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민주화운동의 방점을 찍은 한 해였다. 가깝게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멀게는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된 반독재 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은, 1987년 ‘6월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분출되어 수십 년간 이어온 독재체제를 끊어낼 수 있었다. 국민들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뿌리째 빼앗긴 대통령 선거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바라고 있었고, 더이상 ‘체육관 대통령’을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1979년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 등 국민들의 민주주의 요구에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언론을 통해 독재 반대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을 좌경용공(左傾容共)으로 매도하였고, 1986년 건대사태1), 부천서 성고문 사건2)은 폭압정치의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폭압정치 속 민주화운동은 더 거세졌고 6월항쟁과 직선제개헌으로 이어졌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은 6월항쟁의 직접적 계기였다.
1987년 1월 14일 새벽 경찰은 박종철(언어학과 84)을 하숙집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경찰은 당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약칭 민추위)’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기 위해 21세의 무고한 청년에게 물고문을 가했고, 그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박종철의 사망 이후 경찰은 처음에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며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사인을 왜곡 발표했다. 부검 결과 온몸에 분명하게 나타난 고문 흔적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결국 사건 발생 5일 만인 1월 19일 두 명의 경찰관이 박종철에게 물고문을 자행하여 사망케 했다고 시인했다. 정부는 2명의 경찰을 구속하고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을 경질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습책으로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대학가와 사회·종교 단체는 성명을 발표하고 추도시위 및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박종철의 죽음은 서울대생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박종철의 시신이 벽제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한 1월 16일, 언어학과 학우들은 과 사무실(3동 107호)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다음 날 과 학생회 차원에서 추모의식을 가졌으며, “고문 사망은 민주화운동 전반에 대한 살인행위”라고 쓴 사건의 경위를 알리는 대자보를 부착했다. 이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자 학교 당국은 분향소를 철거했고, 학생들은 다시 설치하기를 반복했다.
나흘 뒤인 1월 20일, 서울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고(故) 박종철 학형 추모제’ 및 ‘살인정권 타도를 위한 관악 2만 학우 궐기대회’가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열렸다. 서울대생 1,000여 명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언어학과 학생들은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라는 추모시를 낭독했으며, 「꽃상여 타고」, 「그날이 오면」 등의 노래를 불렀다. 추모제를 마친 후 학생들은 아크로폴리스광장으로 이동해 궐기대회를 열고 교내 시위를 벌였으며, ‘박군사망 진상발표는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살인고문철폐를 위해 투쟁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고문사건 경위보고와 총학생회 실천방향 등을 토론하고 성명서를 낭독한 뒤 박종철의 영정을 앞세우고 정문 앞까지 걸어가며 침묵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서울대와 함께 서강대, 성균관대, 연세대, 동국대, 한양대에서도 추모제, 규탄대회, 시위 등이 열렸다.
그리고 1월 27일 재야 단체를 중심으로 ‘고(故)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2월 7일을 국민 추도일로 선포하고 대규모 추모제를 오후 2시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기로 하였다. 그러자 당시 정호용 내무부 장관은 이를 겨냥하여 “좌경용공 세력척결에 경찰력을 집중하라”라고 지시했고, 검찰과 경찰은 국가보안법과 소요죄를 적용하여 추도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경찰은 서울대의 교내 시설을 수색하는 한편 언어학과에 설치된 분향소도 폐쇄했으며 명동성당 부근에 검문검색을 시행하고, 재야인사에 대한 가택연금 처분을 내렸다.
현 정권의 야만적인 고문살인행위를 온국민의 이름으로 규탄한다 - 고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하며 -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 1987.1.20. 홍순민 동문 기증
19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실이 폭로되면서 발족한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는 ‘고(故)박종철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2월 7일 ‘고 박종철군 국민추도회’와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했다. 이 기록은 그에 앞서 박종철의 죽음을 애도하고 사건의 진상을 요구하는 성명서이다.
1. 박종철 군의 죽음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2. 이 사건의 책임자를 규명하여 철저히 엄단해야 한다.
3. 우리는 이번 사건이 근본적으로는 2,000여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들어선 현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력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4. … 이번 박종철 군 사건을 계기로 헌법상에 엄연히 규정되어 있는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을 쟁취하고, 저 전두환 고문권의 종식을 위해서 온 국민의 적극적이고 단결된 노력을 호소하는 바이다.
