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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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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총학생회 재건과 학생운동의 대중화

2022. 3. 11.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1960년 4.19혁명 시기 제1대 총학생회가 출범한 이래 2019년 제61대 총학생회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총학생회는 매년 11월 치러지는 정기선거와 3월 재선거에서 재학생들의 직접 선거에 의해 과반수 투표가 이루어지면 구성될 수 있다. 현재는 62대 총학생회를 뽑기 위한 선거가 2년 동안 제대로 치러지지 못해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올해 3월 재선거를 실시할 예정이다. 이러한 선거방식은 총학생회칙에 명시되어 있는데, 회칙이 작성되고 확정되기까지 총학생회의 반복된 해체와 재건 과정을 거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학생회 부활, 1984, 서울대학교
학생회 부활, 1984,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을 학생들 개개인이 직접선거로 선출할 수 있었던 것은 1984년도 총학생회 선거부터였다. 이전의 총학생회장은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대표를 뽑는 일종의 대의민주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984년부터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도 단과대학 학생회장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직접 선거 방식에 의해 선출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간선제에서 직선제로의 변화는 사회 전반의 민주화 달성과 동시에 1980년 5.17군사정변으로 해체된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고자 했던 학원민주화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이 분출한 결과였다.

집권 초기 학생운동을 강하게 탄압하던 전두환 정권은 정치 민주화와 학원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1982년부터 학도호국단 구성 방식을 임명 방식에서 간접선출 방식으로 바꾸어 학생들이 호국단 간부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기존의 학도호국단은 학교 당국에 의해 정해진 임원들이 학생활동을 규정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어용적인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나 선출방식이 바뀌자 언더서클 주도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학생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조직으로 새로이 바꾸고자 하였다. 이때부터 학도호국단이 주도하는 집회가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전체 학생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으므로 이후 학도호국단은 학생운동의 중심세력들이 주도하는 학생대표조직으로 변화하여 나갔다.

이어서 1983년 말 학원자율화 조치 후, 학생회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다시 일어난다. 1983년 12월 21일 정부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자 학생운동으로 구속당한 학생들의 석방과 제적학생들의 복교가 시행되고 12월 29일에는 학교에 상주하던 사복경찰들이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 이듬해인 1984년에는 소위 ‘유화국면’이 조성되었다. 1984년 학생운동 진영은 유화국면을 이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화국면의 기만성을 알리기 위해 ‘학원 민주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나갔다. 학생의 힘으로 실질적인 학원자율화를 쟁취하고자 서울대학교에서는 1984년 3월 9일 학도호국단 주최로 700여 명의 학생들이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가운데 ‘공개 운영위원회’가 열렸고, 학생들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약칭, ‘학자추’)를 구성하였다. 8월 15일 학도호국단‧학자추‧언론협의체‧서클협의회는 힘을 합쳐 ‘학생대표기구개선협의회’를 조직하여 학생회 재건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으며 2학기에 들어 ‘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학생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협의회가 마련한 학생회칙 시안이 9월 14일 열린 학생총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새 학생회칙으로 확정되었다.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활동보고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홍순민 동문 기증, 1984.4.27.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활동보고서,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 홍순민 동문 기증, 1984.4.27.

서울대학교 학도호국단 학원자율화 추진위원회가 작성한 활동보고서이다. 학자추는 3월 14일 제1차 총회를 열고, 학칙 개정, 학내 언론 보장, 졸업 정원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후 추진위원회는 학도호국단과 함께 강제징집 폐지, 지도 휴학 철폐, 관제언론 규탄 시위 등을 주도하였다. 본 보고서는 정부의 자율화 조치의 배경과 그 허구성을 밝히고 학원 민주화 추진 경위와 정리, 반성, 평가를 통해 사회민주화의 구체적 방향성에 대한 모색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족적 독재세력에 의해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1960년 4월의 혁명정신과 이후의 죽음에 맞서 싸워온 지속적인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정통적으로 계승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학원민주화, 사회민주화라는 당위적, 당면적 과제를 함께 수행해나가야 한다. 이는 바로 어두운 시대를 정의와 양심의 불길로써 밝히려는 우리들의 결코 무릎 꿇지 않는 의지의 천명인 것이다. 「보고서 발간에 부쳐 – 우리는 지금 중요한 전환기에 서 있다」”

총학생회 선거운동 유인물, 1984
총학생회 선거운동 유인물, 1984
1984년도 총학생회 선거운동에 출마한 기호 1번 총학생회장 후보 이정우(공법학과4년), 총부학생회장 후보 백기영(건축학과4년)의 선거운동 유인물이다.
공약으로는 “1. 학생자치회의 정립, 2. 민족‧민중문제 접근, 3. 대학문화의 활성화, 4. 정치민주화의 수호”를 내세웠다.

