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 내려서 관악로를 따라 언덕길을 올라, 녹두거리로 꺾어지기 직전 신림로가 나타나는 삼거리 교차로에 당도하면, 서울대학교의 정확한 번지수를 모르던 사람도 이곳이 바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자리에는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를 대표하는 상징인 정문이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인 대학교 교문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로 한눈에 시선을 끌며, 국립 서울대학교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이 정문 조형물은 구성원들로부터 ‘샤’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서울대학교 역사에 있어서 정문이 항상 현재와 같은 상징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관악캠퍼스 조성 이전 단과대학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위치하였을 때의 정문은 그 위상과 형태가 현재와는 사뭇 달랐다. 각 캠퍼스의 정문은 지금과 같은 조형물로 제작된 것이 아닌, 양쪽에 기둥을 두고 가운데에는 개폐 가능한 문이 위치한 일반적인 중‧고등학교의 정문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후 관악캠퍼스가 조성되고 종합 서울대학교가 출범하면서, 캠퍼스를 대표하는 정문의 필요성과 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1975년 관악시대가 시작되고 나서 1978년 3월까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주 출입구는 존재하였지만 정문은 조성되지 않았다. 1976년 국회에서 관련 예산이 통과되자 대학본부는 미술대학과 공과대학 등에 정문 설계를 위촉하였으며 그 결과 3개의 정문 시안을 후보로 제시되었다. 1977년 3월, 본부는 이 시안들을 학생회관에 전시하고 구성원들의 의견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3개 안 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시안을 전부 폐기하고, 같은 해 7월에 새로운 안을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이 새로운 안이 현재의 정문 안이었으며, 해당 안은 총 9명의 교수로 구성된 전문위원이 3차례에 걸친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다. 전문위원회는 학교 정장(正章)을 본뜬 새로운 교문 안이 관악산의 세모꼴과 조화를 이루며, 미래를 선도해나갈 독창적이고 개방적인 의미를 담았다고 밝혔다.
교문이 세워진다 - 4천만원 예산으로 내년학기 착공 예정
대학신문, 1977. 4. 4.
“본교 교문이 내학기초 착공된다. 본부운영과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그동안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끝에 지금까지 제출되었던 7개의 시안 가운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3개의 시안 중 하나를 채택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 세 개의 시안을 두고 교수, 학생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면 현재의 정문 수위실 위치에 총 4천만원의 예산 규모로 착공할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본교는 관악캠퍼스로 옮긴 이후 지금까지 교문이 없는 상태였는데 지난해 국회에서 예산안이 통과되어 이에 미대와 공대 건축과 등에 설계도를 위촉한 바 있다. 3개 시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가案 … 동숭동 정문을 모티브로 하여 구상되었다.
◇ 나案 … 기념비같은 구조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 다案 … 민족고유의 느낌을 살려 불국사의 축조법을 패턴으로 삼았다.
그런데 관계자는 이 세가지 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학생, 교수들의 많은 조언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교문형 확정 … 9월 착공 – 3개 시안 모두 폐기, 새 모형으로
대학신문, 1977. 8. 1.
“지난 4월 본지에 발표되어 학내의견을 종합 결정하기로 했던 3개 시안은, 그중 나·다 안으로 학내 의견이 좁혀졌으나 어느 한 안도 결정적인 다수의 찬성을 받지 못하였다. 따라서 학장회의에서는 이 두 안에서 결정하느냐 제3안을 채택하느냐를 놓고 의논한 결과 다른 안을 채택하기로 하고 공대·미대·환경대학원·고고학과 교수 등 9인의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 위촉하였다. … 전문위원회는 지난 6월 10일 제1차 회의에서 교문건립에 대한 원칙을 수립하였는데, 원칙은 ①주위 환경과 조화될 것 ②상징적일 것 ③일반 서울대인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할 것 ④개방적이며 문은 미닫이식으로 할 것 등이었다. 6월 21일의 제2차 회의에서는 위 원칙에 따라 본교 마크를 넣기로 합의하고 위원회는 사진과 같은 안을 구상, 7월 5일 제3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확정했다. 이 초안은 위원회 전체의 구상을 강찬균 교수가 다듬은 것인데 본 설계를 용역업체에 이미 의뢰하였다고 한다. 금속(재료는 아직 미정)으로 건립될 본 교문은 4천만원의 예산으로 착공, 90일간의 공정을 거쳐 11월말경에 완공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교문 안의 확정은 학생, 교수 모두에게 의외인 감이 많고, 더욱이 학생·교수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다는 당초의 학교당국의 방침과는 무관한 결정이어서 앞으로 많은 논란이 뒤따를 듯 하다.”
새로운 정문 제작 안에 대한 구성원의 의견은 다양했다. “기발한 면만 강조되어 전체적으로 천박한 느낌을 풍긴다”, “초현대적”, “독창적이고 참신한 맛이 나며 개방적인 이미지를 살렸다”, “강남의 명물” 등 여러 의견이 엇갈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문이 없는 게 낫겠다”는 극단적인 반응까지도 나왔는데, 이는 학내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던 당초의 이야기와 달리, 완전히 새로운 별개의 안이 제시되고 채택됨에 따른 비판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교문공사 마무리단계에, 3월 20일 완공예정
대학신문, 1978. 2. 27.
