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면 농촌으로 달려가 자연 속에서 땀과 노동 그리고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는 농촌활동, 대학생들의 ‘농활’에는 오랜 유래와 역사가 있다. 1920년대는 학생과 지식층, 사회·문화·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위한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난 시기였다. 이 중 192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의 학생 김찬도, 고재천, 우종휘, 권영선 등 10여 명은 항일 학생비밀결사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해 농민 야학을 창설하는 등 농민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1928년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해산됐지만 이후 서울대 농대의 ‘서둔야학’, ‘고색야학’ 등으로 그 전통이 이어졌다. 1930년대에는 전국적 규모의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이 일어나면서 문자보급 운동과 문맹퇴치 운동이 전개됐다. 대표적으로 동아일보사의 학생 하기 브나로드 운동, 조선일보사의 귀향남녀학생 문자보급 운동 등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운동, 계몽운동 성격의 농촌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찬도 일지
김은경 동문 기증, 1991
김찬도는 황해도 황주 출신으로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중이던 1926년 건아단을 조직했다. 본 일지에는 농민야학을 비롯한 건아단의 활동과 그에 대한 소회가 담겨있다.
“우리들은 민족운동의 중심을 농민운동에 두었으나 재학중의 농민운동으로서는 농촌계몽운동만이 가능하다는 견지에서 계몽운동에 착수하여 우선 학원에서 제일 가까운 서둔, 고색 두 부락에 야학을 설치하고 순번으로 나아가서 선생이 되며 글 모르는 농촌 청년들과 아동들에게 국문과 산수, 한국역사를 가르쳐 주었으며, 때때로 농촌 인사들을 모아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주는 한편 진실로 그들속에 내재하여 눈물과 웃음을 마음으로 나누었든 것입니다.”
농촌계몽활동은 6·25전쟁으로 잠시 중단됐지만 이후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서울대생들은 학생회를 건설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6월 10일 4·19혁명을 사회운동 차원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국민계몽운동을 결의한 후, 7월 6일 국민계몽대를 결성하여 시가행진을 벌이고 다음 날 전국 각지로 출발했다. 도시에는 새생활운동반을, 농촌에는 국민계몽반을 파견했다. 당시 국민계몽운동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농촌계몽운동이었다. 국민계몽반은 지방으로 내려가 김매기, 타작하기 등 농사일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4·19혁명 정신 보급, 공명선거 계몽 활동, 과학사상 보급, 미신 타파, 환경미화, 보건위생 등 생활개선 활동을 함께 벌였다. 문리과대학은 ‘농촌으로 가기 운동’을 추진하였고, 농과대학과 사범대학은 국민계몽반을, 의과대학과 치과대학에서는 무의촌 진료반을 조직하였다.
1961년 6월, 서울대학교는 ‘향토개척단’을 결성하였다. 향토개척단은 1961년 여름방학 1,500여 명의 봉사대를 전국의 농촌에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960년대의 농촌활동을 주도했다. 당시 서울대의 각 단과대학에는 여러 농촌운동 관련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문리대와 음대생들의 우리문화연구회, 법대 농촌법학회, 미대 농촌연구회, 약대의 ‘소’모임, 치대와 간호학과 학생들의 TT클럽, 상대 농업경제학회 등이 연합하여 향토개척연합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향토개척단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공대 향토공학회, 문리대 목민회 등도 향토개척단에 가입했다. 특히 농대, 수의대, 사범대 등은 일찍이 1950년대부터 농촌운동 단체를 결성하여 농촌계몽운동의 주축을 이룬 단과대학이었으며, 농대 농촌문제연구부와 사범대 향토개발회 및 경암회 등이 향토개척단에 참여하였다.
향토를 불밝히는 젊은 역군들
대학신문, 1961.8.14.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1961년 8월 14일 대학신문 기사에 실린 ‘향토개척단 하기 활동지역 지도’에는 제주도와 울릉도를 포함한 전국 각지에 서울대학교의 상징인 모양이 표시되어 있다.