5. 현재 안기부 등 특수수사기관에 불법연행, 장기구금되어 고문수사를 받고 있다고 추정되는 수십명의 민주인사들에 대해 그 명단과 소재를 밝히고 즉각 석방하기를 바란다.
6. 우리는 우선 오늘부터 26일까지 1주일간을 전국적으로 박종철 군 추모기간으로 설정하고 국민 모두가 검은리본을 패용할 것을 호소한다.
“박종철 군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이 땅에 고문과 폭력이 사라지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온 힘을 다해 총 매진합시다.”
2월 5일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학생 약 400여 명이 모여 총학생회 주최로 궐기대회를 열었다. 교수 100여 명도 이날 밤늦게까지 연구실을 지키며 박종철을 애도하는 의식을 가졌다. 비록 2월 7일 추모제는 원천봉쇄로 열지 못했으나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고, 전국적으로 16개 지역에 약 6만여 명이 결집했다. 경찰은 이날 시위로 798명을 연행했다. 2월 26일 열린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학생들은 박종철을 추모하는 리본을 달고 졸업식장에 입장했으며, 문교부 장관이 축사를 낭독하자 졸업생 대부분이 일제히 야유를 보내며 퇴장했다. 국가 폭력에 목숨을 잃은 학우가 있는데 졸업식을 여느 해와 같은 마음으로 치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추도회준비위는 2·7국민추도회가 무산되었음에도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고 박종철의 49재인 3월 3일을 맞아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을 거행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원천봉쇄되었고,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를 피해가며 산발적인 시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고 박종철군 49재추도식 3일 연건·수원에서 열려, 대학신문, 1987.3.9.
박종철의 49재인 3월 3일 화요일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추도식이 있었다. 관악캠퍼스에서는 49재 전날인 2일 「범관악학우1차 실천대회」를 갖고 3일 오전 11시 교내에서 출정식을 갖기로 결의했으나 무산되었다. 대신 학생들은 개별적으로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생 다수가 연행되었고 이 중 2명에게 집시법위반혐의로 구속영장이 신청되기도 했다. 연건캠퍼스에서는 의·치대생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을 갖고 평화대행진을 대신해 침묵시위를 벌였고, 수원캠퍼스에서도 농과대학생회주최로 이날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49재를 거행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학생들의 분노는 4월 13일에 발표한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 조치는 모든 개헌논의 중지와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사회 각계 인사들의 비난이 줄을 이었고, 전국 각지에서 장기집권의 음모를 비난하고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5월 1일 서울대 교수 122명이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정부의 호헌조치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서울대 총학생회도 5월 7일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
서울대학교 교수, 1987.5.1. 김진균 교수 기증
서울대학교 교수들은 “우리는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서 아래와 같이 우리의 뜻을 밝힌다”라는 한마디로 선언문의 운을 띄웠다. 이 시국선언에서 교수들은 4·13 호헌조치를 비판하고 헌법개정을 요구했다. 참여 교수의 수가 전국 대학 중 최다였고, 11개 단과대학 43개 학과의 원로 중진 소장 교수들이 두루 포함되었다. 본 기록에는 언론지별 성명서 게재 일자가 메모 되어있다.
그런데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 7주기를 맞아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5·18 희생자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공식성명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등 대공간부 3명이 이 사건을 축소 조작하였고, 고문가담 경찰이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당시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 검찰, 청와대 비서실 등이 참여하는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사건의 은폐 조작에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폭로 직후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하여 고문 참여 경관 3명을 추가로 구속하고 진상을 공개하면서 그동안 쌓였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5월 25일 무기한 수업 거부와 단식농성을 결정했다. 5월 27일 학생 8,000여 명이 29일까지 동맹휴업을 할 것을 결의한 뒤 그 가운데 2,000여 명이 신림동까지 진출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는 각 대학교로 확산되었다.
5월 27일 전국재야지도자 2,200여 명은 민주화 투쟁세력의 총집합체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다. 국민운동본부는 비폭력투쟁 민주헌법 쟁취 선언, 전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구심체가 되었다.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성공회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개최하였다. 6월 9일 연세대 총학생회는 10일에 예정된 국민대회 출정을 앞두고 ‘구출학우 환영 및 6·9 시국연세총궐기대회’를 가졌다. 이날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중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우리는 결코 한열이를 빼앗길 수 없다 – 최루탄의 영원한 추방을 위하여-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1987.6.