1984년 9월19일부터 총학생회장 선출을 위해 입후보자 합동유세가 시작되는 등 학생회의 재건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후보로는 두 명이 입후보했는데 한 명은 학생운동 대중화와 각 대학 총학생회의 연대를 주장하던 공법학과 이정우였고, 다른 한 명은 사회학과 최형우였다. 학생들은 9월 25일부터 27일 오전까지 실시한 투표를 통해 이정우를 총학생회장으로 선출하며 총학생회를 구성했다. 투표권을 가진 총 2만여 명의 학생 중 1만3천5백33명이 투표한 선거에서 57%인 7천7백47표를 얻었다. 단과대학 여학생회장에는 단독출마한 장은주(21‧식품영양학과4년)가 당선되었다. 최초로 학생 총투표로 선출된 학생회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이날 서울대생 2천여 명은 교내 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 1천5백여 학생이 모인 가운데 ‘학생회부활기념식’을 가지고 4.19기념탑에 참배 후 대운동장에서 놀이마당을 벌였다. 또한 천여 명의 학생들은 단과대학별로 2-3백명 씩 무리를 지어 “학원사찰 중지하라”, “총학생회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그와 동시에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사퇴하고 학도호국단 해체를 선언했으며,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도 해체를 밝혔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학생회를 재건한 것이다.

하지만, 재건된 총학생회가 맞닥뜨린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문교부와 학교 당국은 학도호국단 이외의 단체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문교부는 1984년 10월 학원자율화조치는 계속 추진하되 호국단을 존속시킨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의 자리는 ‘주동’의 의미를 가진 자리여서 이정우는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자마자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는 1일 민한당사난입농성 및 잇단 외부인교내감금 등 최근 학원내외의 사태와 관련, 주동자급학생 4명을 제명처분했다. 이날 제명된 학생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 백태웅군(22‧법대 공법학과4), 지난달 27일 선출된 총학생회장 이정우군(22‧법대공법학과4) 부회장 백기영군(22‧공대건축공학과4) 사회대 학생회장 오재영군(22‧사회대인류학과4) 등이다. 학교 측은 “이들은 지난 2학기 초부터 총학생회 부활을 내세워 학내소요를 주동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은 민한당사 난입사건과 외부인 교내 감금폭행사건을 주동했다”고 밝혔다.” (“최근 학원소요주동자 징계 서울대생 4명 제명”, 「경향신문」, 1984.10.1.)

비록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총학생회 재건에 대한 학생들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고, 정부가 이를 계속 외면할 수는 없었다. 1985년 1월 문교부는 학도호국단 폐지와 학생회 부활을 공인하면서, 전제조건으로 학생회 회칙에 ‘학생들의 정치활동 금지, 지도위원회 설치, 학생회비 집행의 감독, 학생대표의 자격제한, 학생대표의 교수회의 참석 금지’ 등의 ‘문교부 5원칙’ 조항을 삽입하도록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1985년 2월 19일 ‘총학생회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 4일 개강을 맞아 자체적으로 학생회칙 시안을 마련하여 학교 당국과 조정작업을 벌였지만 ‘문교부 5원칙’의 적용문제를 놓고 의견 대립으로 합의를 보지 못했다. 이후 학생들은 단과대학 학생회 구성을 마치고 총학생회 구성에 착수하여 3월 28일부터 4월 3일까지 총학생회장을 뽑기 위한 합동유세를 개최하였다. 연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아크로에 운집한 가운데 선거열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1985년 총학생회장 및 총부학생장 선거 포스터,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1985년 총학생회장 및 총부학생장 선거 포스터,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1985년 4월에 치러진 서울대 총학생회장 및 총부학생회장 선거에서 회장에 김민석(22‧사회학과4년), 부학생장에 강영근(22‧산업공학과4년)이 각각 선출됐으며 총여학생회장에는 이진순(22‧사회학과4년)이 당선됐다. 4월 2일 저녁부터 3일 저녁 7시까지 관악, 연건, 수원캠퍼스에서 실시된 투표에는 총유권자 2만3천4백79명의 56.6%인 1만3천2백89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총학생회가 재건되면서 해마다 치러진 총학생회장 선거유세는 캠퍼스의 새로운 풍경으로 등장했다. 특히 1985년 4월에 열린 총학생회 선거유세에서는 학내 문제뿐만 아니라 군부독재 퇴진 및 개헌 문제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요구 등 정치적 쟁점이 주된 공약사항이었다. 후보들은 “민중민주의 불길이여 반역의 어둠을 살르어라”, “관악! 너 민족의 지성이여 온몸으로 저항하라”, “민족의 여명을 향하여, 마침내 민중이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고, ‘민중 민주주의’, ‘대중적인 학내 민주화’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는 학생운동이 표방하던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으며, 1985년 2·12 총선에서 나타난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갈망이 총학생회장 선거에도 반영된 결과였다.

