제에서는 연극 공연, 문학회, 사진전, 장기 대회, 초청 음악회 등 행사가 열렸다. 특히 학술강연회, 정치사상 강연회, 학술토론회, 모의 안전보장이사회 등의 프로그램을 구성하여 학림제만의 특색을 나타냈다.
▲ 공과대학_불암제
공과대학은 1962년부터 1947년까지 매년 5, 6월에 ‘佛巖祭’(불암제)를 개최하였다. 불암제는 학술강연회, 음악회, 사진전, 서예전, 장기대회, 포크댄스, 체육대회 등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폭탄 발사, 글라이더, 무선 송신기의 중계방송, 계산척 경연 대회 등 공과대학의 특색이 엿보이는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여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다. 1969년부터는 가을철에 ‘공대 종합예술제’를 개최하였다. 공대 종합예술제는 연극 공연, 합창 발표회, 클래식 기타 연주회, 주택전, 미전, 시화전, 경음악 발표회 등 학생들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행사들로 구성되었다.
▲ 농과대학_상록문화제
농과대학은 1961년부터 매년 5, 6월에 ‘常綠文化祭’(상록문화제)를 개최하였다. 상록문화제는 심포지엄, 체육대회, 사진전, 미술전, 공개방송, 음악 감상회 등의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다. 횃불행진, 모닥불 놀이, 농악반의 농악 공연 등 농과대학의 성격이 잘 나타나는 행사도 진행되었다. 특히 1969년 제8회 상록문화제부터는 행사 일정을 학술의 날, 예술의 날, 체육의 날, 축제의 날로 구분하여 각 날의 특성에 맞는 행사를 진행하여 농과대학만의 특색 있는 문화제를 선보였다.
상록문화제 심포지움 자료, 연도 미상 (박노동 동문 기증)
상록문화제의 심포지움에서 사용된 자료이다. 표지에는 “常綠文化祭 Symposium 식량 자급과, 통일벼의 보급” 이라는 제목이 기재되어 있고, 그 아래 목차와 작성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표지를 포함하여 전체 7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심포지움의 주제를 통해서 농과대학만의 특징이 두드러짐을 확인할 수 있다.
▲ 미술대학_학예제
미술대학은 1968년부터 1973년까지 4회에 걸쳐 ‘學藝祭’(학예제)를 개최하였다. 학예제에서는 교수 작품전, 명화 전시회, 고대 한국판화 전시회, 시화전 등 미대 특유의 ‘無言의 축제’ 성격이 돋보이는 행사가 주를 이루었다. 학예제는 1974년부터 ‘시나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바꿈하여 전시회 및 연구발표, 공연 등 이전보다 다채로운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다.
▲ 법과대학_학술제&낙산제
법과대학은 1961년부터 ‘學術祭’(학술제)를 열었다. 학술제는 주로 각 학회의 연구 발표회, 강연회, 모의재판 등 학술연구 발표에 치중된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다. 학술제는 1966년부터 ‘駱山祭’(낙산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화되면서 학술 중심의 행사와 더불어 보다 다채로운 행사가 새롭게 진행되었다. 낙산제는 학술제와 마찬가지로 법과대학의 특색을 보여주는 심포지엄, 모의국회, 모의재판, 조사보고회, 패널 토의 등의 학술 중심 행사를 계속 유지했다. 여기에 연극 공연, 전시회, 카니발, 장기대회, 캠프파이어, 행운권 추첨 등의 새로운 프로그램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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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다른 단과대학들도 자신들의 특색이 두드러지는 축제를 자체적으로 개최하였다. 사범대학은 1961년부터 ‘淸凉祭’(청량제)를 개최하였다. 상과대학은 1959년부터 1974년까지 13회에 걸쳐 ‘洪陵祭’(홍릉제)를 개최하였다. 약학대학은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월 10일 ‘약의 날’을 기념하여 매년 10월에 ‘含春祭’(함춘제)를 개최하였다. 음악대학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예악축전’(藝樂祝典)을 개최하였다. 의과대학은 1964년부터 1974년까지 6회에 걸쳐 ‘含春祝典’(함춘축전)을 개최하였다. 치과대학은 1963년부터 매년 10, 11월에 ‘儲慶祭’(저경제)를 개최하였으며 1969년부터는 6월 9일 구강보건일을 기념하여 1학기에 ‘6·9제’를 개최하였다. 가정대학은 1970년부터 매년 1학기에 ‘아람제’를 개최하였다. 단과대학별 축제는 1970년대 종합화되기 이전까지 성행했으며 종합화 이후에도 일부 단과대학은 별도의 축제를 유지했다.
1960년대에 단과대학별 축제만 개최되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1963년 ‘대학제’라는 이름으로 11월 2일 창경원(창경궁)에서 축제를 개최하였다. 대학제에서는 서울대학교 학생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5,000명을 초청하여 보다 풍성한 축제를 만들었다. 포크댄스, 촌극, 쌍쌍파티 등의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였으나 주최 측의 진행 미숙, 준비 부족 등으로 혼란이 발생했고 사회적 논란까지 제기되면서 ‘대학제’는 자취를 감췄다. ‘대학제’ 이후 총학생회는 새로운 대학 문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1965년 제1회 ‘종합대학제’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66년 제2회 종합대학제 이후 총학생회 활동 미비, 대학가의 혼란 등으로 인해 오랫동안 열리지 못했다.
[1970년대_ 민속적이면서도 서구적인]
1960년대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학생들의 민족주의가 1970년대에는 고조되는 정치적 억압 속에서 새로운 양상들로 표출되었다. 대표적인 양상은 ‘민속’이다. 이는 대량으로 유입되는 서구 문화에 맞서 민족 문화를 복원하자는 외침과 공동체 문화 공연의 장을 통해 지배 계급을 풍자하고 정권에 상징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등장했다. 문리과대학에서는 민속가면극 연구회, 탈춤반이 생겨났고 판소리, 탈춤, 마당극과 같은 전통문화적 행사들을 통해 민속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문리과대학에서 시작된 민속붐은 다른 단과대학 더 나아가 다른 학교로까지 번져나갔다. 이와 같은 ‘민속붐’은 1970년대 축제로 이어지게 된다.
민속에 대한 관심으로 축제에서 서구의 영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유신 선포 후 패배주의와 무력감에 빠진 학생들 사이에서 ‘통블생’(통기타, 블루진, 생맥주)과 함께 장발, 미니스커트 등의 서구적인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단과대학이 관악 캠퍼스로 모인 1975년에는 개교기념일 맞이하여 10월 13일부터 18일까지 제1회 ‘대학축전’이 개최되었다. 제1회 대학축전은 단과별 축제가 아닌 범 서울대적 축제로 학도호국단이 주최했다. 대학축전에는 학술 행사, 음악제, 민속제, 예술 행사, 전시회, 모의국회, 카니발, 체육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구성되었다. 제2회 대학축전은 이듬해인 1976년 개교 30주년을 맞이하여 개최되었으며 제1회 축전보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제3회 축전은 학내 사태 관련한 휴업으로 유산되었으며 제4회 축전은 정치적인 이유와 학도호국단의 독단적 행사 주관으로 인해 학생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1979년 10·26사태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이로 인해 ‘민중’이 핵심적인 가치로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민속’과 결합하여 대학생들만의 독특한 ‘운동권 문화’가 창출되었다. 운동권 문화가 퍼지기 시작한 1980년대의 축제는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뉴스, https://www.snua.or.kr/magazine?md=v&seqidx=6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