“그동안 교내외의 많은 논의 속에 진행된 교문공사가 지난 25일(토) 외부골조공사를 마쳤다. 철근 42.3톤이 소요된 이 공사의 설계에 대해서 당초에는 많은 학생들이 회의적이었는데, 일간지들은 그 설계가 학생들의 합의에 의한 것으로 강남의 명물이라고 일방적인 보도를 했다. 아무튼 그 모습을 드러낸 교문에 대해서 교수와 학생들의 의견은 다양한 형편. 다만 설계와 재료가 초현대적인(?) 것이라는 것과 규모가 너무 작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 정면에서 보이는 그 형태는 다소의 불안정감을 주며 균형을 잃고 있는 듯한데 하여튼 문으로서 세계 최초의(?) 형태인 것만은 틀림없는 듯. 한편 이번 공사 중 「ㅅ」자 부분이 꼭대기가 망가지는 촌극을 빚기도.”
1978년 3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정문이 완공되었다. 서울대학교의 대표적인 상징물, 거대한 ‘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약 4천만 원의 예산을 들여 46톤의 철골 구조로 지어지고 황토색으로 칠해진 정문은 ‘국립서울대학교’의 초성 ‘ㄱ, ㅅ, ㄷ’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한편으로는 학교의 교훈인 ‘진리는 나의 빛(VERITAS LUX MEA)’의 진리를 찾기 위한 열쇠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정문의 내력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관악캠퍼스 이전 후의 정문 공간은 캠퍼스 내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고 탄압당하는 장소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6년 가을 축제 기간의 ‘서울대 축제 시위‘이다. 학생들은 당시 감골마당에서 스크럼을 짜고 “독재 타도·유신 철폐”를 외치며 정문까지 행진하였으며, 출동한 경찰과 정문에서 맞닥뜨려 투석전을 벌이다가 결국 해산하였다. 이후에도 서울대학교 정문 앞에서는 불심검문 및 경찰과 학생의 대치 광경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당시 정문에서 고작 200미터 가량 떨어진 장소에는 소위 ‘동양 최대의 파출소’로 불린 관악파출소가 위치하기도 했다. 1975년 개소한 이 파출소는 대학가 탄압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수백 명의 사복 학원 사찰팀이 파출소에 거점을 두고 학생들과 함께 서울대 구내로 등하교를 같이한다는 말이 있었을 만큼, 당시의 파출소는 그 존재감이 상당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80년대 중반에는 학교에서 단기간 정문이 폐쇄하는 일도 있었다. 주로 여름방학 및 겨울방학 때 운동권 학생들이 교내 캠프를 개최할 때, 캠프 출입을 막기 위해 학교에서 정문을 폐쇄하고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한 것이다. 폐쇄된 출입로 주변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정사복 경찰병력이 배치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정치적인 성향의 시위는 줄었지만, 사회적 쟁점이 발생할 때마다 학생들은 다시금 정문 앞으로 모여들곤 했다. 가장 최근에 정문에서 벌어진 시위는 2011년 9월의 법인화 반대 1인 시위였으며, 이 시위가 종료된 후 정문의 사다리는 철판으로 덮였고 구조물로 올라가는 길도 막히게 되었다.
40여 년이 넘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유한 서울대학교 정문은 제작 단계에서의 우여곡절이 무색할 만큼 현재 학교를 대표하는 명물이 되었다. 매년 2월과 8월의 졸업 시즌에는 학교를 떠나는 졸업생들이 학위복을 입고 ‘샤’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줄을 선다. 서울대입구역 근처 ‘샤로수길’을 비롯한 많은 단어에는 구성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샤’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언제부터 교문으로 대표되는 문장(紋章)이 ‘샤’로 압축되어 불리고 서울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서울대학교 정문이 구성원들에게 상징물 이상의 존재로서 많은 문장과 단어에서 활용되고 사랑받으리라는 사실이다.
한편, 정문의 위치는 같은 자리에서 변한 적이 없지만,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건축 당시 황토색으로 채색되었던 정문은 90년대에 잠시 개나리색으로 바뀌기도 했다. 2006년에는 개교 60주년을 맞아 정문을 은회색으로 새로이 도색하는 한편 야간에도 환히 빛나도록 점등하였고, 기존에 있던 철문은 걷어내었다.
2021년, 서울대학교의 정문은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샤’의 ‘ㅅ’ 아랫부분은 건축 이래 지금까지 학교로 진·출입하는 차량의 통행 도로로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환경개선 공사가 완공되면 해당 부분으로는 보행자가 지나다니게 될 것이며 차량은 ‘샤’를 우회하여 진출입하게 될 예정이다. 보행자 중심 캠퍼스로 전환하는 중장기 프로젝트의 일부인 환경개선 공사가 끝난 후, 새로이 거듭나는 정문과 그 주변 환경의 변화가 학교의 구성원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갈지 지켜볼 일이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5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50년사』, 1996.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기록관, 『고등교육의 새 요람, 1945-1953』, 2015.
서울대학교 기록관, 『지성과 역동의 시대를 열다 1953-1975』, 2016.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s://newslibrary.naver.com/search/searchByDate.nhn
서울대학교 사진갤러리(PHOTOSNU), http://photosnu.snu.ac.kr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신문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