“헐벗은 농촌 메마른 향토를 찾아가는 젊은 대학생들의 의욕의 대열이 여기있다. 농어촌의 어두운 뜨락과 이랑마다 앞날을 밝히는 새로운 대망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다...젊음을 부각하는 향토개척의 보람은 점차로 훈훈한 사랑 속에 꽃피어날 것이다.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 천오백의 건각들은 개척단기를 휘날리며 방방곡곡을 찾아들어 봉사 지도 계몽 조사활동을 전개했다...”
향토개척단 학생들은 특정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각기 연고지를 중심으로 농촌의 경제·법률·사회·구조 등에 대한 조사 활동, 문맹퇴치, 협동정신 고취, 민족정기 양양 등 계몽활동, 의료·의약·기술·근로 등의 봉사활동을 펼치고, 농업과 농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960년대 향토개척단이 주도한 농촌봉사활동은 4·19혁명에서 비롯된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민족주체성 확립과 농촌 협동화를 내세웠으며, 근로봉사뿐 아니라 농어촌 실태를 조사·분석하고 강연회와 정기집회, 세미나를 여는 등의 연구를 병행했다. 특히 법대 농촌법학회는 ‘산림계 실태조사’와 ‘화전민 실태조사’ 등 농촌 현지 실태조사를 통해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 열악한 주거환경과 교육난에 시달리는 농촌의 실상을 알리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수행하였다.
한편 ‘계몽’이라는 표현을 두고 농촌운동 단체들 사이에서 문제 제기와 내부 비판이 일어나면서, 농민을 가르치기보다는 농민에게 배우려는 자세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사용된 ‘농촌계몽운동’이라는 표현이 ‘농촌봉사활동’으로 바뀌었으며, 이후 ‘봉사’라는 글자를 빼고 ‘농촌활동’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농촌활동을 엘리트 의식이나 감상적 인도주의에 입각한 시혜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하나로 생각하면서 그 성격에도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대학신문은 당시 농촌봉사활동에 임하는 학생들의 태도에 대하여 “오늘날의 농민의 지적 수준은 과거보다 훨씬 진보됐다. 따라서 대학생들이 지도자의 입장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계몽한다는 식의 활동은 이제 불가능하다. 과거의 종적인 입장에서 횡적인 관계로 개선시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반려자가 되는 길이 좀 더 바람직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치밀한 사전답사 있어야, 학생·농민 횡적 유대 긴요”, 「대학신문」, 1969.9.1.)
1970년대 중반부터 농활은 경제화·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촌·농업 문제의 사회 구조적 해결을 도모하고 농민과 학생의 연대를 지향하는 ‘농민학생연대활동’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는 노동 문제가 대두되며 학생운동 내부에서 민중과의 연대가 강조되던 시기였다. 민중의 범위에는 농민이 있었고 농촌은 또 다른 민중운동의 현장이었다. 이에 학생들은 농활을 통해 사회 변혁을 위한 농민들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고, 학생 자신도 민중의 삶 속에서 사회현실에 대한 구체적 경험과 철저한 자기단련을 추구하였다. 학생들은 규율을 정하여 오전·오후의 근로활동을 진행하는 한편, 장년반·청년반·부녀반·학생반·아동반 등의 분반 활동과 호(戶)별 방문으로 농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매일 밤 그날 활동에 대한 평가회를 열어 하루일과를 점검하는 등 신체적·정신적 단련을 해나갔다. 1979년 강원도로 하계 농촌봉사활동을 떠난 서울대 학생들의 주요 일과로는 새벽 6시 기상, 7시~8시30분 조식, 8시30분~11시50분 오전일과, 오후 2시~6시 오후일과, 오후 9시~11시 정비 및 반성 등으로, 특히 그날 하루를 점검하는 평가회 시간은 새벽 2시~3시까지도 이어질 정도였다. 긴장 속에서 엄격하고 빡빡한 일정을 소화했음을 알 수 있다. (“흙으로 돌아가 땀의 보람 실감”, 「대학신문」, 1979.8.6.)
