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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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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

민족의 대학, 국립서울대가 설립되기까지

2019. 10. 23.

“개교 73주년을 맞이하여”

광복 직후 이 땅에 남아 있던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제국대학과 몇 개의 관공립 및 사립 전문학교가 전부였다. 민족국가 건설을 담당할 인재양성을 위해서는 식민교육에서 벗어나 우리 손으로 고등교육을 복원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해방 직후 경성제대 한국인 학생들은 경성제국대학의 간판에서 ‘제국’을 종이로 가려 자립적인 고등교육 건설에 대한 열망을 표현했는데,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이러한 열망을 반영하여 1945년 10월 16일 경성제국대학을 경성(서울)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를 총장으로 임명하였으며, 일본인 교원을 파면한 자리에는 백낙준(법문학부장), 윤일선(의학부장), 최규남(이공학부장), 현상윤(예과부장) 등의 조선인 교원을 임명하였다. 경성대학은, 해방 이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관립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승격된 여러 단과대학(경성약학대학, 경성사범대학, 수원농림대학 등)과 더불어 현 국립서울대학의 전신이다.

미군정청 법령 제15호, 미국국립기록청, 1945.10.16.

미군정청 법령 제15호, 미국국립기록청, 1945.10.16.
경성제국대학을 경성(서울)대학으로 개칭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The name of Keijo Imperial University is hereby changed to Seoul University ……

3. This order is effective at midnight 16 October 1945.

BY DIRECTION OF THE COMMANDING GENERAL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A.V. ARNORLD
Major General,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or of Korea (…)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18호, 미국국립기록청, 1945.10.17
크로프츠
크로프츠

미군정청 임명사령 제18호, 미국국립기록청, 1945.10.17
알프레드 크로프츠를 경성대학 총장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2. Lieutenant Alfred Crofts, U. S. N. R, is hereby appointed President of Seoul University and is hereby authorized and directed to perform the duties and functions of that office ……
6. This order is effective at midnight 17 October 1945. (…)

경성대학 및 여러 단과대학은 구 식민지 대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1945년 11월에 100명의 유지인사들로 구성된 ‘조선교육심의회’가 국립 종합대학교를 세우자는 제안을 하였다. 미군정청 학무국에서 일하던 한국인 관리들이 이 제의에 호응하여 군정청은 1946년 7월 13일 ‘국립서울대학교 안’을, 8월 22일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 법령에 따라 9개 단과대학(문리과대학, 공과대학, 농과대학, 법과대학, 사범대학, 상과대학, 의과대학, 예술대학, 치과대학)과 1개 대학원으로 구성된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관립 각 전문을 총 병합, 국립 종합대학교 발족, 경성대학과의 합병안 정식 발표, 자유신문, 1946.7.14.
관립 각 전문을 총 병합, 국립 종합대학교 발족, 경성대학과의 합병안 정식 발표, 자유신문
1946.7.14.

이번 군정청 문교부에서는 각 관립 전문대학을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이에 대신하야 ‘국립서울종합대학교’를 설치하기로 되어 그 계획안의 전모를 13일 문교부에서 발표하였다. … ‘국립서울대학교’의 설치에 대해 문교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문교부로서는 일정시대의 유물인 기존 고등 교육기관을 그대로 존속시킬 아무런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는 기존 고등교육기관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노예화하려는 식민지정책의 잔재인 까닭이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이상하는 새 국가에 적합한 고등교육 기관을 건설하여야 한다.” (…)


대학본부(동숭동)
대학본부(동숭동)
문리과대학(동숭동)
문리과대학(동숭동)
공과대학(공릉동)
공과대학(공릉동)
농과대학(수원)
농과대학(수원)
사범대학(을지로)
사범대학(을지로)
약학대학(을지로)
약학대학(을지로)
상과대학(종암동)
상과대학(종암동)
의과대학(연건동)
의과대학(연건동)
치과대학(소공동)
치과대학(소공동)

상당수의 학생과 교수들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여 국대안(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47년 2월 전국으로 확산되어 당시 동맹휴학한 대학이 57개, 동맹휴학한 학생은 약 4만 명에 달하였다. 한편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지지하는 국대안 지지운동 또한 벌어졌다.

민주학생돌격대, 파쇼 교육제도의 표본 국대안을 분쇄하라!! 1947.3

민주학생돌격대, 파쇼 교육제도의 표본 국대안을 분쇄하라!!
1947.3
해방조선에서 우리들 남녀학생에게 다시금 일본제국주의적 노예교육의 굴레를 뒤집어씌우려는 문화음모가 곧 ‘국립대학안’이며, ★식민지노예교육제의 표본 국대안을 분쇄하라! ★학원에 대한 경찰의 간섭 절대 반대! ★민주학생을 폭압하는 반동경찰을 파면하라! ★민주 투쟁으로 구금된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연구와 학원의 자유를 전취하자!는 내용의 격문이다.

전국남녀학생에 격함, 국립서울대학교건설학생회, 1947

전국남녀학생에 격함, 국립서울대학교건설학생회
1947
“국대안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고 학원에 선풍을 일으킨 제군!” 으로 시작하는 격문은 “우리의 무기는 오로지 학원을 버리고 파괴하는 맹휴가 아니”며 조국문화 재건 촉진, 확립하는 일을 학원에 들어가 배우며 요구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국대안 발표에 이어 문교부는 9월 개학을 위해 곧 총장과 학장을 내정하였다. 총장에는 법학박사 앤스테드(Harry Bidwell Ansted) 대위, 대학원장에는 윤일선, 문리과대학장에는 이태규를 임명하는 등 국대안을 강행하고자 하였다.

국립대학입학식 명십팔일에 거행 독립신보, 1946.9.17.

국립대학입학식 명십팔일에 거행
독립신보, 1946.9.17.
국립서울대학 입학식은 지난 날 거행하기로 되었는데 다수의 교수와 학생들이 참가하지 않아 중지되었었는데 연기기간 중 등록완료자도 속속 증가함으로 인해 18일 오후 2시부터 입학식이 거행된다는 내용이다.

개교 직후 만 1년을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파행을 거듭하다가 1947년 9월 학기부터 수업이 정상화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49년 12월 31일 교육법 제정을 통해 학교의 공식 명칭을 ‘국립서울대학교’에서 ‘서울대학교’로 바꾸었다.

출처
서울대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60년사』, 2006.
서울대학교 기록관, 『고등교육의 새요람 1945-1953 서울대학교』, 2015.
소명출판, 『삐라로 듣는 해방직후의 목소리』, 2011.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대학사료 디지털 컬렉션, http://lib.snu.ac.kr/find/collections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http://nl.go.kr/newspaper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수집대상년도: 1946 ~ 현재, 기증 기록물 활용: 개교기념 역사 전시, 웹서비스 등 / 기록물유형: 사진, 영상, 문서, 기념물 등 / 기증 문의: 기록관 전문요원실(02-880-8819)

담당부서/기록관 (http://archives.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