이한열 최루탄 피격 및 치사사건은 박종철의 죽음과 더불어 6월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6월 12일 연세대에서는 ‘범 연세인 최루탄 규탄대회’를 열고, 학교 앞에서 연세대생 3천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였다. 당시 최루탄은 흔히 지랄탄, 사과탄과 함께 폭동진압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최루탄 차를 ‘페퍼포그(pepper-fog)’라 불렀다.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한해 최루탄을 20만 4천여 발, 40억 원 가까운 돈을 눈물로 소모시켰고 86년 1월부터 10월까지 31만 3천여 발, 60억원을 소비했다고 한다. 국민들이 피땀흘려 낸 세금으로 국민의 세금을 위협하고, 한발을 쏘면 농민들이 죽어라고 일해서 생산한 쌀 7가마니가 순식간에 날라가 버리는 지랄탄을 마구 쏘아대는 폭력정권은 진정 누구를 위한 정권이란 말인가?… 독재의 심볼 최루탄을 그들과 미제의 무리와 함께 이땅 한반도에서 영원히 추방하자!!…최루탄 살인 웬말이냐 폭력정권 타도하자!! 한열이를 살리내라!!”
1987년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 지휘 아래 전국 22개 도시에서 ‘박종철군 고문살인 조작·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국민운동본부가 공식 주도한 국민대회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주요 도시에서 약 24만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대생 5,000여 명도 아크로폴리스에서 총궐기를 위한 출정식을 하고 시청, 한국은행, 서울역, 청계천 일대로 진출하여 밤늦게까지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날 전두환 정권은 ‘6‧10 갑호비상령’을 내려 5만 8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하였고, 이 중 서울 시내 주요 시가지와 대학 앞에 2만 2천 명을 배치하였다. 전국에서 3,800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지만, 전국 각지로 분산된 경찰 방어력은 커다란 한계를 보였다. 시위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산발적인 야간시위와 철야농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 투쟁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특히 서울 명동성당 점거 농성은 6월 15일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는 6월 내내 항쟁의 열기가 지속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기간에 서울대 등 여러 대학 학생들이 날마다 농성 학우의 구출을 위한 출정식을 갖고 명동성당 부근으로 진출해 응원시위를 벌였다.
6‧10 투쟁 호헌철폐 독재타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산하 호헌 분쇄와 학살원흉 미국-전두환 일당 처단을 위한 특별 위원회, 1978.6.8.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6‧10 총궐기를 위해 모든 지침과 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배포했다. 내용으로는 6월 10일 수업거부와 시험연기를 주장하고 과 단대별 결의 대회를 가지며, 6월 10일 당일에는 오후 1시 총궐기를 위한 출정식 이후 6시 시청 미 대사관 앞에서 총궐기대회에 가담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호헌철폐! 민주쟁취!’ 였다. 적법한 절차를 통해 헌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기 위한 바람이 담긴 구호가 본 유인물에도 담겨 있다.
“호헌 저지 독재 지원 미국놈들 몰아내자!!”
“자주없이 민주없다. 미국놈들 몰아내자!!”
“호헌책들 분쇄하고 민주헌법 쟁취하자!!”
“살인고문 조작 은폐 군부독재 타도하자!!”
“군부독재 끝장내고 민주정부 수립하자!!!”
“학우여 토론하고 결의하고 참여합시다.”
6월 11일부터 26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6월 11일 서울시내 7개 대학생 1,000여 명이 ‘명동성당 농성학우 구출투쟁 출정식’을 가지고, 다음 날 명동성당 부근에서 근무하는 1,000여 명의 회사원이 점심시간에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위에 가담하는 등 화이트칼라를 비롯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졌다. 6월 18일 국민운동본부는 산발적 시위투쟁을 다시 결집하기 위해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 날’을 선포하고 최루탄 추방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경찰의 최루탄 난사로 인한 인명피해에 항의하고 나아가 정권의 폭력적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전국 16개 도시 247곳에서 일제히 시작되었다. 이 대회에는 150여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하였고, 학생들이 가장 많이 가담하였는데 규모와 열기는 6월 10일보다 훨씬 컸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물러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서울 28개 대학과 지방 45개 대학 학생들이 일어나자 문교부에서는 기세를 저지하기 위해 6월 17일 조기 방학을 종용하고, 19일 학교 당국이 하기방학을 시작했다. 이에 서울대학교 학생 1만여 명은 아크로에서 조기 방학 거부집회를 열었다. 또한 자연과학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5,000여 명의 학생들은 도서관을 점거했고, 그중 2,000여 명은 철야농성을 벌였다.