1980년대에는 기존의 분산적인 서클 중심, 팀 단위 농활이 점차 조직적이고 통일성을 갖춘 학과 단위로 바뀌었다. 1984년 서울대 총학생회가 재건되면서 농활 관리가 학생회 차원의 학과 단위로 이루어지며 농활의 대중성과 공개성이 확대되었다. 또한 1988년 총학생회에 농민분과가 만들어지면서 농활은 총학생회의 주요 사업이자 일상적인 학생 활동으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1987년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들이 집결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조직되어, 1989년부터 농민단체들과 농학연대를 추진하며 전국 대학생의 농민학생연대활동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는 1970~1980년대 동안 계속되던 정부 당국의 감시와 통제가 줄어들었고, 총학생회 주도의 농활 역시 학교 당국의 승인을 받아 제도적 안정성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추수농활 지침서
임선웅 전 직원 기증, 1988
1988년 9월 서울대 총학생회의 추수농활 지침서는 농활에 임하는 자세, 농활에 대한 올바른 관점, 추수농활의 의의 및 방향성 등을 논하고, 대농민선전내용으로 추곡가 문제의 본질과 농민투쟁, 1988년 주요 농업정책의 내용과 문제점, 정부 탈농민정책 비판 등을 수록하였다. 또한 “농활은 농학연대사업으로, 농민 학생 양자가 이 땅 모순해결의 주체로 굳건하게 설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자 “상호 목적달성을 위해 서로 도와주는 활동”, 그리고 민중 생존권 쟁취 투쟁의 대오를 가다듬기 위한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계 농촌활동 신청서
조남규 동문 기증, 1989
1989년 하계 농촌활동 신청서는 수출주도형 산업화정책에 피폐해진 농가 경제의 심각성을 호소하며, 농활을 “우리민족 모두를 억압하는 세력에 맞서 자주.민주.통일의 과제를 실현하는 전체 변혁적 관점에서 수행”할 것, 청년은 민중적 세계관을 체득하고 농민은 농민운동을 강화하는 장으로 만들 것을 제시한다. 신청서 내용에는 신청양식과 함께 “가자! 농촌으로, 거친 황토 팔뚝 맞잡고 농민이 사람답게 사는 참세상 건설위해!”, “농활을 갑시다!! 가서 생산하는 근로민중의 건강성을 배우고 또한 농민들의 현실적인 고통이 무엇인지 함께 느껴봅시다.” 등의 구호가 적혀있다.
1980년대부터 농민운동 영역은 연대와 대중성을 강화하면서 농산물 수입반대 투쟁, 농가 부채 탕감 투쟁 등을 주요 목표로 활발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농활이 당시 농촌·농업경제의 실태와 현안을 골자로 농민운동과 학생운동이 연대한 사회운동의 하나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학교 언론협의회가 발행한 자유언론 제26호는 농활을 “학생들이 농촌현장에 들어가서 농민과의 만남을 통하여 모순의 척결을 지향하는 집단적이며 의식적인 활동”이라 일렀다. (“관악인이여, 가자! 농촌으로”, 「자유언론」 제26호, 1985.6.27.)
