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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학비재(淺學菲才)

2012.01.30.

정진홍 교수 증명사진글: 정진홍 교수 (종교학과)

천학비재(淺學菲才)란 말이 있습니다. 관악에 몸담았던 스무 해를 되돌아보면 그 말이 저리게 가슴 속에서 솟습니다.

흔히 겸양의 말로 쓰이지만 제게는 그것이 그 곳에서 내내 지녀야 했던 자의식이었습니다. 훌륭한 분들이 많으신 울안에서 그 분들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분들이 지나가신 자리에서 낙수(落穗)만 거두어도 얼마든지 풍요로울 수 있다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하는 말이 무엇을 기술하고 있는지, 그리고 왜 제가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환하게 알고 있는 훌륭한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드문 복입니까? 서울대학에서 살아온 세월 동안 저는 그런 복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울을 벗어나 살면서 그 때를 회상하면 자못 자랑스럽고 뿌듯해야 마땅합니다. 한데 바로 그러한 조건 때문에 실은 관악에서의 스무 해의 삶은 하루같이 어둡고 쓸쓸하고 부끄러웠다고 지금 회상합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제 배움이란 것이 초라하기 그지없는데다 재 주란 고작 학교를 오가고 강의실에 드나드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도 제가 했던 과목들의 강의노트를 단 한권도 다듬어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 반복한 강좌도 없지 않은데 그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법 지난 번 한 강의안을 이번에는 새로운 자료와 터득을 첨삭하여 더 잘 다듬어야겠다고 여기면서 지난 강의안을 새로 다듬고 그 전 것을 버렸다면 지금 쯤 한권은 잘 남아있어 이른바 저술의 자료라도 됨직한데 그런 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물음부터 달라지니 지난 번 강의는 온통 ‘거짓말’을 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자책만을 아프게 남겨놓곤 했습니다.

여러 번, 여러 귀한 분들로부터 충고도 받았습니다. 특정한 학문을 위한 정통적인 수련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가 맡았던 특정과목을 더 강의하지 말라는 결정을 해주시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제 천학을 짐작하신 분들의 당연한 판단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정말 모르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강의실에서는 그저 제 모름을, 제 물음을, 사뭇 쏟아놓기만 했습니다. 교과과정이나 학습목표나 기말평가 같은 것들은 조금도 유념하지 못했습니다.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진도표를 만들고 평가를 하는 일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수강생들에게는 참 미안한 일입니다만 제 마음대로 혼자 저를 발언했을 뿐입니다. 제게 정직하고 싶어서요.

그래도 강의실을 채워준 학생들에게 그저 고마울 수밖에없는데, 그 학생들에게도 친절하진 못했습니다. ‘정답’이기는 하지만 ‘게으른 답안지’ 라고 윽박지르면서 낮은 점수를 마구 흩뿌렸습니다. 그런데도 뜻밖에 ‘후한 점수’로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짓을 하면 안 된다는 충고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천학비재한 사람이 학생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는 판단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을 이제는 짐작이 됩니다. 이래저래 훌륭한 동료들과 훌륭한 학생들에게 참 못난 짓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학교생활이 거의 끝날 즈음해서는 아예 제 전공인 종교학에서 ‘종교’라는 말을 계속 사용해도 좋은지 어쩐지 당혹스럽게 되고, 종교란 말을 조금도 쓰지 않고 종교를 운위할 수는 없을까 하는 ‘망상’에 빠져 있었으니 저에게는 ‘은퇴’가 저와 제 훌륭한 동료들과 총명한 학생들을 위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는지요.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에 저는 ‘종교와 종교학’ 강좌를 하고 있었는데 그 끝 시간에 저는 단 한마디도 그 주제에 맞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사람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렇게 함께 잘 살아가려면 남을 진심으로 배려할 줄 알아야 해!’ 하는 투의 이야기를 중언부언했 을 뿐입니다. 훌륭한 집단에서 못난 제가 겪은 시림을 담은 것이기는 해도 그런 마지막이야 말로 천학비재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회상입니다.

이제는 제 경험을 학문은 도그마가 아니라는 말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 좋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이야 말로 또 다른 도그마가 아닐는지요. 여전히 저는 천학비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문대 소식] 1호에 기고하신 글입니다.