현 시국에 대한 연건인의 입장
연건캠퍼스 1500 학우 일동·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회·서울대학교 치과대학 대책위원회, 1987.6.22.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6월 10일 이후 투쟁기간 동안 연건인들의 단결된 모습과 굳센 투쟁의지를 확인하였으며 이후 끊임없는 투쟁을 위해 결의를 다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21일 단행된 조기방학은 우리자신이 단결했음에 대한 저들의 두려움의 표현이었으며 우리를 흐트러놓기 위한 기만책동임을 뚜렷이 밝히는 바입니다. 조기방학을 무산시키고 끊임없는 투쟁을 위하여 매일 등교하며 우리의 결의를 다져야 하겠습니다. 단결하여 투쟁합시다.…
우리의 결의
- 6월 22일부터 6월 27일까지 민주화 실천 주간 동안 민주 투쟁 집회와 시위에 적극 참여합시다.
- 최루탄 발사를 저지하고 항의합시다.
- 매일 등교하여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고 투쟁을 결의합시다.
- 교수님들도 반독재 투쟁에 동참할 것을 촉구합시다
- 케이비에스와 서울 신문의 왜곡보도에 항의합시다.
- 단결하여 투쟁합시다. 대동 단결! 대동 투쟁!”
총궐기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쟁취를 위한 서울지역 학생협의회 산하 6·9.10 총궐기 준비위원회, 1987
6월 10일 전국 각지에서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다. 본 기록에는 서울 주요 시가지를 중심으로 하여 총궐기 시 진출로와 집결지, 준비물, 상황별 집회 지침이 실려있다. 당시 서울대 학생들은 한국은행, 서울역, 청계천 등을 옮겨 다니며 시위를 벌였다.
6월항쟁에서는 개별적으로 시내 집결지로 이동하여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시위를 벌이는 게릴라전 방식을 택했다. 재집결하기 위해 후퇴로를 먼저 정해놓기도 했다. 본 기록에 실린 지도에는 가두시위전 지역 범위와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의 진입로가 표시되어 있다.
6월 26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평화대행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이날의 평화대행진은 사실상 6월항쟁의 절정을 이루게 된다. 전국 34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30여만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경찰의 원천봉쇄 방침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00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은 아크로에서 출정식을 갖고 서울역과 서부역 등 도심으로 진출하여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경찰은 전국에 10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배치했으나 전 국민적 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국적으로 경찰서 2개소, 파출소 29개소, 민정당 지구당사 4개소 등이 파괴 또는 방화 되었으며, 3,467명이 연행되었다. 당시 민주화 투쟁의 열기를 한군데로 집약시킨 결과물이었고, 이날의 시위로 결국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백기를 들었다.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한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직선제 개헌 등 8개 항의 시국수습 방안인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통한 88년 2월 평화적 정권 이양, 대통령선거법 개정을 통한 공정한 경쟁 보장, 김대중의 사면·복권과 시국 관련 사범들의 석방, 인간 존엄성 존중 및 기본인권 신장, 자유 언론의 창달,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정당의 건전한 활동 보장, 과감한 사회정화조치의 단행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로써 제5공화국은 실질적 종말을 맞이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새로운 전기를 열게 된다.
어느덧 6월항쟁도 서른다섯 해를 맞았다. 6월항쟁은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달성은 1980년대 후반 사회 각 부문 운동이 분화되고 조직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사회의 운동 방향도 점차 달라지기 시작하여 다양한 갈래에서 대중적 학생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학생회가 학생들의 민주화 의지를 담아내는 그릇 역할을 맡았다. 또한, 6월항쟁 이후 전국 노동자들은 노동자 대투쟁을, 농민들은 농민집회를 벌이는 등 노동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들이 이어졌다. 6월항쟁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우리가 현재 소수자 인권, 여성, 환경, 교육 등 일상 속의 문제들을 제기하며 개선하고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6월항쟁이라는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위한 첫걸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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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서울대학교 기록관,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정해구·김혜진·정상호, 『6월항쟁과 한국의 민주주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aver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 1)1986 년 10 월 28 일, 전국 26 개 대학의 학생 2,000 여 명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 애학투련)’ 결성식을 가졌다. 정부는 경찰 8,500 여 명을 동원한 진압 작전을 펴 1,585 명을 연행하고, 이 중 1,289 명을 구속하였다.
- 2)당시 부천경찰서( 現 부천남부경찰서) 의 경장이던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22 세 대학생 권인숙을 성추행한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