1990년 전대협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연대하여 농촌활동 본부를 설치하고 전국적 단위의 농활을 추진하였다. 전농은 군 단위의 ‘농민학생연대사업추진위원회(농학연추)’를 읍면 단위까지 설치하여 농민학생연대활동의 기반을 확대했으며 사회단체들도 가세하여 농촌활동에 참여했다. 1980년대부터 활기를 띤 농활은 1990년대에 이르러 전대협과 전농이라는 전국조직이 만들어지면서 완전히 그 틀을 잡았다. 학과마다 20~30명씩 농활대가 구성됐고 매년 여름 2,000~3,000여 명이 농촌으로 떠났으며, 전국에서 수만 명의 대학생이 참가하였다. 농활은 서울대학교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할 수 있는 공동체 문화로써 1990년대 전반까지 매년 3,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연례행사로 진행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전성기를 누리던 농활은 2000년대 들어 그 규모와 의미가 축소되어갔다. 민주주의의 성장과 함께 학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과거 학생운동 세력 중심의 정치적 색채가 옅어졌고, 학생들은 농활의 성격을 봉사와 현장체험학습의 하나로 인식하게 되었다. 2003년에는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충남 일대에서 농활을 진행했고, 2005년 750명, 2006년 500명, 2008년에는 400명으로 계속 감소하였다. 하지만 달라진 인식에 비해 농활의 형식이나 내용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소규모 단위로 농활을 꾸준히 이어갔으며, 농민연대를 지향하는 전통도 완전히 단절되기보다는 부분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대학사회에 여성주의가 확산하면서 농활 조직에 여성농민반(여농반)이 만들어져 여성농민의 삶을 이해하고 연대를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특히 당시 학내에서 벌어지던 반성폭력 운동은 농활에도 영향을 미쳐 여성농민반 자료집에 반성폭력이 중요한 논의로 다루어지기도 하였다.
농촌활동이 점차 쇠퇴함에 따라 그 대안으로 다양한 현장활동이 시도되었다. 이미 1980년대 전후로 농활 이외에도 공장활동(공활), 빈민활동(빈활) 등 학생과 노동자, 빈민들이 공장과 도시빈민 거주지 등의 현장에서 함께 일하며 생활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환경현장활동(환활)이 주목받았다. 원자력발전소나 핵폐기장, 골프장, 소각장 건설 등 환경문제가 발생한 곳에서 농활을 벌이거나 해당 지역의 반핵운동 등을 지원함으로써 실천적 의미의 농민학생연대활동을 수행하려 한 것이다. 이후 ‘반핵농활’은 대표적인 환경현장활동으로 발전하였다. 환경현장활동은 당시 서울대에서만 1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할 정도로 큰 반응을 얻었다. 현장활동은 환활을 필두로 이후 산업현장활동, 간호현장활동, 기지촌현장활동, 식당현장활동 등 여러 형태로 범위를 넓히며 환경, 생태, 먹거리, 의료, 산업안전, 성매매 문제 등의 문제의식 공유와 대안 모색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21세기 들어 대학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봉사 기능이 강조되면서 서울대는 학생들의 사회봉사활동을 제도화하며 서포터즈, 멘토링, 자원봉사, 지식 나눔, 기부, 교류협력, 캠프 및 체험 행사 등 각종 대외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글로벌사회공헌단은 2021년부터 농촌SNU공헌단 ‘샤농샤농’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취약한 농가를 위한 농촌일손돕기 활동을 진행 중이다. 또한 학생들의 전공과 특기를 살려 멘토링과 학습지도 등을 펼치는 재능기부 형식의 농촌활동도 증가하여 학생과 현지 주민의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는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대학생 농활이 재개되어 각 지역 대학들이 농가의 부족한 일손 돕기에 나서고 있다. 농활은 이제 과거의 정치적 색채에서 벗어나 농촌현장 체험과 교류 활동의 성격으로 바뀌어, 농민들과 일손을 나누며 땀과 생태의 가치를 배우고, 대학 시절 폭넓은 경험을 통해 공동체와 연대의식, 사회공헌의 정신을 함양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모습과 성격은 시대를 거치며 변화해왔지만, 대표적인 대학문화이자 학생자치 활동 중 하나인 농활의 의미는 여전히 되새겨볼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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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고등교육의 새 요람 서울대학교 1945-1953』, 2015.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강선보·고미숙, 「농촌계몽운동에 나타난 계몽주의 사조의 성격고찰 – 브나로드 운동을 중심으로 -」, 『한국교육학연구』3(1), 안암교육학회, 1997.
서울대학교 뉴스, https://www.snu.ac.kr/snunow/snu_story?md=v&bbsidx=137245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뉴스, https://www.snua.or.kr/magazine?md=v&seqidx=7173
서울대저널, http://www.snujn.com/news/3012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