1985년 총학생회장‧총여학생회장 투표용지
1985년 총학생회장‧총여학생회장 투표용지

1985년 총여학생회장 선거 포스터,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1985년 총여학생회장 선거 포스터,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1985년 총여학생회장 선거 포스터이다. 기호 1번의 공약으로는 단대 내의 연구작업 활성화를 위한 여학생 공동학습과 문화의 장 확대,
여학생 취업 대책위원회의 구성, 기층 민중여성에 대한 조사연구활동 활성화, 여학생인권침해에 대처한 집단적 해결모색 등을 내걸었다.
1985년 3월 25일자 대학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여성해방의 문제는 사회의 구조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며
이는 사회민주화와 직결되어 여학생들의 사회민주화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정견을 밝히기도 하였다.

총학생회는 자치활동과 학생운동의 결집체였기 때문에 이 시기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학생회 간부가 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학생회가 일상적으로 반정부시위를 주도하면서 총학생회 간부들 가운데 수배되거나 체포되는 사람이 늘어났다. 어렵게 선출된 김민석은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을 지휘한 혐의로 수배되었고, 이후 1985년 9월에 대의원들에 의해 치러진 보궐선거를 통해 새로운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김용철(22‧사회학과4년)도 경찰에 연행, 구속되어 서울대 총학생회는 또다시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 손으로 뽑은 학생회장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구속되거나 제명되기도 하더라」는 학생들의 지적처럼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라는 자리는 일단 선출만 되면 구속과 제명이라는 수난을 겪어왔다. 특히 이번 김군의 경우는 선거당일 경찰에 연행돼 단 한시간도 학생회장의 자리에 앉아보지도 못한채 구속됐다. 이로써 84년 9월 학생회가 학생들의 의사만으로 부활된 이래 지금까지 학생회장에 선출됐던 이정우(23‧공법학과4년제적), 김민석군(22‧사회학과4년제적), 김용철군 등 3명이 모두 잇달아 구속되는 진기록을 남겼다.” (“선출만 되면 拘束·제명- 수난의 서울大 총학생회장 자리”, 「동아일보」, 1985.10.8.)

더구나 당시에는 어렵게 총학생회가 출범하더라도 학교 당국이 승인하지 않으면 예산을 지원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1985년 이후 징수된 학생회비는 졸업생들에게 반납되었다. 학생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식 인정과 예산 지원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고, 이후 사회민주화 운동 과정에서도 반복되는 수난을 겪으면서 총학생회를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한 학생들의 요구가 계속된 결과 1987년 9월이 되어서야 학교로부터 공식인정을 받게된다.

1985년 총학생회장 및 부학생회장 선거 포스터,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1985년 총학생회장 및 부학생회장 선거 포스터, 김철위 명예교수 기증

1984년 직선으로 총학생회를 재건한 이후 학생회와 학생운동은 과거보다 훨씬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학생운동의 대중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총학생회가 재건되었고, 학생들의 사회 참여는 한층 고조되었다. 총학생회의 재건과 간선제에서 직선제로의 선출방식의 변화는 소수의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기존의 방식에서 학내 다수의 학생들을 조직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학생운동을 대중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학생운동이 대중적이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례로 각 대학을 포괄하는 연합 차원의 학생운동 조직이 1984년 말 본격적으로 나타나 ‘전국학생대표기구회의’, ‘민주화투쟁 전국학생연합’, ‘전국학생총연맹’ 등의 결성이 이루어지면서 학생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의 결성으로 나아가게 된다. 1986년에도 사회 전반의 개헌 요구와 민주화 열기와 맞물려 학생운동은 더욱 격화하였고, 2월 서울대에서는 서울 시내 14개대 대학생 1천여 명이 모여 ‘헌법철폐 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운동 추진본부’ 결성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적 차원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 같은 학생회 연대조직으로 확대되어 학생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한 축이 되었다. 이렇듯 학생자치활동의 상징적 기구라고 할 수 있는 총학생회는 사회현실과 학내외 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왔지만, 학생들의 적극적인 의지에 따라 직접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을 선출하여 총학생회가 부활할 수 있었고 재건된 총학생회는 학생들을 대중적인 힘으로 묶어낼 수 있는 조직으로 발돋움하여 학생운동을 벌였다. 학생회의 역사가 곧 학생운동사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2016.
오제연, 「1970~8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의 전개와 양상」, 서울대학교 기록관편, 『도약의 나래를 펴라 1975-2017』, 2017.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1권 시대사』, 한울, 2020.
유용태‧정숭교‧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 : 제2권 사회문화사』, 한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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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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